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야고보서 5장 강해설교말씀] 맹세에 대한 경고(약 5:12-20)

르호봇 2023. 2. 1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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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5장에서는 함부로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하면 안 된다. 지키지 못할 서원은 자기에게 화가 될 수 있다. 사람에게도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 지키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하는 맹세는 의미가 없다.

 

맹세에 대한 경고(약 5:12-20)

 

이 서신을 이제 끝맺으면서 저자는 아주 재빠르게 한 가지 한 가지를 열거하며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여러 가지의 것들이 이 얼마 안 되는 구절들 속에서 한꺼번에 주장되고 있다.

Ⅰ. 맹세하는 죄에 대하여 경고되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12절).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주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너희를 비난하며 모든 악한 말을 하는 너희의 박해자들에게 맹세하지 말라. 그들이 너희를 해하는 것 때문에 감정에 사로잡혀 쉽게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맹세는 여기서 물론 금하고 있으며 박해자들이 가한 해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걱정으로 맹세하는 죄를 범한 사람들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경고는 이러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종류의 맹세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 적용된다. 어떤 사람들은 ‘프로 판톤’ - 즉 모든 것 앞에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의미는 그들이 일반 대화에 말하는 모든 것 앞에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습관적인 맹세 또한 분명히 금지되고 있으며, 그러한 맹세는 성서에 의하여 매우 중한 죄로써 취급되었다. 불경한 맹세가 유대인 사이에서 보통 습관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서신이 외국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보내졌다는 사실에서(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권고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맹세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오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혐의를 받고 그 협의를 벗기 위하여 반증할 때에 최후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저주와 맹세를 한 것에서 볼 때, 그들은 감히 맹세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정립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지적된 다른 여러 죄와 함께 함부로 맹세하는 죄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며 그리스도인다운 특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까지 이 맹세하는 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영국 교회에서 맹세하는 죄를 저지른 국교 반대자에 대한 말을 듣기란 극히 드문 일이지만, 국교도라고 자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에게도 더 나은 점이란 하나도 없다. 참으로 밉살스러운 맹세와 저주가 오늘날 모든 신중한 그리스도인들의 귀와 마음을 매일 상기케 한다. 야고보는 여기서 말하기를,

1.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12절)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맹세하는 일을 경시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맹세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왜 여기서 무엇보다도 맹세하는 일이 금지되고 있는가?

(1) 왜냐하면 맹세는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공격이며, 그의 이름과권위에 대한 최대의 멸시이기 때문이다.

(2) 이 죄는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적은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무엇을 주거나, 쾌락 또는 명심을 얻게 하지도 않고, 오직 죄 속에 빠져 방종함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불필요하게 적대감정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시 139:20).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척하거나, 예배 행위로써 때때로 하나님을 찬양할지라도, 맹세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라는 증거가 된다.

(3) 맹세는 사람에게 일반 버릇이 들면 그것을 떼어버리기가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세로 무엇보다도 경계되어야 한다.

(4)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만약 네가 하나님의 이름 모독하며 또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희롱한다면, 너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네게 지주가 되어 주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박스터의 생각과 같이) "이러한 모든 것이 필요한 맹세를 금하는 것은 아니고, 마땅히 필요한 맹세에 대해서는 거기에 적합한 존경심을 가지고 할 것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다." 또한 "맹세의 참된 본질은, 우리가 어떤 의심할 것 없는 것에 대하여 단언하기 위해서 어떤 위대한 것의 명성을 들어 우리의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지, (보통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나 다른 심판자에 대한 호소가 아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하늘과 땅으로 맹세하거나 또는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그 밖의 맹세들이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맹세를 하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지 않으면 무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점점 하나님을 욕보이되 피조물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그것에 맹세했고 마침내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들어 모독적으로 맹세하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을 같은 위치에 놓고 생각하게 되었다.

