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사도행전 5장 헬라어 강해]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의 죽음(행 5:1-6)

르호봇 2021. 4. 1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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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5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의 죽음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초대교회가 성장해 나가면서 기적과 이적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의 것들을 교회에 헌납하여 함께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의 재물을 교회에 헌금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판 것의 값을 교회에 가져왔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나바입니다. 이런 와중에 아나니아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았는데 그 값의 얼마는 감추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죽게 됩니다. 성령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속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하고 서원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지키지 않으려면 차라리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지키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의 죽음(행 5:1-6)

 

1절 아네르 데 티스 아나니아스 오노마티 쉰 삽페이레 테 귀나이키 아우투 에폴레센 크테마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5:1

누가가 여기까지 우리가 알아듣도록 설명해 온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진 그 단체가 사람들의 단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천사들의 단체와 같았다는 사실이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돈뿐 아니라 그들의 토지까지도 내던졌다는 것은 견줄 데 없는 덕행이었다. 이제 그는 실제로 다음의 사실을 보여준다.

즉 사단은 이 거룩한 고단(holy community)에 자립할 계략을 고안해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고상한 미덕으로 감싸여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교묘하게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놀라운 위선의 방편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공공연한 싸움에서 승산이 별로 없을 때 그런 위선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는 방법을 삼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우리는 성령의 의도하시는 바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그는 첫째로 마음의 정절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또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것을 얼마나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인가 그리고 둘째로는 교회에서의 순결하고 거룩한 정치형태를 얼마나 크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가를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요점은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에게 과하신 형벌인 것이다. 그 당시에 그 중한 형벌이 모든 사람들을 두렵게 한 것처럼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우리가 성도의 겉치레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로 농락한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불성실을 용납하실 수가 없다는 훌륭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냐하면 우리가 모든 사정을 고려하면서 전체면의 진실을 알려고 한다면 누가는 거짓된 헌금으로써 하나님과 교회를 기만하려고 한 단 한 가지 죄 때문에 아나니아를 비난한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만의 배후에는 많은 악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비뚤어진 마음을 알고 계셨지만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을 멸시한 일, 둘째 그는 하나님에게 바쳐지기로 스스로 표명한 것의 일부를 절취함으로써 신성을 모독하는 부정을 자행한 일, 셋째 그릇된 허영심과 야심,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이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환심을 사고자 한 일, 넷째 불신앙,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러한 범행의 길에 발길을 내딛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신앙적이고 거룩한 계획을 망쳐놓은 일, 여섯째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제적인 위선이 그 자체 안에 있는 큰 죄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그의 계획적이고 뻔뻔스러운 거짓말이 첨가될 수밖에 없다.

아나니아가 자기의 토지의 값의 절반을 바쳤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위가 표면상으로는 훌륭하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고르게 분배해 주는 일은 실상 큰 미덕이다. 그러나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15:8) 그리고 마음의 진실함이 동반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과부가 드린 동전 두 푼을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저대한 재산에서 끄집어낸 큰 액수보다 더 많이 드린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생각하시는 것이다(눅21:2)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에게서 매우 강렬한 징벌을 예로 만드신 이유이다.

2절 카이 에노스피사토 아포 테스 티메스 쉬네이뒤이아스 카이 테스 귀나이코스 아우투 카이 에넹카스 메로스 티 파라 투스 포다스 톤 아포스톨론 에데켄

행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5:2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 야심이라는 것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 아나니아는 자기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돈에 욕심이 있는 자이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 가운데서 스스로 좋은 명망(名望)을 얻어내기 위하여 자기 재산의 일부분을 내놓았다.

동시에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일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께서 그 거짓으로 인하여 자기를 형벌하실 것이라는 일에 대하여 전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실제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눈보다도 사도들의 발을 더 존경한 것이. 그러므로 우리가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 세인의 눈길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가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theatri plausum)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진정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충고해 주셨다. 즉 우리가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거시 온당한 일이라는 것이다(마6:3)

3절 에이펜 데 페트로스 아나니아 디아티 에플레로센 호 사타나스 텐 카르디안 수 프슈사스다이 세 토 프뉴마 토 하기온 카이 노스피사스다이 아포 테스 티메스 투 코리우

행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5:3

베드로가 가로되 - 베드로는 어떻게 아나니아의 사기행위를 알게 되었던가? 의심 없이 그것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가는 사도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을 대표하였고(sustinuisse Dei personam) 또 그의 대리로 행동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제 만일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죽어야 할 사람의 입을 이용하셔서, 비록 사람이 거짓된 미덕의 외관 속에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그 위선자를 그처럼 즉석에서 타격을 가한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출두하게 될 때에 그 나팔의 날카로운 음향을 동반한 하나님 자신의 음성 앞에 어떻게 위선 된 인간들이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 찼다고 말함으로써 그 범죄의 가공할 만한 것임을 지적해 준다.

