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신약 성경주석 갈라디아서 강해] 구약 율법의 목적(갈 3:19-29)

르호봇 2023. 1. 26. 16:04
반응형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 말씀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이다. 율법을 지켜서 사람을 의롭게 한다거나 구원을 줄 수 없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다.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이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

 

구약 율법의 목적(갈 3:19-29)

 

앞 단원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하여서 말하고 율법이 아니라 그 약속이 우리의 의인(義認)의 규범이 됨을 말한 다음 사도는 그들이 그가 너무 율법을 훼손시키고 율법을 의도와 그 방향에 대하여 강론을 하여 무슨 목적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는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바울이 앞의 사실만 강조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 즉 "구원을 위해 약속만으로 충분하다면 율법은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든가,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게 된다. 이를 예상하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Ⅰ.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라고 한다(19절). 율법도 약속을 폐기하고 약속에 의하여 제시된 길 말고 다른 의인(義認)의 길을 제시하려고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약속에 덧붙여진 것"으로 약속을 돕기 위하여 추가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범죄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정 되었지만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확실히 알게 하고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몹시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있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요"(롬 3:20). "율법에 가입(加入)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기 때문이다"(롬 5:20). 율법은 또한 그들로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그들의 욕망을 자제하게 함으로 본성적으로 격동되기 쉬운 지나친 욕망으로 파멸되지 않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율법은 동시에 죄가 소멸되는 참되고 유일한 길로 그들을 지시해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율법이 지시해 준 그곳에 도달해야 그들은 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이다. 율법에 제시된 희생과 정결의 제도는 바로 예수의 희생을 상징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사도는 율법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덧붙인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그는 바울이 앞서 제시한 것처럼 약속 가운데 언급된 근본 자손이다) 또는 복음이 선도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별이 없이 믿는 자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때가 올 때까지를 위하여 율법은 주어진 것이었다. 이때의 성취 또는 구원의 완전한 분배가 성취될 때까지 그동안에 있을 범죄 때문에 율법은 덧붙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약속의 자손이 오셨고 약속 가운데 나타났던 신의 은혜가 보다 완전히 나타났으므로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율법은 폐기된 것이었다.

