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24장 헬라어 강해] 예수님 재림에 일어날 징조(마 24:3-14)

르호봇 2021. 4. 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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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4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예수님 재림에 일어난 징조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강화를 통해서 마지막 종말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복음이 판을 치게 됩니다. 온전한 복음을 들어야 하는데 거짓 복음을 들음으로 성도들이 미혹을 받게 됩니다.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서 성도들을 미혹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난다고 했습니다. 외형적인 일들도 일어나고 영적인 일들도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현혹하지 말고 신앙을 지키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이 주님이 오시는 때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날짜 계산하면서 기다리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거짓 복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성도에게는 가르쳐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복음을 열심히 듣고 전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 됩니다. 

예수님 재림에 일어날 징조(마 24:3-14)

 

3절 카데메누 데 아우투 에피 투 오루스 톤 엘라이온 프로셀돈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카트 이디안 레곤테스 에이페 헤민 포테 타우타 에스타이 카이 티 토 세메이온 테스 세스 파루시아스 카이 테스 쉰텔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

마 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24:3

에수는 이 산에 올라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표라고 볼 수 있다.

‘감람(搬橋)’이라는 말은 올리브나무 (Olive)를 한역한 단어이며 영어의 ‘올리브 (olive)'는 ‘엘라이온’의 기본형 ‘엘라이아'에서 온 음역이다. 따라서 ‘투 오루스 톤 엘라이온’은 ‘올리브나무들이 있는 산’이란 의미이다. 이 산이 이렇게 불린 것은 올리브나무가 산의 나무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올리브나무 산은 예루살렘 동쪽 약 1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스가랴 14:3 ‘ 4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 날에 여호와께서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 위에 (upon)’ 를 의미하는 전치사 ‘알’ 이 쓰였다. 여호와께서 심판 날 감람산 위에 서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 심판에 대한 강화( discourse)를 하시려고 감람산 위에 앉으신다. 감람산 위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제자들은 그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성전을 보면서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의 날이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래서 예수께 물었다(1절 ; 막 13 :1). 

그러나 예수님은 동일한 것을 보시면서도 얼마 후에 닥칠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는 물론 종말에 있을 대환난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까지 예견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신적 예지력을 가지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아셨기 때문이며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만큼 유대인들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은 25:46까지 계속되는 감람산 강화가 본격 시작되는 부분인데 이 강화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다섯 강화 (5 : 1-7. 29; 10:1-42; 13:1-52; 18:1-35; 24 :1-25:26) 가운데 가장 마지막 강화이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종말의 날에 다시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을 보여 주며 종말에 임할 고난을 이길 것을 교훈하시는 감람산 강화가 마지막 강화로 주어지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4절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이에수스 에이펜 아우토이스 블레페테 메 티스 휘마스 플라네세

마 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24:4

실제로는 종말의 징조가 아니지만 그런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미혹되어 잘못된 위기의식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다.

본절부터 시작하여 25:46까지는 제3절에 나오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주어진 종말과 관련한 주님의 본격적인 감람산 강화이다. 여기서 언제 종말이 이르겠으며 그때의 징조가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때와 징조에 대해서 먼저 대답하지 않으시고 주의해야 할 일을 먼저 말씀하신다.

본문을 직역하면 ‘너희들은 주의하여라 사람이 너희를 잘못된 길로 이끌지 않도록’으로서 ‘너희들은 주의하여라’에 해당하는 ‘블레페테’가 문장 서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이는 ‘보다’ ‘주의 깊게 살피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블레포’의 명령형 현재이다. 동작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현재형이 사용된 것은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주의 깊게 살피라는 뉘앙스를 전달해 준다. 