왜냐하면 사단의 독에 마음이 찔림을 받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또 많은 유혹이 이들 개개인에게 몰래 스며와서 그들의 마음속까지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이 그 마음을 잡게 될 때에 마치 하나님은 거기서 추방되는 것처럼 되기 때문에 사단이 그 사람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머물만한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그가 사단에게 넘겨졌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표지인 것이.

거짓말한 일에 뒤따르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그가 성령을 소유한 것 같은 거짓 겉모양을 지은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가 성령을 거슬러 거짓말한 것이거나 어느 것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헬라어에) 문자적으로는 '성령을 속인 것'(Spiritum mentiri) 그러나 헬라어의 (프슈데스다이)라는 말은 이중의 대격(對格)에 연결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본문에 더 적합하므로 나는 차라리 아나니아가 자기의 불신 행위로 성령을 조롱하였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에 동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조금 후에 아나니아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이를 확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선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대단히 자신을 수호하는 일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위선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만하려는 악이요, 또 이를테면 속담에 있듯이 생 눈을 빼가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치스러운 조롱으로써만 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생겨난 것은 그 마음이 사단에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라고 베드로가 말한 것은 자못 지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식별력과 이성을 잃지 않고서야 감히 그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모욕적인 행위를 가질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것이 마치 하나의 괴물에 관한 일인 양 그를 심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무분별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4절 우키 메논 소이 에메넨 카이 프라덴 엔 테 세 엑수시아 휘페르켄 티 호티 에두 엔 테 카르디아 수 토 프라그마 투토 우크 엡슈소 안드로포이스 알라 토 데오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 그에게는 아무런 필요 요건이 없었는데도 죄를 범하였다는 그 사실이 그의 죄과를 더욱 크게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그 범죄가 어떤 외부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자극되었다는 적당한 구실이 전혀 없는 까닭에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악으로 달려가 이를테면 일부러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나쁜 일인가?

그러나 이 사실에서 우리는 거기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법으로써 그 재산을 양도하도록 강제된 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추측한. 왜냐하면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자기 돈을 남겨두거나 자기의 토지를 팔지 않고 소유하거나 할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의 나중 부분에서 팔린 밭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이 실제의 값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소유재산이었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는 불신앙의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자기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못 정신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 이 문구는 다르게 구성되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앞의 글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선자란 많은 덮개로 가려져서 자신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나니아는 교회를 속였기 때문에 베드로는 참으로 분명하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도 그 가운데 계셔서 주재하신다"(18:20)는 사실을 그는 고려할 필요가 있었으며, 또 그 모임에서는 마치 자기가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지배권을 잡기 원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어떤 존경을 바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써 행사하시는 그 통치권을 우리는 철저하게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그러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직책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사사로운 일은(privati) 행동하지 않았다. 한편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즉 성령을 속이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의 표현으로 성령의 신성이 확실히 주장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동일한 생각으로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3:16)고 말한다.