2.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다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12절). 즉 너희는 너희의 뜻을 분명히 말해야 할 기회가 왔을 때에, 분명하게 예! 하거나 아니요! 함으로 충분하다. 또한 너희가 한 말에 확신을 가지며 진실하여 너희가 무슨 잘못으로 의심받을 만한 여유를 주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이미 말한 것이나 경솔한 맹세로써 약속한 것들 때문에 되돌이켜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될 것이며, 너희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을 맹세하도록 이끄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의심받는다. 너희가 진실하는 것과 너희의 한 말을 너희가 확신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의 말할 때 맹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셋째 계명에 분명하게 첨부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주 여호와를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주께서 죄 없다 아니하시리라."

Ⅱ.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적합하게 행동해야 할 것을 배운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13절). 이 세상에서 우리의 환경은 여러 가지이다. 우리의 지혜는 환경에 알맞게 순응해야 하며, 번영할 때든지 고난을 당할 때든지 항상 우리 자신에게 맞게 활동되어야 한다. 때로 우리는 슬프고, 때로는 유쾌할 것이다. 하나님은 한 가지 환경을 또 다른 환경과 대치시킴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명하신 여러 가지 의무를 좀 더 잘 관찰할 수 있게 하셨고, 우리의 감정과 사랑에 새겨진 깊은 인상의 우리의 헌신에 도움이 되게 하셨다.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며, 반영은 우리를 찬양으로 충만케 해야 한다. 고난의 때에만 기도하거나, 즐거운 때에만 노래하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무는 수행되는 과정에서 특별한 유익을 가져다주며, 또 적적한 때에 최고의 행복을 목표로 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1. 환난의 때에는 기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일이다. 괴로움을 당한 사람은 다른 위하여 기도해 주는 만큼 스스로 기도해야 한다. 고난의 때는 기도하는 때이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며, 우리는 좀 더 일찍 주를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평소에 하나님께 대하여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하여 질문하게 될 것이다. 영혼이 그때에 가장 겸손해지고 굳은 마음이 깨지고 부드러워진다. 회개하는 겸손한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기도는 가장 하나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시는 것이다. 재난은 자연히 불평을 말하게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을 말할 수 있는가? 고난 속에서 신앙과 소망을 훈련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는 바로 이러한 은혜들을 우리가 얻고 또 키워 나갈 수 있는 약속된 방법이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13절).

2. 즐겁고 번영하는 때에 찬송하는 것은 가장 적합하며 알맞은 일이다. 원래는 ‘프살레토’ 노래하다고만 되었는데, 이것은 가사를 붙이지 않고 노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초대 교회 시대의 몇 가지 글에서(특히 풀리니의 편지나 터툴리안의 글들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중에 찬송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서에서 혹은 그 밖의 개인적 명상에서 취한 것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골로새인들과 에베소인들에게 서로 시와 찬양과 영적 노래로 화답하라고 권고한 것은 성서에 속에 있는 것들로써, 다윗의 시편은 특히 히브리 말로 슈림, 테힐림, 미쯔모림으로 구별되었는데, 이것들이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찬송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기쁨 중에 부르는 이 찬송은 복음의 지시하는 바요, 그 기쁨은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기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찬송은 어떤 사람이 즐겁고 번영할 때에 그 기쁨을 나타내는 한 방법으로써 사용되어야 한다고 여기에 제시되었다. 거룩한 기쁨은 공공 집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들 사이에서나 혼자 고요히 있을 때에도 맛볼 수 있다. 우리의 찬송이 주님께 드리는 진심의 노래가 되도록 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헌신을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다.

Ⅲ. 병든 자들에게 주는 특별한 교훈과 이 교훈을 따르는 자에게 약속한 치료와 사유의 은혜를 볼 수 있다. 병자가 있는데 그가 원한다면,

1. "장로들을 청하라." ‘프레스뷔테루스 엑클레시아스’ 장로들 또는 목적들을 의미한다(14,15절). 목사를 청하고 그들의 도움과 기도를 바라는 것은 병든 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2. 목자들의 의무는 그들이 청함 받았을 때 병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지니라"(14절). 목사들은 병든 자의 상황에 맞도록 기도해야 하며 중재 또한 재난을 당한 자들을 위한 중재 기도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형편에 적합해야 한다.

