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장 환상 설교말씀은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의 환상입니다. 하나님은 네 생물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의 환상(겔 1:1-13)
[1] 제30년 4월 5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제30년이란 말에 여러 가지 논란이 있기도 하나 대개로 에스겔의 나이로 봄이 타당하다. “30세 이상으로 계수하였으니”(대상 23:3) 민 8:24에는 25세로 하였고 그 다음은 20세로도 하였다.
레위인의 수에 따라 변경한 것 같다. 에스겔이 30세 되는 해 4월 5일에 부름을 그발강 가에게 받았다.
저들이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이런 기록을 보아 저들이 때로 강변에 모이는 일이 있은 것 같다.
바울이 전도여행에 있어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행 16:13) 이를 보아 외지에 나가 저들은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하곤 한 것을 보아 그발강 가에도 그런 뜻으로 모인 듯하다.
어떠한 양상이었던지 ‘사로잡힌 자 중’ 이런 말이 분명하다. 포로에 있을 때에 그발강 가에서 기도하던 중에 부름을 받은 것으로 볼 것이다.
부름 받을 때의 양상을 설명하기를 하늘이 열리며, 주님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하늘이 열리고’(마 3:16)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도 같은 현상이었다.(행7:56)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양상을 기록에 남기는데 이 일을 이렇게 문자로 표현한다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을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8:3) 이를 보아 에스겔이 본 이상이 앞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 당시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표현한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출 24:10)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난 일(사 6:1) 다니엘도 이상을 본바 있다.(단 8:1) 이상을 본 사실을 표현해 본 것이다.
모든 선지는 이상을 본 것이다.
(사 1:1)(암 1:1)(옵 1:1)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 육으로 이런 양상을 가지려 하는 데 문제가 있곤 한다.
영으로 하늘이 열림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모든 선지들이 이상을 본 것같이 신앙은 이상을 보면서 살게 된다.
선지로서는 그 부름을 받는 그 해 그 달 그 날이 있으니 에스겔은 30년 4월 5일이다.
에스겔은 그발강 가에서 포로로 있을 때이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롬 5:8) 죄를 바로 인식하고 속죄함을 믿는 성도는 골방에 들어가면 보혜사 주님의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심이 보여진다.
죄를 깨닫고 그 앞에 가는 자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요 일2:1) 제사장 에스겔에게 이렇게 이상을 보여주신 바이거니와 속죄함을 입어 구원받은 내게는 보혜사가 계심을 보게 된다.
[2] ―[3]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5년 그 달 5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강 가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의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왕하 24:15) 왕이 포로로 있은지 5년 그 달 5일이라 한 바이다.
에스겔은 25세에 포로로 되었던 것이 나타난다. 자신이 사로잡혔다는 말은 전절에 있고 왕이 포로로 있었다는 말이 들린다.
모든 인간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 8:46)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9)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 3:2) 지금 죄인의 처지를 말하여 줌이다.
그발강 가에서 죄를 인식한다. 사마리아 여자의 뱃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이 그발은 이를 상징한다.
그때에 부시의 아들 에스겔이라고, 부시는 수치를 뜻한다.
수치스러운 자의 아들이라고 에스겔은 선지의 직무를 감당할 때마다 그 수치스러운 양상을 친히 보인 바이다.(12:6, 24:27) 그 자신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이란 뜻이라 수치에서 영광을 받는다.
영광을 깨닫는다 로 받을 수 있다.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였다.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슥 7:12) 하나님께서는 자고이래 말씀으로 일하신다.
모든 선지 그의 사람들은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달하는 일이 선지의 일이다.
오늘도 그렇다. 말씀을 주시는 여호와의 능력 그 권능이 이 선지의 위에 있었다고 이 권능은 여호와 손이라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사 8:11) 에스겔에게는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3:14, 22, 8:1, 33:22, 37:1, 40:1)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모든 역군들에게 한결같이 임하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 일은 없는 것이다.
이 양상에서 에스겔은 1) 하늘이 열리다.
2) 이상을 보았다.
3) 말씀이 특별히 임했다.
4) 권능이 그 위에 있었다 역군의 받는 일들이다.
[4]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보인 이상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북방에서 바람, 구름, 불, 단쇠 등이 보임을 말한다.
여기 북방을 하나님 계신 곳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고 북쪽인 바벨론의 침략으로 보기도 한다.
폭풍 구름 불은 다 하나님의 진노를 표함이라 북쪽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거 침략을 말한다 로 받음이 보편적인 듯하다.
하나님의 진노로 표현되었다.(출 19:9, 16, 시 18:8, 10-13 합 3:11, 14)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여기 북이 없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말씀하심이니 그가 북에 계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
예레미야가 본 끓는 가마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렘1 :13) 북에서부터 적이 온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옴이니라”(렘 6:1) 렘 10:22, 3:12, 4:15, 6:22 등에 거의 같은 뜻으로 북방에서의 침략으로 받게 된다.