이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이 성도를 잘못된 길로 이끌 때에 정신 차려 조심하지 않으면 미혹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혹을 받지’라는 수동태로 번역된 ‘플라 네세’가 사실은 ‘플라나오’의 능동태 3인칭 단수이다. 이는 미혹하는 사람이 매우 적극적으로 미혹할 것을 암시한다. ‘플라나오’는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 멸망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그러나 본문에는 부정어 ‘메’와 함께 쓰여 거짓 그리스도와 같은 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자들은 진리 안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진리의 영과 진리의 말씀을 따라 신앙을 견고히 하지 않으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등 악한 영의 능력으로 활동하는 자들(요일 4 : 1)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들에 의해 그릇된 길로 가게 될 것이다. 특별히 종말에 관한 여러 말씀 중 미혹받지 말라는 말씀을 가장 먼저 하신 주님의 의도는 역설적으로 종말과 관계된 미혹이 매우 많을 것이며 주의를 게을리하면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기 쉬움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5절 폴로이 가르 엘류손타이 에피 토 오노마티 무 레곤테스 에고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 카이 폴루스 플라네수신

마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24:5

대부분의 거짓 그리스도들은 ‘내가 그 그리스도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칭할 것이다.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 동사 자체에 1 인칭 대명사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굳이 ‘나는’에 해당하는 ‘에고’를 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고’를 쓴 것은 ‘바로 나야말로 그 그리스도이다’ 란 매우 강조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본문에는 ‘호 크리스토스’ 역시 강조되어 있다. 이는 본문과 병행구인 막 13:6과 눅 21 :8에는 ‘에고 에이미’만 있을 뿐 ‘호 크리스토스’는 없기 때문이다. 메시아를 대망하는 유대 민족에게 또한 그리스도의 재
림을 대망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선언은 매우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역사적 격변기에는 자칭 그리스도라 일컫는 자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고 스스로 칭하는 거짓 선지자들도 난무한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 직전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에도 그런 자들이 성행하였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렘 14: 14). 

초대 교회 당시 종말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에도 도시데우스(Dositheus) 라는 어떤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모세에 의해 예언된(신 18: 15) 선지자라고 주장하였으며 드다(행 5 :3 6)와 마네스 (Manes) 등도 그러한 부류의 거짓 그리스도였다.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는 20세기에도 수 없이 일어났다. 1993년 미국의 데이비드 코레쉬 그리고 한국의 박태선, 조희성, 문선명, 그리고 정명석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고 있는 우리에게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고는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할 너무나 적절한 교훈이다.

6절 멜레세테 데 아쿠에인 폴레무스 카이 아코아스 폴레몬 호라테 메 드로에이스데 데이 가르 판타 게네스다이 알르 우포 에스틴 토 텔로스

마 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24:6

난리 - ‘난리(亂離)’라는 의미로 번역된 ‘폴레무스’의 원형 ‘폴레모스’는 ‘전쟁’, ‘전투’라는 의미를 지닌 명사이며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다.

영어 번역 성경인 KJV, NIV, RSV, NASB 등은 모두 이를 ‘전쟁 들 (wars) ’로 번역하였다. 이 전쟁들은 국내의 적대적 세력들 간에 벌어지는 쟁투 종교적 신념의 차이로 기인되는 종교전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벌어지는 전쟁 제국주의의 표방으로 일어나는 전쟁 등 역사상 발생해 온 모든 전쟁들을 가리키는 보편적 용어이다. 본문에서는 종말 직전에 이러한 각종 전쟁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할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복수형이 사용되었다.


