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27장 헬라어 강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의미(마 27:45-50)

르호봇 2021. 3. 2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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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7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바로 나를 위한 외침입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외치셨습니다. 이렇게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 구원받지 못합니다. 원죄에서 회복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나를 위해서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절규하실 때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여야만이 선택받은 내가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작은 가시의 찔림에도 아파하는데 주님은 대 못에 박히시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고통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의미(마 27:45-50)

 

45절은 아포 데 헤크테스 호라스 스코토스 에게네토 에피 파산 텐 겐 헤오스 호라스 엔나테스입니다.

마 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27:45

제 육 시로부터... 제 구 시까지 - 본문의 '제6시', '제9시'는 유대인의 시간 단위로 오늘날의 시간과 6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제6시'는 오늘날의 정오(12), '제9시'는 오늘날의 오후 3시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오전 9경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15:25) 오후 3 시경까지 근 6시간여 동안 찢어지는 듯한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어둠보다 더 짙은 영적, 정신적 고뇌(46)를 맛보시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당신의 죽음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계셨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 제6시에서 제9시까지 약 3시간 동안의 '어두움'은 마치 애굽에서 첫 유월절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재앙 시에 나타났던 3일 동안의 어두움을 상기시킨다(10:21-23). 따라서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은 심판 또는 비극을 알리는 표적이었음이 분명하다(8:9, 10).

한편 이때의 어두움이 '온 땅에' 임했다고 하는데 그 '온 땅'이란 의미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 혹자는(D.A.Carson) '온 땅에'를 헬라어 '에피 파산 텐 겐'이 온 지구(the earth) 전체를 뜻하기보다, 국한된 지역으로서의 모든 ''(the land)을 의미한다고 보아 '유대 지경 전체'라는 제한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이 같은 견해는 매우 타당한 것인데, 그 이유는 당시 유대 땅에 임한 어두움은 예수의 죽음과 유대 민족에게만 관계된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과 연관을 지닌 출 10:22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던 하나님의 심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데,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었다'

결국 이 기록은 본문의 ''을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는데 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이때의 어두움에 대하여 사막의 열풍에 의한 천기 조건의 이상으로 발생한 우연 발생적이고도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단지 '일식' 현상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날은 음력 보름이 다 된 시간이었으므로 천문학적 상식으로 월식이 될 가능성은 있으나 일식(日蝕)은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법칙 상의 현상이라기보다는 찬송가의 시구처럼 영혼의 신령한 태양 되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물질세계의 태양이 밝은 빛을 잃어서(눅 23:44) 캄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들도 도출해낼 수 있다. (1)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준엄함(26:24; 5:30). (2) 인류의 무거운 죄짐을 대신 지신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지를 보임. (3) 전우주적 통치자의 고뇌에 찬 죽음에 대한 자연계의 순(8:22) 등의 뜻으로 볼 수 있다.

46절은 페리 데 텐 엔나텐 호란 아네보에센 호 이에수스 포네 메갈레 레곤 엘리 엘리 라마 사바크다니 투트 에스틴 데에 무 데에 무 히나티 메 엥카텔리페스입니다.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27:46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 마치 기름이 동난 등불이 마지막 자기 심지를 태우며 희뿌연 연기와 불꽃을 일으키듯, 예수께서는 더 이상 항거할 수 없는 죽음에의 기운과 영적인 고독 앞에서 마지막 기운을 돋우어 성부 하나님께 절규(絶叫)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어와 아람어 음역에 따른 시 22:1의 인용으로서 십자가상의 가상 칠언(架上七言)중에 네 번째말씀에 해당하며(19:28-30), 마태와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엘리'를 그대로 음역하여 '엘리 '엘레이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마가는 이것을 '나의 하나님'(엘로히)라는 아람어 음역에 근거하여 '엘로이'로 표기하고 있다(15:34). 그다음에 이어지는 '라마 사박다니'는 분명 순수 아람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경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에는 '엘리''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능력'(my power) 으로(헤 뒤스나미무; 이는 히브리어 ,'헬리'의 뜻임) 번역하여('나의 능력이여 나의 능력이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치 가현설(Docetism)에 입각한 듯한 하소연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베드로 복음서에 따르면 인간 예수만이 고난당하고 죽은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라는 말이 쉽게 사람들에게 '리야'를 부르는 듯이 잘못 들려질 수 있는 것 같이, '엘리''헬리'로 잘못 들려졌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다윗이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 22:1의 말씀이 당신의 찢어지는 듯한 영적 절망감을 예언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인정하시고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가장 필요한 시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데 대한 절대 고독감과 심각한 위기적 심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가 당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悽絶)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절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1)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점(고후:5), (2)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점이(2:6-8), (3) 죄를 향한 하나님의 중오와 보응이 얼마나 엄격하고도 무서운 것인가라는 점,