즉 결점을 지닌 계약은 다른 보다 나은 계약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다(히 9:7, 8). 비록 율법이 자연법으로 생각할 때 인간에게 죄를 확인시켜 주고 그들로 죄를 자제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언제나 효력이 있고 아직 계속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법적 계약의 구속(拘束)과 그것이 주는 공포에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약속에 의하여 계시된 것과는 다른 의인(義認)의 길을 제시해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죄의 본모습도 보여 주고 그리스도에게 안내함으로 오직 그를 통하여 그들이 용서받고 또 의롭다 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다. 율법이 약속을 폐기하기 위하여 시도된 것이 아님을 더욱 증거 하기 위하여 사도는 "율법이 천사들로 말미암아 증보의 손을 빌어 베풀어진 것이라"라고 덧붙인다. 율법은 약속에 따라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방법으로 또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다. 약속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즉 모든 민족들이 믿는 자들을 포함한 그의 모든 영적 자손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없이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또한 약속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진 데 비해서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주어진 것이었다. 이 까닭에 율법이 약속을 폐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여진다. 왜냐하면(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공동 번역 인용). 즉 중재자인 천사는 양편의 입장을 다 고려하여 상대적인 입장에서 율법을 기록하였으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또는 계약은 하나님의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요, 따라서 율법보다 약속이 우수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과 유대 민족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협정인 율법에 의하여 그가 오래전에 아브라함과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포함한 그의 모든 영적 자손에게 주신 약속을 폐기하실 리는 없는 것이다. 그가 율법에 의해 약속을 폐기하신다는 것은 그의 지혜와도 일치되지 않으며 그의 진실과 신실하심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모세는 다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중재자일 뿐이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사이에 중재자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여 주어진 율법이 영적 자손에게 주어진 약속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더군다나 율법이 약속을 전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Ⅱ. 율법은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21절).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르느냐? 정말 율법과 약속은 서로 상충되고 대등한 입장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 또 너희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과 모세의 계약이 서로 모순된다고 보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이에 답하여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한다(당시에는 율법이 하나님이 약속을 거스른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생각을 품으시지도 않았고, 그가 하신 말씀 가운데 그러한 내용을 찾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율법은 약속에 결코 불일치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에 종속된 것으로 율법의 의도는 인간들의 범죄를 들어내고 그들로 하여금 율법의 의보다 나은 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았다는 결론은 하나님이 주신 교훈이라기 보단 그들이 만들어낸 교훈이라고 봄이 옳다. 왜냐하면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약속은 폐지된 것이 되고 더 이상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 속에서는 우리는 율법으로 의로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기" 때문에(22절). 또는 성경이 유대인이건 이방이이건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어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서 의를 성취하거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인들의 상처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그 상처를 치료해 줄 수는 없다. 율법은 그들이 죄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율법이 희생과 순결의 제사를 정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없이 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따라서 율법의 가장 큰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다." 곧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율법이 그들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데 불충분함을 알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시키고 또한 약속의 혜택을 획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Ⅲ.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24절). 앞의 구절에서 사도는 "믿음이 오기 전에" 또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가 완전히 드러나기 이전에 모세의 경륜 아래서의 유대인의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때 그들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어 엄격한 책벌 아래 율법의 여러 계명들을 엄수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옥에 갇힌 죄수처럼 율법의 공포와 단련 아래 매인바 되어 있었다. 이들을 이같이 묶어둔 목적은 이로써 그들로 하여금 "후에 계시될 믿음을" 기꺼이 용납할 마음의 자세를 갖게 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영접하고 그가 도입한 보다 좋은 은혜에 애착을 갖게 함으로 그들을 노예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보다 큰 빛과 자유의 상태로 그들을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율법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몽학 선생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그는 그들에게 말한다. 율법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선포하고 동시에 그들의 의무에 대한 오류가 그들에게 있을 때마다 그들을 치는 저주로써 주어진 동시에 율법은 또한 그들의 상실되고 영락된 상태를 그들에게 알려 주며 그들의 의가 그들을 하나님에게 추천하기에 얼마나 보잘것없고 나약한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율법이 온갖 희생의 제사를 그들에게 의무화한 것은 비록 이런 제사들이 그 자체만으로 그들의 죄를 없이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또 그가 죄를 사하기 위하여 드린 큰 희생의 유형(그림자)으로써 주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동시에 율법에(대단히 모호하게 나타났지만) 그들에게 그를 그들의 안신처와 도피처로 삼도록 지시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이 율법은 미성숙 상태에 있는 그들을 교훈하고 다스리기 위한 몽학 선생 또는 ‘파이다고고스’란 단어의 뜻이 잘 나타내 주듯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고 인도하는 그들의 종인 것이다(마치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보호를 맡고 있는 하인들에게 이끌리어 학교에 가듯이 말이다). 또한 율법이 그들의 몽학 선생이 되어 그들을 의인과 구원의 참된 길에 대하여 보다 확실히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의인과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가장 완벽하고 명백한 의인과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시기 위하여 임명되어 오신 것이었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용도와 목적으로 쓰이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면 기독교 시대에서도 계속 율법이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던져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25절). "믿음이 온 후" 곧 그리스도 아래서 복음의 반포가 시작되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한 용서와 생명의 길이 가장 밝은 빛 아래 나타났으므로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한다. 즉 우리가 예전처럼 우리를 그에게로 인도해 주는 율법이 쓰이는 용도와 목적을 알려 준다. 그가 이 문제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그의 옛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 이것은 그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복음의 시대에 비교할 때 율법을 주신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복음의 시대에 비교할 때 율법의 시대는 아직 어둡고 공포에 찬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율법은 그들에게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고 그에게 희망을 갖도록 그들을 격려한 면에 있어서 훌륭한 조력자와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였다.

2. 유대인들이 범함 큰 과오와 어리석음. 그것은 그들이 율법의 의도를 잘못 알고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목적에 남용하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율법은 그들에게 의롭다 함을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며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는 수단으로써 계획된 것이었고 또한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여 그를 믿게 함으로 의인의 특권을 획득하게 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기를 바랐던 것이다(롬 9:31, 31; 10:3, 4 참조).