한편
‘듣겠으나’로 번역된 ‘멜레세테 데 아쿠에인’에서 ‘벨레세테’의 원형 ‘멜로’는 ‘이제 막 ~하려고 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이것이 본문에서처럼 부정사와 함께 쓰이면 ‘이제 막 ~하려고 하는’ 또는 ‘~할 작정이다’ 또는 ‘~하게 될 운명이다’라는 세 가지의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문맥상 첫 번째 의미와 더불어 세 번째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첫 번째 의미로 해석하면 ‘멜레세테 데 아쿠에인’은 ‘너희들이 이제 막 들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되며 세 번째 의미로 해석하면 ‘너희들은 듣게 될 운명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종말의 때에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갑자기 늘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첫 번째 의미가 타당하나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란 표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종말과 그 종말 전에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하에 이미 정해 놓으셨다는 측면에서 세 번째의 의미도 타당성이 있다.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 ‘두려워’로 번역된 ‘드로에이스데’의 원형 ‘드로에오’는 문자적으로 ‘크게 외치다’ ‘부르짖음으로써 소음을 일으키다’라는 의미이나 여기에서 ‘놀라다’ ‘두려워하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한편 ‘너희는 삼가’로 번역된 ‘호라테’는 ‘보다’ ‘익히 알게 되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호라오’의 명령법 2인칭 수동태 복수형이며 뒤에 나오는 부정어 ‘메’와 더불어 ‘너희들은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병행구 막 13:7과 눅 21:9에는 ‘호라테’가 없다. 따라서 ‘호라테’는 마태가 강조적으로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있게 될 전쟁들의 소문을 들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놀라거나 두려워 호들갑을 떨면서 소리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은 그러한 전쟁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종말이 곧바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7절 에게르데세타이 가르 에드노스 에피 에드노스 카이 바실레이아 에피 바실레이안 카이 에손타이 리모이 카이 로이모이 카이 세이스모이 카타 토푸스

마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24:7

민족이 민족을 일어나겠고 - ‘민족’으로 번역된 ‘에드노스’는 함께 모여 있는 ‘대중’ ‘무리’를 의미하며 인간 집단뿐 아니라 동물이나 곤충의 ‘떼’를 가리키기도 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약 160회 사용되었는데 이 중에서 64회는 특별한 구별 없이 유대 민족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 혹은 ‘민족들’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롬 15 :11와 같은 어떤 경우에는 유대 민족을 포함하지 아니한 기타 이방 민족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여기에서는 유대 민족을 포함한 모든 민족들을 의미한다. ‘민족’은 국가라는 개념을 초월해 존재하는 개념이므로 본절은 국제 전쟁뿐만 아니라 한 국가 내에 다양하게 존재할 수도 있는 여러 민족들 간의 전쟁까지 포함한다. 구약 성경 이사야 19:2이나 역대하 15:6에는 민족이 민족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본절의 전쟁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이 A.D.70년에 로마의 말발굽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에 일어났던 알렉산드리아 전쟁, 셀루치아 전쟁, 양니아 전쟁 등과 같은 분쟁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는 역사를 통해 이어져오고 있는 모든 전쟁 그리고 특히 종말이 임박한 시점에서 보다 활발하게 일어날 전쟁들을 가리킨다.

8절 판타 데 타우타 아르케 오디논

마 24: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24: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 ‘재난’으로 번역된 ‘오디논’의 원형 ‘오딘’은 ‘참을 수 없는 고통’ ‘무서운 재난’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는 사람이나 동물이 분만할 때 겪는 해산의 진통을 묘사하는 동사 ‘오디노’ 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그 고통이 해산할 때 겪는 고통만큼 참을 수 없이 심각한 것을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여서 여러 사람들이 겪는 심한 고통과 재난의 의미일 수도 있고 다양한 형태의 고통과 재난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재난들은 기근과 지진 등으로 시작되는 종말 전의 본격적 고통과 재난들을 가리키는데 특이할 사항은 이 고통들을 끝으로 하여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디논’이 해산의 고통을 나타내는 명사라는 데서도 암시된다. 임산부가 해산할 때의 고통은 참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 고통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는 기쁨이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종말적 고통들의 과정을 겪고 나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9절 토테 파라도수신 휘마스 에이스 들립신 카이 아포크테누신 휘마스 카이 에세스데 미수메노이 휘포 판톤 톤 에드논 디아 토 오노마 무

마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24:9

실제로 야고보, 베드로, 바울 등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순교하였고 그 외의 사도들도 거의 순교하였다.

환난에 - ‘환난’으로 번역된 ‘들립신’의 원형 ‘들립시스’는 ‘분쇄하다’, ‘짓누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들리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사방에서 내리누르는 ‘억압’ 그리고 그로 인한 ‘고난’을 의미한다. 본서에서 이 단어는 모두 4회 사용되었으며 3:21; 24:9.21. 29) , 성도들이 겪는 심각한 종말의 고통을 가리킨다.