(4) 성부로서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지만(눅23:46) 죄악을 징벌하시는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은 예수가 죄인의 자리에서 영, 육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이상 그를, 철저히 포기하고 그에게 무 간섭하셔야 했다는 점, (5) 하나님께 버림받은 최악의 상황을 맞아 대속적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인간 구원을 소망하신 예수의 지극한 사랑(3:16)등이다.

나의 하나님(데무) -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만 나타나는 표현으로서, 비록 '하나님'이 예수 자신에게서 떠나가셨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으시고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仁性)으로 인류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는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그 인성은 신성(神性)의 절대적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 호소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Lenski).

어찌하여(히나티) - 직역하면 '어떤 목적을 두시고'가 된다. 즉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목적에 대해서 묻고 계신 것이다. 이는 분명 신성으로서의 예수가 지적(知的) 결함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와의 직임 상의 차이를 보여 주는 동시에 성부께 대한 성자의 절대 겸손과 완전한 순종의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24:36).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버려두셨다는 뜻을 내포하는(Hend-riksen)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류 죄악을 위해 마련해 두''(진노와 심판을 그에게 마시우게 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실로 예수의 이 같은 절규에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충만한 대가를 자신의 온몸으로 친히 치르고 계신 예수의 뜨거운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말씀이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최후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밖에도 여섯 마디의 말씀을 더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복음서를 통한 가상 칠언을 정리하면 (1) '저희를 사하여 주소서'(눅 23:34) (2) '나와 함께 낙원 있으리라'(눅23:43) (3) '저가 아들이니이다'(19:26) (4) 본문 (5) 본문 '내가 목마르다' (6) '다 이루었다'(19:28) (7)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등이다.

47절은 티네스 데 톤 에케이 헤스토톤 아쿠산테스 엘레곤 호티 헬리안 포네이 후토스입니다.

마 27: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27: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 - 이를 로마 군인들 중 몇몇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으나(Zigabenus, Euthym), 적어도 구약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Theophy-lact).

그리고 좀더 깊이 생각하'엘리'의 정차한 발음을 듣지 못했다는 점에서 헬라와 유대인일 가능성도 높다.

엘리야를 부른다 - 엘리야는 녹지 않고 살아서 승진한 의인으로서(왕하 2:9-12) 대인들의 전통적 종말관에 따르면 그가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예수께서 '엘리엘리...' 하는 절박한 절규를 듣고 엘리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즉 그를은 '엘'라는 말을 '엘리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엘리야후'로 잘못 듣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70인 역은 이를 '엘루우'로 기록함). 40절에서 예수에게 조롱하여 말하기를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했었다. 이렇게 말하는 저들의 심정은 신성 모독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들의 마음속에 비록 그 대상이 눈앞의 예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애타게 고대해왔던 메시아 대망(待望)담겨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저들의 메시아 대망은 예수의 말씀 '엘리 엘...'를 듣는 순간 곧 오해를 하여 엘리야가 와서 도와주나 보자고 하게 하였다. 마 그들은 엘리아가 와서 예수를 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여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 자신보다는 십자가 아래서 예수를 조롱하고 있는 자기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48절은 카이 유데오스 드라몬 헤이스 엑스 아우톤 카이 라본 스퐁곤 플레사스 테 옥수스 카이 페리데이스 칼라모 에포티젠 아우톤입니다.