3. 율법보다 뛰어난 복음의 유익성, 복음 아래서 우리는 구약의 유대인들이 누렸던 것 이상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특혜를 즐길 뿐만 아니라 옛 유대인들이 메인 바 되었던 구속(拘束)과 공포의 상태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미성숙한 어린아이로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장한 아들로서 대우를 받게 되었고, 옛 유대인들보다 더 큰 자유를 허용받았으며 더 큰 특권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 준다.

(1)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을 선언한다(26절).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① 참 기독교인들이 복음 아래서 누릴 크고 놀라운 특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종으로 취급받지 아니하고 "아들들"로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과 거리를 둔 상태, 곧 예속된 상태에 거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가까이 그리고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들은 그의 자녀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었고 모든 권리가 허용되는 특권을 향유하게 되었다.

② 그들이 이 특권을 얻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그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만을 의인과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의지함으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로부터 주어지는 특권을 누릴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인데) 그들이 세례를 받을 때 고백하였던 것임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세례 받을 때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그들은 그에게 드려진 바 되었고 그의 옷을 입은 것과 같으며 스스로를 그의 종이요, 제자로 선언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일원이 된 후 그들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었고 그렇게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유대교로 들어가는 예표가 되듯이 세례는 기독교회로 우리를 받아들인다는 엄숙한 의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사도들에게 세례를 위임하심으로써(마 28:19) 세례를 기독교에 들어오는 예식으로 정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훈련한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세례를 베푸는 것은 관례가 되었다.

아마 사도는 본문에서 그들의 세례를 의식적으로 강조하고 도 그들이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할례의 유익성을 강조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자 하였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약속된 자손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기시키려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도는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는 답변으로 이 곤란한 문제를 가볍게 처리한다. 즉 복음 아래에서는 세례가 할례를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드려지고 또 신실히 그를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세례에 의하여 율법이 베푸는 특혜에 허입되듯이 그들도 기독교의 온갖 특권 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빌 3:3). 그러므로 그들이 할례를 계속 사용해야 할 이유는 없어진 것이다. 둘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옷 입었다는 사실이다. 세례 받을 때 우리는 그에게 제자 됨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의 신실한 종들로써 행동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로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함께 세례 받았다는 말이요, 또 그가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실 때 우리도 그와 일치하여 죄에 대하여서는 죽고 새 생명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롬 6:3, 4). 우리가 자주 이 사실을 기억할수록 이 사실을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 특권은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율법은 유대인과 희랍인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모든 우선권을 주었다. 또한 율법은 "종과 자유인", 주인과 종, 또 남성에게만 할례를 베풀므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르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입장에 있게 되었고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한쪽이 민족적 또는 개인적 편견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을 다른 편에서 누린다든가 반대로 그러한 민족적 개인적 특권이 없다고 해서 다른 민족이 배척된다는 법도 없게 되었다. 다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민족, 성, 빈부의 차이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에게 용납되며 그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된 것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음을" 그는 선언한다. 저희의 유대적인 교사들은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하며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믿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아니다, 할례는 필요 없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약속된 자손이며 그를 통하여 지상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되는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다면, 즉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면 너희가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될 것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될 것이요, 결과적으로 그의 큰 축복과 특권을 받을 자격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라고 말한다. 전반적으로 고찰하여 볼 때 의인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은 일시적인 제도에 불과하고 약속을 폐기하고 대신 있어진 것이 아니라 약속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하겠다. 바울은 아래에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제도하에서 누린 것보다 더 크고 훌륭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며 따라서 갈라디아인들이 자기들에게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즉시 빼앗아 버리려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고 현명치 못한 처사라고 말한다.

[창세기 30장 주일설교말씀] 야곱과 라헬 이야기(창 30:14-24)

 

[창세기 30장 주일설교말씀] 야곱과 라헬 이야기(창 30:14-24)

창세기 30장에서는 야곱과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레아를 시기하게 됩니다. 르우벤이 들에 나가서 합환채를 얻었는데 라헬은 이것을 레

rhb-bible.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