한편 사람들에 의해 환난 속으로 넘기어지는 객체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를 포함하여 주님을 믿는 모든 신실한 성도들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당하는 이러한 환난은 실로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난이다. 실제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크나큰 핍박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으며(행 8: 1), 야고보 같은 사도는 헤롯의 칼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하는 환난을 경험하기도 했다(행 12 :2). 

또한 네로, 도미티안, 트라얀, 하드리안, 데시우스, 발레리안, 디오클레티안과 같은 로마 황제들은 약 250여 년에 걸쳐 기독교인을 대대적으로 박해하였으며 수없이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불에 태워 죽이거나 동물의 먹이로 던지는 등 갖은 고통을 가하였다.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도 이러한 고난이 재현되어 많은 성도들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할 것이다. 과연 그때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실로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눅 18:8).

10절 카이 토테 스칸달리스데손타이 폴로이 카이 알렐루스 파라도수신 카이 미세수신 알렐루스

마 24:10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24:10

시험에 빠져(스칸달리스데손타이)'걸려 넘어지게 하다', '죄를 짓게 하다' 또는 '노하게하다' 등의 뜻을 가졌다. 새 번역에서는 '믿음을 잃고'라고 번역되어 있고 공동 번역에서는 신앙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로 번역되어 있다. 문법은 직설법 미래 수동태 복수 3인칭이다. 수동태를 사용한 것은 시험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는 결국 박해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말이다(살후 2:3). 이처럼 종말의 때가 가까워오면 교회의 외적인 풍랑과 더불어 교회 내부로부터의 분란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때는 인내와 믿음이 더욱 요구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벧전 4:12).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새 번역과 공동 번역 모두 '서로 배반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공동체 분열의 모습이다.

여기서 '서로'(알렐루스)는 상호 대명사로서 쌍방 간의 행위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서로 똑같이 배신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의 간교(奸巧)하고 악의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말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세상의 종말이 이르게 되면 사랑과 하나 됨의 공동체인(15:17) 교회에서도 분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이 같은 교회 내부의 분란이야말로 성도가 맞는 가장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징조이다.

11절 폴로이 프슈도프로페타이 에게르데손타이 카이 플라네수신 폴루스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24:11

거짓 선지자(프슈도프로페타이) - 여기 이들은 비록 초자연적인 이적과 능통한 언변(言辯)을 지녔을지라도 그 가르침과 행위가 진실에 입각하지 않은 자들이다(13:11 ff). 실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주의는 예수와 사도들에 의해 여러 번 주어져 왔는데(7:15 ; 24:5 ; 고후 11:13 ; 딤후 2:17, 18), 들 거짓 선지자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 등의 모습으로 교회의 질서와 진리를 와해시키는데 힘을 쏟았다(20:30 ; 1:7-9 ; 2:18-23). 실로 기독 교회사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수없이 유린(蹂躪)당해 왔으며 지금도 그들의 사특(邪慝)한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중병을 앓고 있다(살후 2:8-12).

12절 카이 디아 토 플레뒨데나이 텐 아노미안 프쉬게세타이 헤 아가페 톤 폴론

마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24:12

불법(아노미아) - 부도덕성과 무질서적인 방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전통적 규범이나 윤리적 가치 기준이 상실됨을 말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진리와 신앙이라는 미명 하의 온갖 비신앙적 작태(作態)와 방종과 타락을 가리킨다(살후 2:3, 7, 8). 한편 오늘날 이러한 부도덕적 사회 현상을 가리켜 '아노미 현상'이라고 지칭한다.