마 27: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27:48

한 사람이....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 아마 이 일이 발생한 동기는 예수께서 '목마르다'(19:28)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이 같은 행동은 예수에 대한 동정심에 근거한 것이기보다 예수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延長)켜 과연 엘리야가 그를 구해주는지를 보려고 한 악한 의도(47, 49)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해융''신 포도주'를 머금어 그것을 갈대에 꿰어 예수께 마시게 한 행동은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구약 예언(69:21)을 다시 한번(34절) 더 성취시킨 사건이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한편 여기서 '해융'이란 일종의 스펀지(sponge)같이 다량의 액체를 빨아들이는 도구로서 바다생물의 뼈대 같은 것에서 추출한다. 그리고 '신포도초'(옥소스)란 원래 '식초'란 뜻으로서 정확히는 '포스카'(posca), 즉 신 포도주와 계란, 물을 섞어 만든 로마 군인들의 음료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예수께 최후의 음료를 제공한 것은 로마 군병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49절은 호이 데 로이포이 엘레곤 아페스 이도멘 에이 엘케타이 헬리아스 소손 아우톤입니다.

마 27: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27: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만 두어라 - 여기 '가만 두어라'는 말은 '지금 혼자 내버려 두라', '조용히 물러서라' 등의 말일 것이다. 이는 예수를 향한 더욱더 조롱적인 어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에 의하면 이 말을 한자는 예수에게 방금 신 포도주를 준 로마 군병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임에 비해 마가복음에서는 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한 후 자신의 행동을 금하는 군중들에게 선 포도주를 예수께 먹인 바로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15:36).

이에 비해 요한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발설되었는지, 그리고 조롱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19:28,29). 따라서 어느 것이 정확한 보고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예수의 절규하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군중들은 떠들고 그 와중에 로마 군병들은 심정적으로 합세(숨막히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나 보자 - 적어도 유대인들은 예수가 지금 도저히 희생 불가능한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이라고 자신해 해며 이 같은 조롱을 거듭하고 있다. 한편 어떤 사본에서(시내, 바티칸 등) 본절과 다음절 사이에 요 19:34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는 이야기를 추가시키고 있다.

대신 요한복음과는 반대로 '과 피'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물과 피를 통하여 상징되는 성례전과의 절차상의 일치를 위함인듯하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Robertson) 이 이야기가 후대의 필사가에 의해 기계적이고도 무모하게 베껴 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위의 몇몇 사본은 역사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삽입구라 본다.

50절은 호 데 이에수스 팔린 크락사스 포네 메갈레 아페켄 토 프뉴마입니다.

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다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로 목을 축이신 후 아마 '가상 칠언'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제6, 7번째 말씀(눅 23:46; 요 19:30)을 외치신 것 같다.

특히 예수께서 최후의 순간에 '크게' 외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당신에게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발적(自發的)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준 결과에 의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지만 스스로 포기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10:17, 18). 영혼이 떠나시다(아페켄 토 프뉴마).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의를 설명하지 않고 오직 그의 죽음의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한편 예수의 죽음을 묘사할 때 '생명, 목숨'을 뜻하는 '프쉬케'의 떠남으로 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을 뜻하는 '프뉴마'의 떠남으로 표기한 것은 물론 당신의 죽음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영, 육의 분리를 뜻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주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특히 '영혼이 떠나가시다'(he gave up his spirit)란 담담한 표현은 정해진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강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었다. 진실로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여 깊은 심연(深淵, gulf)으로 떨어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잔인한 조롱을 받고 숨지시던 바로 그 순간이 그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ransom for many)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때이다(20:28). 한편 본문의 이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분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에, 원하시던 때에, 원하시는 대로 떠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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