바람의 글자는 기운으로도 영으로도 번역되는 말이라 하나님의 영으로 받는데 거기 심판과 자비가 따른다고 본다.
영으로 심판하시거니와 영의 감화로 그를 지켜 주시기도 한다.
북방을 어떻게 받든지 바람은 심판을 또 영의 감화감동을 상징함은 사실이라 오순절에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행 2:2) 이렇게 바람은 영으로 보아 심판을 상징하며 또 은혜를 상징한다.
영의 감화를 말함이다.
영의 강한 역사가 일선상에 미칠 때에 강한 바람에 날려 가는 것 같은 힘을 얻어 가는 곳마다 간증하며 바람이 그 신상에 닥칠 때에 자기가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이 되어지는 일을 교인 가운데 때로 본다.
상상외로 힘을 얻어 날아다니다시피 하면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며 온전히 영의 지배하에 살고 있음을 본다.
이 바람이 구름을 몰고 왔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고전 10:1) 이를 보면 그의 보호아래 있음이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출 13:21)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고”(민 9:15)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민 9:16)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민 11:25)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민 14:14) 광야 행진에 구름은 저들을 보호하였고 인도자가 되었다.
덮는다는 보호를 지로함이다.
이 구름 속에 불이 섞여 있다.
불은 심판을 상징함이라 바람 구름 다 영의 상징으로 본다면 불도 역시 영의 상징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신 4:24 히 12:29) 이 불은 심판을 상징하니 가연성을 다 태움이다.
실로 내 속에서 탈것을 다 태워 버려야 할 것이다.
가연성의 것이 타지 아니하고 남아있을 때에 성결히 살지를 못한다.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사 6:6) 가연의 것은 탈대로 다 타야 한다.
이렇게 바람 구름 불이 지난 다음에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단쇠를 중국어 번역에는 정금이라 한 바이다.
다른 번역 등에는 빛나는 금속이라 하였는데 “금은의 혼합물로 된 눈 같고” 라고 번역되는 말이라 이상과 같은 연단을 경과한 다음에 정금이 나온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계 3:18) 등을 보아서 금은 불 속에서 연단됨을 알 만하다.
[5] ―[6]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 그 모양은 사람의 형상이라 요한도 이 광경을 본 바 있다.
“보좌 가운데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계 4:6) 사람의 모양 같더라고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1:26) 에스겔이나 요한이나 자기 본 이상을 자기 필재로 가장 바로 표현해 본 것이다.
그러나 그 계시 그 이상을 인간의 그 표현법으로 언어요 문자요 그림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
영계의 일을 인간의 그 무엇으로 어떻게 바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 고로 이런 계시의 실제는 같이 그 영에 호흡할 때에 비로서 아 이렇구나 같은 영으로 탄사를 발하게 되어 합일이 될 것이다.
한 폭의 그림으로 한 폭의 문자로 한 화술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바람 구름 불의 작용으로 정금이 나온 것인데 그 정금 같이 단련의 결정이 된 그것은 산 것이라는 말에 중점을 받아 만족하다.
이미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다(엡 2:1)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골 2:13)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25) 이렇게 죽은 자들이다.
이런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살았다.
생물된 것을 지로함이다.
믿는다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았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이 죽었던 자들에게 바람 은혜의 덮음, 구름의 역사, 불의 성결케 한 역사로 단쇠 같은 성결해진 산 생물이 나타나 보였다고 받을 것이다.
이 생물이 넷으로 표현되니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사 11:12)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엘람에 이르게 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리니”(렘 49:36)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계 7:1)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단 7:2) “사방을 향하여”(단 8:8)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단 11:4)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37:9)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같이 흩어지게”(슥 2:6) 이 사방이란 말은 온 땅 끝까지 “땅의 모든 끝이”(시 22:27)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시 98:3)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어린양의 죽임을 당하였음을 인하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계 5:9) 각 족속 각 방언 각 백성 각 나라를 말함이라 사방이란 온 땅을 말함이다.
구원의 범위를 말함이라 할 것이다.
네 생물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땅 사방 땅 끝 온 땅 위에 미침을 말하니 오늘 십자가의 기호가 “내가 열방을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호를 세울 것이라”(사 49:22)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사 11:12) 이 기호는 십자가의 기호 주님의 강생한 연대가 오늘 높이 기호로 세워져 다 보게 하신다.
여기 또 사람의 형상이라 함이 중요한 말이니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바이다.
모든 우주의 삼라만상이 다 그의 창조하신 바이다.
그 창조하신 중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어느 모로나 하나님의 속성을 만물 가운데 드러내는 존재가 사람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절정의 구원의 역사가 성취됨이라 바람 구름 불 단쇠의 작용이 여기서 절정을 이루었다 할 것이다.
