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25장 헬라어 강해] 재림의 징조 양과 염소 비유(마 25:31-46)

르호봇 2021. 3. 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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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재림의 징조 양과 염소의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양과 염소를 가지고 비유하셨습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신다고 했습니다. 양은 구원받은 백성을 염소는 구원받지 못한 백성을 말합니다. 오른쪽은 성경에서 영광을 상징합니다. 왼쪽은 수치를 상징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는 창세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천국을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는 마지막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거룩한 신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도둑같이 오셔서 심판하십니다. 노아 때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에 정신이 팔려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여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종말론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

 

31절 호탄 데 엘데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엔 테 독세 아우투 카이 판테스 호이 하기오이 앙겔로이 메트 아우투 토테 카디세이 에피 드로누 독세스 아우투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25:31

인자(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 이 말을 직역하면 사람(안드로푸)의 아들(휘오스)이 된다.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명백히 자신을 '인자'와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문맥상(24:3) 종말의 때에 심판주로 구속주로 임하시기로 약속된(7; 3:1-12 ; 슥 14:5)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셨다(8:20 ; 눅 5:24).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 심판의 주께서 최후의 순간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다(16:27 ; 24:30 ; 살전 4:16 ; 살후 1:7, 8). 여기서 특별히 '영광으로'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신적(신적) 광휘가 충만한 예수가 오시는 모습을 바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붙여진 형용구이다(Broadus).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사실은 예수 재림의 장면이 전우주적인 성격을 지닌 장엄한 것임을 암시한다(24:31 ; 살후 1:7, 8 ; 14:14-20). 한편 본문의 말씀은 주께서 수난 당하시기 전 단지 3일 전에(26:5, 17)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예언적 메시지가 지니는 신적 탁월성과 차고 넘치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심판자로서 뿐 아니라 왕으로서(34절) 오실 것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19:28 ). 특히 그'보좌'는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사될 것을 가리킨다(28:18; 고전 15:25 ; 12:12).

32절 카이 쉬나크데세타이 엠프로스덴 아우투 판타 타 에드네 카이 아포리에이 아우투스 아프 알렐론 호스페르 호 포이멘 아포리제이 타 프로바타 아포 톤 에리폰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25:32

모든 민족을(판타 타 에드네) - 똑같은 구절이 24:14과 28:19에도 나온다. 여기 '모든 민족'은 유대 민족을 포함하여 이방 세계의 모든 민족까지 가리키는 것으로서(행 17:26) 보편적 심판의 의미를 주고 있다. 따라서 종말적 심판이 보편적 심판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실로 천국 복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기 때문에(2:1-12 ; 3:15, 16; 8:11) 모든 민족은 왕 앞에 서야 한다.

모으고(쉬나크데세타이) - 수동태로서 번역하면 '모여지고'가 된다. 이는 모든 인류를 주 앞으로 모으는 추수꾼 천사의 사역이 역력히 암시된 표현이다(24:31). 수동태이기 때문에 아무나 종말에 모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모여지게 된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선택받은 백성을 불러 모으신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 종말적 심판의 때에, 열 처녀 비유나 달란트 비유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을 비유의 서두(序頭)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양과 염소는 낮에 풀을 뜯을 때는 무리에 구분 없이 섞여 지낸다. 그러나 특히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기후인 팔레스틴에서는 잠을 잘 때에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하였다.

왜냐하면 양들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소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도록 하였다. 또 낮에도 서로 구분되기는 하는데 왜냐하면 팔레스틴 염소들은 대부분 검은 계통인데 반해 양들은 흰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성격이 판이(判異)하게 다른 짐승인지라 저희들끼리 무리를 이룬다.

여기서는 목자가 직접 무리를 구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앞에서 '모든 민족'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보아 양과 염소를 심판의 대상이 되는 모든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