3. 기적적인 치료가 이루어지도록 그들은 병든 자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발랐다. 주석자들은 대개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지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의식으로만 생각하여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는 이 의식도 중단하였다고 한다. 마가복음에서 우리는 주의 제자들이 많은 병든 자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치료했다는 기록을 보라(막 4:13). 그리고 주후 200년경의 교회에서 이런 의식이 실행되었다는 기록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치료의 은사는 이때에도 계속되었는데, 이런 기적의 은사가 그친 다음에는 이 의식도 중단되었다. 그런데 가톨릭교도들은 소위 "중부성사"라고 하여 이것을 의식화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처럼 병을 고치는데 그 의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교회를 규정 속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위반하듯이, 이 의식에서도 성서를 위반하여 이의식이 죽음의 순간에 실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주의 제자가 기름을 바른 것은 병 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는 그들의 기름 바름이 죄의 잔재를 추방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세상의 힘과 더욱 잘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가톨릭 교도들은 그들이 이러한 의식을 계속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증명하지 못하게 때문에 신도들에게 보이지 않는 결과가 더욱 훌륭한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이 의식이 성경에 쓰인 목적과는 반대로 쓰이는 것보다는 아주 없애 버리는 것이 한결 더 나을 것이다. 어떤 개신교들은 기름 바르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허락되고 승인된 것이지 관습적인 것이 되도록 허락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고보의 말에 의하면, 이 의식은 치료되리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는 허락된 듯하다. 또 어떤 개신교도들은 이 의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주장한다. 즉 이 의식은 사도들이 시대에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의식이 어느 시대에나 완전히 중단되지 않아야 하고, 기름을 바르는 자들이나 기름 바름을 입은 자들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는 경우에는, 특별한 축복의 병든 자에게 행해지는 이 의식에 수반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병든 자의 구원이 기름바름으로써가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15절) 따라서,