사랑이 식어지리라 - 여기서 '식어지다'(프쉬게세타이)는 '숨쉬다', '싸늘해지다'는 뜻의 '프쉬코'에서 나온 말로서 '싸늘한 숨을 쉬다' 또는 '차가워지다', 그리고 좀 더 심층적으로 '해로운 바람으로 인해 영적 열성이 식어지다'(Vincent)등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법은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단수 3인칭이다. 수동태는 실제로 사랑이 식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될 것을 말한다.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는 '아노미 현상', 곧 불법으로 인한 내적인 불화와 균열(龜裂)때문이다. 실로 이 구절은 9-11절까지 나타난 교회 분열로 인한 결과이며 결론이다. 결국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면 8절의 내용처럼 세상의 끝날이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사랑'(아가페)이라는 명사는 공관 복음서에서는 눅 11:42와 여기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가복음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설명된 데 비해 본문은 형제 상호 간의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성도가 추구해야만 하는 형제 사랑은 오직 하나님 사랑에 그 기초와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요일 4:10, 19). 그리고 형제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의 확실한 발로인 것이. 여하튼 모든 율법, 모든 의식(儀式), 모든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도 사랑이 식어지면 끝이 되고 만다(고전 13).

13절 호 데 휘포메이나스 에이스 텔로스 후토스 소데세타이

마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4:13

끝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의 ''5절부터 나열한 여러 가지 재난과 박해 그리고 공동체의 분열이 있을 고난의 기간이 끝날 때를 말한다. 그리고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는 '굳게 서다', '참아내다'는 뜻으로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적 신앙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끈기 있게 버텨나감으로써 끝내 승리, 쟁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사람들의 배신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뢰하며 온갖 실망이 겹쳐 절대 절망에 이르렀어도 희망을 갖고, '아노미 현상'과 같은 혼란의 시대에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사랑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곧 견디는 자이다.

구원을 얻으리라 - 끝까지 견디는 자의 보상은 구원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세상의 끝날에 얻게 되는 천국 소유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끝은 곧 세상의 완성이므로 그때까지 견딘 자는 완성된 하늘나라에서 천국 백성의 자격을 갖고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이것은 종말적 심판의 때에 얻는 최종적 구원을 의미한다.

(2) 현세의 구원에 대한 의미도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상 끝에 나타날 종말적 징조는 예수 시대에도 이미 나타났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임박한 종말 사상을 갖고 살았고, 한 종말의 징조는 역사 속에서 꾸준하게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지적했던 그런 징조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구원은 종말적 최후의 날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현실적인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더욱이 성도에게 매일 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process)으로 볼 때 날마다 겪는 새로운 여러 가지의 유혹들을 이겨내고 뜨거운 사랑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매일 구원을 고대(苦待)하며 필요로 하는 자는 날마다 종말적 자세로 사는 것이다.

14절 카이 케뤼크데세타이 투토 토 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엔 홀레 테 오이쿠메네 에이스 마르튀리온 파신 토이스 에드네신 카이 토테 헥세이 토 텔로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4:14

천국 복음( 테스 바실레이아스) - 이는 마태복음의 특징적 표현이다(4:23; 갈9:35; 24:14). 여기서 ''이란 예수께서 지금 전파하고 계신 그 메시지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 자신을 지칭한다(1:14; 고후 5:18). 한편 복음의 요체는 '천국' 곧 모든 나라와 모든 인격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이다(3:2; 4:23).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 혈통과 민족을 초월한 천국 복음의 포괄적 성격을 보여 준다(고전 1:24). 여기서 '증거'(마르튀리온)란 신앙에의 부름을 위한 유일한 근거이자 복음을 배척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정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복음 증거의 양면성이다.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 여기 '온 세상'은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종말이 이때, 곧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후에 올 것이라는 사상은 사도들이 계승한 사상이었고 신약 성경 안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눅 :1 ; 4:5 ; 11:28 ; 17: 6, 31 ; 19:27 ; 10:18 ; 3:10 ; 12:9 ; 16:14). 편 당시 '온 세상'을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영역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1:8 ; 15;23).

그러나 본문에서의 '온 세상'이란 좀 더 포괄적이고 광의적(廣義的)인 의미로서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지역, 곧 전 세계의 모든 곳이라는 뜻으로 봄이 좋다. 어쨌든 다른 민족들에게도 이 천국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세상의 '이라는 말은 세상의 심판과 멸망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세상의 완성이라는 말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8, 13절 주석 참조). 실로 세상이 완성되는 날, 그날은 모든 민족이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끝은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희망과 무한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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