33절 카이 스테세이 타 멘 프로바타 에크 덱시온 아우투 타 데 에리피아 엑스 유오뉘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 양의 무리는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양분함으로써 심판의 명료성(明瞭性)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제3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녕 최후 심판의 순간에는 옳거나 틀린 것만 있을 뿐이다. 또 여기서는 오른편에는 양을 세우고 복 받은 자로 칭찬하고 왼편에 선 염소를 저주받은 자로 경멸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오른편'을 의로운 자리로 표현하고 '왼편'을 저주받은 자리, 곧 불의한 자리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묘사는 구약시대 때부터 '오른편'을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해 온 사실에서 비롯된다(15:6 ; 왕상 2:19 ; 30:12 ;45:4). 그리고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힘의 상실로서 이해되어 왔(3:15 ; 삼하 20:9:10 ; 10:2). 따라서 심판의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이 되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영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의 이 같은 구분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1) 염소보다 더 가치 있고 값비싼 짐승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양이 흰색인 반면 대부분 검은색으로 된 염소를 대비시켜 선과 악, 생명과 멸망을 상정적으로 대비하고자 했을 것이다. (3) 하나님을 목자로 보고 그의 백성들을 양 떼로 보는 당시의 유목민적 사고를 빌어왔기 때문인 것이다(18:10-14 ; 34:11, 12 ; 6:34 ; 눅 15:3-4 ; 10:1-21 ; 13:20). (3) 염소는 풀밭을 못쓰게 만들고 나무를 상하게 하여 초목을 죽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염소를 왼편에 세워 불의한 짐승으로 구분했을 것이다.

34절 토테 에레이 호 바실류스 토이스 에크 덱시온 아우투 듀테 호이 율로게메노이 투 파트로스 무 클레로노메사테 텐 헤토이마스메넨 휘민 바실레이안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25:34

임금 - 여기서 심판의 주체가 임금으로 바뀐다. 31절에서 심판의 주체가 '인자'(인자)였는데 여기서는 '임금'으로 달리 표현함으로써 인자를 임금과 동일시하고 있.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로서 뿐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묘사하는데, 그러한 비유는 2:2 ; 21:5 ; 27:11, 29, 37, 42에서도 나타난다. 여하튼 이 같은 칭호는 보좌에 앉으신 인자의 통치권(통치권)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진다. 즉 모든 민족의 통치권과 심판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롬 14:9 ; 19:16).

내 아버지께 -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아버지와 연관시키고 있다(10:32, 33 ; 11:25-27 ; 15:13 ; 16:17, 27:18:10 ;20:23 ; 26:29,5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행자(대행자) 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의 궁극적 시여자(시여자)는 아들을 통해 전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복 받을 자들이여 - 오른편에 선별된 사람들을 향한 호칭이다. 여기서 특별히 '복 받을 자들'(호이 율로게메노이)은 완료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이는 한번 시여 된 축복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결국 현세와 내세를 초월한 축복의 영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말은 41절의 '저주를 받은 자들아'와 대비되는 문구로서 단순히 축복의 말씀 이상의 실제적인 복의 전달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나와라 - 이 단어 역시 41절의 '나를 떠나라'와 대조되는 말로서 '나아온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친밀)한 만남을 의미한다. 같은 형식의 비유인 열 처녀 비유에서 '잔치에 들어가고'라는 구절과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라는 구절(10, 21, 23)에서도 표현한 바와 같이 구원은 주님과의 만남이고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요 12:26).

창세로부터(아포 카타보레스 코스무). - '세상을 창조한 이래로'라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Bengel)는 `... 로부터'라는 뜻인 '아포''그 이전부터'(*, 프로)라는 뜻으로 이해함으로써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과 일치시키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창세 전부터 미리 선택해 두시고 그 유업을 상속케 하셨다는 것이다(17:24; 1:4; 벧전 1:20).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오 한 예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과 성실성을 대변해 준다.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이 구절은 앞에서 '복 받을 자'라는 말에서 나온 ''의 내용을 보여 주고 있다. '예비된 나라'는 하늘나라를 말한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계획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비된'(헤토이마스메넨)은 완료 분사 형태를 취함으로 해서 그 동작이 이미 오래전부터 성취된 상태에 있었음 보여 준다.