그러니 에스겔이 이상 가운데 본 것이 사람의 형상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이 보인 것이다.
이 사람의 형상인데 네 얼굴 또 네 날개가 있더라고, 사람의 형상이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바이다.
범죄로 죽었던 것을 다시 살리심이라 산 사람 생물로 산 사람은 그 생활이 사면으로 나타날 것이다.
날개는 신속히 움직임을 지칭한다 할 것이다.
“각기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으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형상이 있으니”(10:21)
[7]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같이 빛나며
다리는 곧고 직선을 말한다.
곡선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는 직선으로 가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 패역한 세대”(행 2:40) 구부러진 세대를 말함이다.
곧음은 직선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나를 찾으신다.
찾으실 때에는 직선으로 예 대답하고 나대로 그 앞에 나아가는 일이 곧은 다리의 표상이다.
구부러지게 가인같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의 물음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창 4:9) 이는 곡선의 대답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이 다윗이 직선으로 나간 것이다.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으며 송아지 발바닥은 제물의 기준을 말할 때에 쪽발이 제물의 기준인데 이는 분별력을 지칭함이라 받을 것이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 1:5) 분별의 지식 하에서 덕도 빛이 나는 것이다.
여러 모로 사이비 신앙 운동도 많은 바인데 분별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또 마광한 주석 같다함은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고”(계 1:15) 이는 적을 짓밟음을 지로한다.
생물의 다리 발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다시금 알아야 될 것은 이 하늘의 이상을 인간의 용어로 말한다, 표현한다 함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필법으로 이런 표현 범위밖에 다른 길을 얻지 못하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8]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이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네 얼굴 가운데 하나는 독수리라 하였으니 그 날개는 독수리 날개됨에 틀림없음이다.
하나님께서 선민을 어떻게 하셨는가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그 날개의 힘을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사 40:31)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 17:8)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시 63:7) “저가 너를 그 짓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시 91:4)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 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10:5)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났더라”(10:8) 이 날개는 인위적 어떤 것을 지양하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숨겨주심 등을 나타낸다 할 것이요 그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 같다고 한 바이다.
이런 표현은 인간의 표현으로 보여진 것을 가장 바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하시는 그 능력이오 그 보호를 다 표현한다고는 못할 것이다.
날개 아래 사람의 손이 있음이 여기 보이심이다.
날개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현함이라 할 때에 사람의 인위적 본분은 그 다음으로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또 마땅히 사람의 할 본분은 사람이 할 것이다.
내 할 일은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다 하시는데 라는 생각은 안된 일이다.
양상은 아니다.
손은 일하는 손이라 할 본분을 피나게 감당할 것이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행 20:34)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는 이러하니 그 얼굴이 말하여 주는 날개가 뜻하는 바를 읽을 수 있어 만족할 것이다.
[9] ―[11]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1:17) 곧게 행한다는 말이다.
“그 얼굴의 형상은 내가 그발강 가에서 보던 얼굴이며 그 모양과 몸둥이도 그러하며 각기 곧게 앞으로 행하더라”(10:22) 이 네 생물의 양상은 계시록에 같이 묘사되었다.“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계 4:7) 다 같이 보여진 이상을 묘사함에 상통함이 보인다.
이렇게 보여짐도 수록되어 있다.
“그룹들은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10:14) 여기 한 얼굴을 그룹의 얼굴이라 함이 소의 얼굴이라 함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날개에 대한 묘사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고”(1:23)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산 6:2) 네 생물이라고, 이미 5절에 표현된 바이다.
생물의 모양이 사람의 형상이라 한 바인데 그 얼굴 넷이 여기 다시 묘사된다.
넷의 얼굴 중 앞이 사람의 얼굴이라고, 사람의 얼굴이 빛났다는 묘사가 이미 5-7절에 있는 바이다.
이런 생물이 사람의 형상이라 함도 얼른 잘 그려 낼 수는 없다.
이제 거기 네 얼굴을 다시 설명한 말에 사람의 얼굴이 전면에 있다.
이 생물자체가 사람의 형상이었으니 사람의 얼굴이 그 전면임은 의당 있을 일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바인데 사람의 사람됨을 잃어버리어 사람으로 오신 주님께서 다시 찾아주신 바이기에 다시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생물의 모양이 사람이거니와 그 얼굴 전면이 사람의 얼굴이라 사람은 바른 사람되어 만족하다.
사람 이하로 떨어졌던 사람이 사람되어짐이다.
사람 이상으로 되려는 것은 망상이다.
은혜받았다 하여 사람됨을 잊어버리고 집을 등지는 일, 남의 처자가 되어 남의 어미가 되어 책임을 더 잘하여야 할 터인데 이를 저버리는 일은 바로 믿는 일이 아니다.