5절 아쿠온 데 아나니아스 투스 로구스 투투스 페손 엑셉쉭센 카이 에게네토 포보스 메가스 에피 판타스 투스 아쿠온타스 타우타

행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 아나니아의 죽음은 참으로 말씀의 능력이 어떠한 것임을 확증해 준다. 바울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고후 2:16)라고 말함으로써 이 말씀의 능력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실상 혼의 영적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만 아나니아의 몸에서는 인간의 눈에는 숨겨져 있는 그 형벌의 가견적인 상징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칼로나 세력으로나 어떤 사람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생명을 빼앗긴 것이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복음을 박해하는 일의 두려움을 알아야 하며 또한 우리도 동일한 운명을 경험할 것에 대비하여 재빨리 스스로 겸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다"(사11:4)라고 선언된 사항은 악인의 우두머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요 또한 각자 개인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의 고유의 본질은 구원하는 것이었으므로 말씀이 제공해 주는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만일에 누구에게라도 사도가 육체적 형벌을 준 것이 부조리하게 여겨진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첫째로 그것은 나의 비상(非常)한 일이었으며 둘째로 그것은 고린도전서 1210절에서 밝혀진 대로 성령의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바와 같이 이것이 바로 마술사 엘루마(Elymas), 바울에 의하여 소경이 된 까닭인 것이다(행13:11) 그러므로 베드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주어진 화살을 적당한 때에 쏘았는데 그것은 그의 직책에 벗어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그 형벌은 너무도 잔혹한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들이 아나니아의 죄과를 하나님의 저울로 달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들의 것으로 달기 때문이, 떠 따라서 우리가 그처럼 많은 죄악으로 가득 찬 것으로 이미 나타난 중대한 범죄를 아주 하찮은 허물 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것은 신빙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날마다 그들은 대단히 많은 위선자들이 아나니아 못지않게 하나님을 조롱해도 처벌이 면제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실상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할만하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지독한 하나님 모독자들이지만 자기들의 불경 때문에 형벌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그의 교회 위에 눈에 보이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성령의 신비한 능력으로써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신앙 경험에 의하여 내적으로 실감한 바를 외적인 표적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교회를 조롱하는 모든 위선자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두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벌에 의하여 명시하신 것이다.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 한 사람의 형벌로써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위협하는 일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그로써 그들이 의식적으로 모든 허위를 단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가가 그들이 두려워한 일에 대해서 말한 바는 우리에게도 또한 적용된.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성실할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모든 세대에 대해서 일반적인 경고를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가련한 사람의 형벌은 그 후에 신도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재산을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에게 바치는 일을 더욱 풍성하게 하도록 장려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선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 일이며, 그 일을 더럽히는 일은 그처럼 엄하게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6절 아나스탄테스 데 호이 네오테로이 쉬네스테일란 아우톤 카이 엑세넹칸테스 에답산

행 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5:6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유구무언이더라"(한글 개역과는 다소 다름:역주). 혼인예식에 예복 없이 참여한 자의 경우와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아무 말도 변명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죽었기 때문에 변명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베드로가 그에게 말한 즉시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계획하고 또 바랐는가 하는 사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계획한 것같이 보이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그의 아내 삽비라에게 특별히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천사가 그를 쳤으므로 헤롯과 같이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12:23). 또는 죄책감에 대한 공포와 놀람으로 양심의 가책이 커서 그 중압감에 눌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어쩌면 그가 성령을 속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성령을 거스리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였고 이 사실이 비수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는지도 모른다. 사도들의 입에서 역사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기억하자. 어떤 이에게 그것은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향기"요, 어떤 이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저주"가 되는 것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받는 사람도 있다. 아나니아의 처벌이 가혹하게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것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확신해야 한다.

아나니아의 처벌은 복음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최근에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시도된 일이었다. 아나니아가 성령에게 가한 모욕은 대단한 것으로 그는 성령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은 또한 사도들의 증언을 무효화시킬 위험을 내포하였다. 만일 그들이 성령에 의해 이 거짓말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어찌 성령으로 또한 하나님의 오묘한 사실들을 발견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사도들의 은사와 능력은 보장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처벌은 또한 애초에 다른 이들도 이 같은 외람된 짓을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 후 마술사 시몬(8:9 절 이하)이나 박수 엘루마(13:8 절 이하)도 이같이 처벌당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제 아나니아는 그 첫 본보기였다. 성령을 영접하는 것이 얼마나 고무적인가 하는 뚜렷한 증거가 주어진 것과 같이 성령을 거스르고 그를 모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나타내 주는 뚜렷한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금송아지에 예배함으로, 또한 안식일에 나무를 함으로 그 처벌이 얼마나 혹독하였었는가! 이제 그 새로운 계명이 주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림으로, 또 고라와 그의 무리가 반역함으로 불이 그들을 삼키었던 것같이 이제 하늘로부터 심판의 불이 새롭게 임하였으며 모세와 아론에게 주어졌던 위엄이 새롭게 전하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처벌은 베드로에 의하여 다스려졌다. 얼마 전에 베드로 자신도 거짓으로 주님을 부인하였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그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원한으로 아나니아를 벌한 것이 아님을 지시해 준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결점을 지니고 있다면 같은 범죄를 저지른 자를 불쌍히 여겼을 것이며 자신이 회개하고 그러므로 용서를 받았다면 이 모욕도 용서하고 이 범죄자가 회개하도록 종용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베드로 안에 계신 성령이 하신 일이었다. 그에게 모욕이 가해졌고 그러기에 그에 가하여 처벌도 행하여진 것이다.

그는 즉시 장사되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6절). 로마인들 가운데 libitinarii와 polinctores가 있었던 것처럼 교회에서도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일을 맡은 "젊은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사도들의 시중을 들며 뒷바라지를 해 주던 젊은 이들이 있어서 비록 아나니아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즉시 죽었지만 이들 젊은 이들이 그 시신을 관보로 싸서 친절히 "장사"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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