즉 하늘나라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의 입국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11). 한편 '상속하라'(클레로노사테)는 말의 원어는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지체치 말고 즉시 네 분깃을 얻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받으라'라고 명령하지 않고 나라를 '상속하라'라고 명령한 것은, 그 피 명령자에게 당연히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상속이라는 말은 본래 자기와 상관없는 어떤 것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자기에게 주어져있는 권리(권리)로서 하늘나라를 물려받는 것을 뜻한다. 실로 아무도 창세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이 상속 물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즉 영원한 자기 소유인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창세 때부터 준비된 하늘나라를 영원한 소유로서 상속받게 된다. 여하튼 '예비된 나라'라는 구절은 41절의 '예비된 불'과 대칭적으로 앞에 나온다. 이것은 다른 비유들과 같이 대칭 구조속에서 반복 어투를 사용하는 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35절 에페이나사 가르 카이 에도카테 모이 파게인 에핍세사 카이 에포티사테 메 크세노스 에멘 카이 쉬네가게테 메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절 귐노스 카이 페리에발레테 메 에스데네사 카이 에페스켑사스데 메 엔 퓔라케 에멘 카이 엘데테 프로스 메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25:35,36

이 두절은 복 받은 자들이 하늘나라 상속권을 소유한 까닭을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이 환영을 받고 유업을 상속하도록 초대받은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왕의 형제들을 섬겼기 때문이다(58:7). 그런데 이 섬김의 내면을 살펴보면 그 섬김이 곧 그들 의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2:20-26). 즉 이는 순결한 믿음, 참된 신앙만이 표출할 수 있는 선행인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선행을 상기시키는 왕의 대답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의인들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37-39). 정녕 의인들은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요청과 기대에 따라 능동적으로 그 일을 수행했던 것이다(엡 2:10). 여기서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선행 중 35절에 제시된 세 종류는 율법적 의무 조항에 근거한 선행이며(19:1,2 ; 23:9 ; 10:18 ; 14). 36에 제시된 세 종류의 선행은 율법의 의무 조항 이상의 자원적이고 헌신적인 섬김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 . 주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고 많은 질병과 억울한 누명과 과중한 채무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웠다. 사실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옥에 갇힌 자 방문'은 복음 시대 기간 중에 복음과 그리스도로 인해 공적인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은연중에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고난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고난 받고 굶주리며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행()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6).

37절 토테 아포크리데손타이 아우토 호이 디카이오이 레곤테스 퀴리에 포테 세 에이도멘 페이논타 카이 에드렙사멘 에 딥손타 카이 에포티사멘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절 포테 데 세 에이도멘 크세논 카이 쉬네가고멘 에 귐논 카이 페리에발로멘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절 포테 데 세 에이도멘 아스데네 에 엔 퓔라케 카이 엘도멘 프로스 세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25:37-39

의인들(호이 디카이오이) - 여기서 '복 받은 자들''의인'이라는 호칭으로 바뀐다. 즉 마치 '인자''임금'으로 호칭이 바뀌어 그 인격에 대해 더욱더 구체성을 띠게 하듯이,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푼 자들을 가리켜 의인으로 선언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여기서 '의인들'이라 함은 그 생활에 있어서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므로써 결국 이 땅에서의 온갖 자기만족의 유혹과 고초를 이겨내고 끝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 앞에 선 자를 가리킨다. 물론 이 '칭의'는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적이고 절대적 선언에 근거한 것일 뿐 사람들의 인격이 절대 순결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편 의인들의 대답은 앞서 임금이 조목조목 나열한 항목을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하면서 언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반문함으로써 지금껏 행해왔던 선행이 결코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되며 또한 커다란 상금을 바라고 선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의 최상의 겸손을 나타내 보였다. 이러한 자기 선행을 부인하는 모습은 외식하고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그 당시 위선적 종교인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여호와 경외의 가장 기본이 되는 형제 사랑을 도외시한 채 외식하며 겉치레적인 신앙생활에 몰두하던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 학자들을 여러 기회들을 통해 격렬하게 비판하셨다(23:1-36 ; 12:38-40 ; 눅 11:37-52 ; 20:45-47).

결국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과 마음가짐을 제시해 주며 당시의 비 실천적인 이론적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6:1-4에 나오는 바와 같이 남을 구제할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은밀하게 하라는 교훈을 묵묵히 암시하고 있다.

40절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바실류스 에레이 아우토이스 아멘 레고 휘민 에프 호손 에포이에사테 헤니 투톤 톤 아델폰 무 톤 엘라키스톤 에모이 에포이에사테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25:40

내 형제(아텔폰 무) - 여기서 형제(아델포스)는 일차적으로 임금의 형제 곧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12:47-50)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형제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32). 따라서 여기서의 형제는 광의적인 뜻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동참하는 고난 받는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35, 36).