잘못된 일이다 주님은 어려서부터 인자의 도리를 다하심이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 2:51) 임종에 있어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 요한에게 맡기셨다.
우편의 얼굴은 사자의 얼굴이라고 사람의 형상의 사자 얼굴은 “유다 지파의 사자”(계 5:5) 승리의 표이다.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사람이면서 죄에 대하여는 사자같이 강하다 사람에 대하여도 그런 것이다.
또 소의 얼굴이라 그렇게 희생적이다.
부지런히 일함을, 봉사함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5) 소가 이 상징이 된다.
독수리의 얼굴은 뒷면에 있다.
숨은 초연한 능력을 나타낸다.
독수리 같은 힘으로 날개치며 오른다(사 40:31) 이런 속성을 은밀한 데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는 데서 나타날 뿐이다(마 6:4, 6, 18) 이렇게 생물은 사람으로 사람되면서 죄와 사단은 사자의 힘으로 제거하고 소 모양으로 일하며 독수리 모양으로 힘있게 향상한다.
이렇게 하여 주 그리스도를 내 생활에 나타냄을 말함이라고 받을 것이다.
사 복음이 이를 또한 표함이기도 마태복음은 군왕으로 사자복음이오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으로 소복음이오 누가 복음은 사람됨을 묘사한 사람복음이오 요한 복음은 초연한 능력을 나타낸 독수리복음이라고도 한다.
실로 주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죄와 사단에게 대하여 사자같이, 섬기며 봉사함에는 소같이 희생의 제물이 되신 바요, 많은 교훈 많은 초연한 이적 기사 등으로 독수리의 초연함을 보이심이다.
이 네 얼굴이 주님의 생을 나타내심이라 그리스인으로서의 삶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이 네 얼굴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얼굴은 성도의 사면의 생활로 상징된 바이라 할 것이다.
날개는 서로 연하였는데 두 날개를 들어 펴서 서로 연하였다고, 날면서 연함이기도 하다.
두 날개는 몸을 가리웠다고, 이사야가 본 것은 여섯 날개인데 둘은 얼굴을 가리웠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웠고 두 날개로는 날았다고 하였다.(사 6장)
겸손과 향상을 표함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도 마찬가지니 들어 편 날개는 향상 상공 신속 전진함을 상징하며 몸을 가리움을 수치를 가리우는데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창 3:7) 수치는 주님을 입음으로 완전 해결이다.(롬 13:14)
[12]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1:20) 이렇게 네 생물이 네 얼굴을 각각 가지고 나타남은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가지는데 의의가 있음이니 각각 다른 얼굴로써 그를 표현함이라 이 생물의 움직임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롬 8:4) 본절에는 신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네 생물은 영으로 움직임이고 또 단독으로 동하지 않고 같이 동한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을 말함이라 할 것이다.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롬 12:4) 여러 가지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일제히 앞으로 한결같기 완전히 하나로 되어짐을 말한다.
[13]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같이 빠르더라
숯불과 횃불이 그 가운데 왕래함이 보인다.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4) “핀 숯을 손에 가지고”(사 6:6)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삼하 22:9) 숯불은 소멸하는 작용 또 열을 가하는 작용 또 그 불에서 힘을 내는 작용 등을 들 수 있음이다.
숯은 한 덩이는 얼른 스러지나 많이 일수록 더 큰 힘을 낸다.
이모든 생물들을 성결케 하는 불이라 할 것이다.
이사야를 깨끗케 한 바이다.
큰불로 철장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런 힘을 거기서 얻는다.
한 사람의 불이 붙어 다 불이 붙을 때에 그 힘 그 능력은 대단하다.
또 사르는 힘도 대단하여 정결케 한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 횃불은 빛을 발하는 작용을 하며 또 깨끗하게 하는 작용을 겸한다.
“타는 횃불의 쪼갠 고기 사이로”(창 15:17) 기도온이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삿 7:16) 그 밖에도 횃불에 대한 말씀이 있거니와 숯불과 횃불이 생물 사이에 오르락내리락하여 모든 가연성의 것을 다 태웠을 것이요 또 빛이 발하며 불같은 하나님의 신의 내왕을 지로하기도 하니 모든 성도들은 이런 신과의 교통이 계속된다.
이런 타는 불 가운데서 비취는 빛 가운데서 신앙의 정수가 나온다.
그 빛이 번개같이 빛난다.
번개는 검은 구름이 덮이고 천지가 어두워지다가 뇌성과 같이 번개가 비췰 때에 그 빛의 위력이 있다.
실로 이 번개를 잡아 사람은 전기를 사용한다고 본다.
심판의 신호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신속함도 이에 비길 것이 없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마 24:27)
[이사야 원어성경 설교말씀] 셉나와 엘리아김의 신앙 비교(사 22:1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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