지극히 작은 자 하나 - 이와 비슷한 문구가 10:42 ; 18:6, 10, 14에서 '소자 중의 하나'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18:5에는 '어린아이 하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매우 축소 지향적인 묘사이다. '작은 자''지극히'라는 단어로 더 축소하여 강조하며 '하나'라는 최소 단위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다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극한 대비를 이뤄 '가장 작은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가장 큰 자'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하나'라는 단어는 막연한 대상을 나타내는 부정사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具體的)인 어떤 한 사람을 말한.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천임을 암시한다. 실로 성도의 바른 신앙은 묵묵히 행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그 진수가 있.

내게 한 것이니라(에모이 에포이에사테) - 35, 36절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서 의인이 반문한 것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내놓고 있다. 기서 특별히 '내게'라는 뜻의 '에모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과 배려를 의미하는 여격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외받고 궁핍하며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과 강한 연대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성육신(Incarnation)하심으로써 이미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同參)하셨다(2:6-8). 또한 그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의 연약한 한계 아래 머무시면서 그 속에서 아픔과 고뇌를 맛 보시었다(8:17 ; 53:4 ; 63:9). 정녕 그분은 고난당하는 자의 표상이자, 그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는 그들의 친구였다(4:15). 따라서 그분은 자신 있게 고난 받는 자와 '하나'라 선언하실 수 있었으며 고난 받는 자의 위안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고난받는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22:34-40 ; 13:2).

41절 토테 에레이 카이 토이스 엑스 유오뉘몬 포류에스데 아프 에무 호이 카테라메노이 에이스 토 퓌르 토 아이오니온 토 헤토이마스메논 토 디아볼로 카이 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25:41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 이 구절은 34절의 '복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대칭되는 문구이다. 한편 7:23에는 본문과 비슷하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저주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분과 영영히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그런데 '저주를 받은 자들'이란 문구는 34절의 '복 받은 자들'이란 말에서 볼 수 있는 관사(호이)가 생략됨으로 하나의 독립적 문구라기보다 종속적 분사로 보아 '저주를 받아 나에게서 떠나가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Wycliffe). 이는 결국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심판 의지를 강조한 표현이 된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 이 구절은 34절의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와 대칭적으로 대비되는 문구이다. 즉 의로운 자들을 위해 그 나라를 창세 전부터 준비하였지만 마귀와 사자들을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된 것이 서로 다르다.

예비된 - 동사 헤토이마조(Homer 이래)는 헤토이모스(2092: 준비된)에서 유래했으며, '준비하다, 준비를 갖추다, 예비하고 있다'를 의미한다. 문법은 동사 분사 완료 수동태 목적격 중성 단수이다. 지옥의 불로 떨어질 자들은 창세전에 준비된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된다. 완료로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동태이기 때문에 지옥은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다. 이곳에 염소와 같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영영한 불'이 염소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라 원래는 마귀와 그 신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20:10). 실로 영영한 불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교만하고 타락한 삶을 살므로 얻어지는 것이다.

한편 '마귀'(디아볼로스)는 '중상자', '방자'(Slanderer)를 의미한다. 새 번역에서도 '악마'(the devil)로 번역한다(4:1 ; 눅 4:2 13:2 ; 4:27 ; 2:14 ; 딤후 2:26 ). 그런데 여기서의 '마귀'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주동자(主動者) 곧 어둠에 속한 세력의 주관자를 가리킨다. 리고 '사자'(앙겔로스)라는 말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messenger), '사절'(envoy), 또는 '천사'(angel), '보냄을 받은 사람'(one who is sent)을 뜻한다.

여기서는 '메신저'(messenger)로 보는 것이 옳으며 새 번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그의 사자'(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로 번역해야 옳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마귀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된다.

영영한 불(토퓌르 토 아이오니온) - 이 말은 영영히 꺼지지 않고 지속적인 고통을 제공하는 심판의 불(fire)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46절의 '영원한 형벌'과 같은 표현이다. 실로 이곳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된 장소라는 점에서 그 고통의 도는 최고치에 이를 것이다. 한편 ''이라는 묘사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지옥에 대한 개념이다(3:12 ; 5:22 ; 18:8 ; 1:7 ; 20:10-15).

42절 에페이나사 가르 카이 우크 에도카테 모이 파게인 에딥세사 카이 우크 에포티사테 메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절 크세노스 에멘 카이 우 쉬네가게테 메 귐노스 카이 우 페리에발레테 메 아스데네스 카이 엔 퓔라케 카이 우크 에페스캅사스데 메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25:42,43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의 정죄받은 이유를 35,36절의 문장 형식을 빌어 고발하고 있다. 특히 '아니하였고'()라는 부정어구를 5번에 걸쳐 후렴구로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심판 기준의 적극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다.

시 말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남에게 비록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실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다(19:19). 한편 예수께서 이 같은 강경한 메시지를 전하신 것은 적어도 말, 종말의 때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황폐(荒廢)해 질 것을(딤후 3;3) 익히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44절은 토테 아포크리데손타이 아우토 카이 아우토이 레곤테스 퀴리에 포테 세 에이도멘 페이논타 헤 딥손타 헤 크세논 에 귐논 에 아스데네 에 엔 퓔라케 카이 우 디에코네사멘 소이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25:44

이 구절 역시 37-39절의 경우처럼 판결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있다. 저주의 판결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다만 놀랄 뿐이다. 실로 그들은 양들이 자신의 선행을 잊어버리듯, 자신들의 악행(이웃에 대한 무정과 무관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Bengel).

한편 그들이 놀란 이유는 (1) 자기들의 기억으로는 주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를 돌보아 드리겠느냐는 사실 때문이다. (2) 심판의 임금으로 오신 주께서 굶주리고 나그네 되어 목말라하며 감옥에 갇힌 고난 받는 자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 (3) 그리고 무엇보다 양들이 마지막 날에 보답받기 위해 예수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닌 것처럼, 염소들은 마지막 날 보응(retribution) 받는 것을 멸시해서 형제들에게 냉담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필시 예수의 형제들에게 온정과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다.

45절 토테 아포크리데세타이 아우토이스 레곤 아멘 레고 휘민 에프 호손 우크 에포이에사테 헤니 투톤 톤 엘라키스톤 우데 에모이 에포이에사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25:45

이 구절은 40절과 대칭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40절과 구별되게 '내 형제 중에'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이웃에 무관심했던 염소에게 있어서 형제 우애를 들먹일 만큼의 여유가 없음을 묵시적으로 꾸짖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찮게 보이는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에게 대해 무신경한 자는 그들의 형제와 친구이신 예수를 무시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자인 것이다.

46절은 카이 아펠류손타이 후토이 에이스 콜라신 아이오니온 호이 데 디카이오이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는 구절이. 여기서 저주받은 자들의 벌과 의인들이 받은 보상을 영원한 생명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먼저 영벌(콜라신 아이오니온)은 영원한 징(punishment)을 뜻한다. 여기서 '콜라시스'는 원래 '잘라내다'의 뜻의 '콜라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죄인의 교화와 훈육을 위한 목적으로 내려진 징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근거로 해서 혹자는 본문의 '영벌'이 궁극적으로는 염소들을 구원키 위해 내려진 교정적 차원에서의 벌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약 어느 곳에서도 지옥에 처한 자의 회개나 교회가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최후 심판이라는 관점에서의 ''을 이야기할 때 이 '콜라시스'보다는 공의에 입각한 엄격한 보복이라는 뜻의 '티모리아가 더 적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콜라시스'는 본문에서 목적적 차원에서의 해석보다는 집행적 차원에서의 해석을 통해 '지독한 고통'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10:29). 특별히 '콜라시스'가 영원성을 강조한 '아이오니온'과 결합됨으로 형벌의 영원성, 곧 최후 심판으로서의 형벌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18:8 ; 살후 1:9 ; 1:13).

이와 더불어 의인에게 약속된 영생(조엔 아이오니온)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물론 이 생명은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을 뜻하기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향유하게 되는 지복(至福)에 달한 생명으로서(trench),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이 현세에서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부활한 생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살전 4:14-17).

'형벌''생명'을 각각 수식하는 형용사 '아이오니온'은 시작 또는 종결이 없거나 아니면 양자 모두가 없는 시간 개념으로서, 묵시 문학이나 종말론과 연관된 구분들에서는 항상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재림한 이후에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것이고,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영원한 구별은 바로 이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끊임없는 긴장(緊張)과 그 나라와 주의 재림에 대한 성실한 준비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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