4. 병든 자를 위한 기도는 산 믿음에서 시작되며 계속해서 이 믿음이 동반되어야 한다. 기도하는 자난 기도받는 자가 다 같이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병들었을 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기도는 냉정하며 판에 박힌 평범한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5. 기도의 성취에 대하여 살펴보자. 주님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며, 또 기도받는 사람이 구원에 적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직도 있을 때에 그를 치료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15절)는 것은, 그 병이 어떤 특별한 죄의 대가로 보내졌어도 그 죄는 사함을 받고 그 표식으로써 병도 치료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병들어 약한 사람에게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권하시고, 만일 이를 어길 때에는 더욱 큰 불행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는 어떤 특별한 죄가 그 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바로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다. 죄는 병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찌르는 가시이기도하다. 죄가 용서되면, 고통은 은총 속에서 사라지거나 아니면, 그 고통 속에서도 은총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병의 치료가 죄의 용서받음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사 38:17)라고 말한 것이다. 너희는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주여 나에게 평안을 주시고, 내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대개 기도한다. 그러나 그런 때의 너희의 기도는 오히려 "주여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Ⅳ.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났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6절)는 권고는 받는다. 어떤 주석자들은 이 구절을 14절과 연결하여 생각한다. 따라서, 병든 자들이 목사들을 청하여 기도해 주기를 간구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목사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자기들의 병의 원인이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보복적인 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하나님께 그 죄의 용서를 빌지 아니하고서는 병이 치료됨을 바랄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하여 목사들이 그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바로 알게 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16절에 서술된 죄의 고백은 그리스도인들 상호 간에 있어야 할 고백이고, 가톨릭 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신부에게 하는 고백은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해를 입혔을 때에는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상대방에게 그 불의한 행동의 잘못됨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죄짓도록 유혹했거나, 동일한 악행을 공모했지만, 서로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고 자처하고 회개하도록 서로를 돋우어 주어야 한다. 죄가 공동의 성질을 띄고 있고 대중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공중 앞에서 그 죄를 고백하여 그것에 관계될 모든 사람들에게 그 고백이 미치도록 하여야 한다. 때로는 덕망 있는 성직자들이나 항상 기도하는 친구들에게 죄를 고백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은혜와 용서를 탄원하여 우리를 돕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때에 야고보가 우리에게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들 서로에게 잘못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들 서로에게 잘못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고백이 우리와 다툰 친구와 화해하는데 필요하거나 또는 어떤 이에게 잘못한 일에 대한 배상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가책을 받으며 영혼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한도 내에서만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자신의 연약함과 결점을 고백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다. 이때에 그들은 서로 친밀해지고 정다워지며 또한 서로 간에 지은 죄와 알력에 대한 용서를 비는 기도로써 서로 도울 수 있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서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자들은 모두 함께 기도해야 하며, 또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13절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고,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또 14절은 목사들의 기도를 받으라고 권하고 있으며, 16절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모든 종류의 기도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Ⅴ. 기도의 위대한 유익과 효력이 여기에 선포되고 입증되었다. "의인의 간구는 자기를 위한 기도이든 남을 위한 기도이든 간에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6절). 이에 대한 증거로써 엘리야를 들 수 있다(17,18절). 기도하는 자는 의로운 자이어야 하는데, 이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엘리야도 완전한 의인이 아니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음) 복음의 의미에서 의롭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죄로써 알려진 것은 결코 하나도 사모하거나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로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로다"(시 66:18). 더 나아가서, 기도 자체가 열렬하고 내용이 충실하며 정성 들여진 기도여야 한다. 그것은 마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어야 하며, 꾸밈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이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즉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며 우리의 이웃에게도 유익을 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실 것을 확실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역사하실 만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엘리야의 기도가 성취된 것을 예로 들어서 기도의 능력이 여기에 증거 되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경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가 성취된 것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엘리야는 아주 열정적이고 선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감정을 혼란을 일으켰던 사람이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인간의 장점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엘리야를 본받아 열심히 기도하고 엘리야가 기도한 바로 그러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써는 불충분하고, 간절히 기도드려야 한다.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우리의 소망을 견고하게 하며 열심을 내어 바랄 뿐만 아니라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며 간구할 때 우리는 힘없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고 박해를 일삼는 그 나라에 대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셔서,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늘을 열고 닫는 열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예가 요한 계시록 11장 6절 암시되어 있는데, 두 증인이 하늘을 닫고 비가 오지 못하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였다. 이 같은 기도의 특별한 능력이 기록된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까지고 즉시 기도하고 또 열심히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의 그 어느 자손에게도 "나의 얼굴을 헛되이 찾으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만일 엘리야가 기도로써 그처럼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의롭지 못한 사람의 기도는 공허감으로 되돌아오고 말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으로 응답하시지는 않을지 몰라도, 많은 은혜로써 응답되고 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Ⅵ. 이 서신은 우리가 현재에서 다른 사람들의 회심과 구원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하라고 권고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19,20절). 어떤 주석자들은 이 구절들을 해석하기를 야고보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결점과 잘못을 매우 노골적으로 혹독하게 질책한 것에 대한 사과의 말이라고 한다. 야고보는 그가 유대인의 잘못을 고쳐 주는데 크게 관심을 쏟는 이유를 확실히 보여 준다. 즉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 많은 죄를 덮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을 야고보가 진리를 떠난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내용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되고, 또한 이와 비슷한 종류의 또 다른 연속적인 노력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잘못을 저지른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여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게 하면, 잘못을 저지른 자를 돌아서게 한 그 사람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도구인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자기에겐 과실이 없다고 자랑하거나 자신의 과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지혜롭다거나 경건한 사람의 표정이 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잘못한 것을 말해 주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그들의 아주 보잘것없고 가난한 사람일 때에 그들을 좀 더 지혜롭고 훌륭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꺼려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을 진리, 즉 복음(가장 위대한 규칙이며 진리의 표준)을 떠나면, 그것이 생각에서 이든지 실제 생활에서 이든지 간에 그들이 이 규칙에로 되돌아오도록 너희의 모든 노력을 다 하여야 한다. 판단의 잘못과 생활에서의 실수는 항상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실제적인 모든 실수의 근저에는 어떤 교의상의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습관적으로 나쁜 사람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어떤 좇지 않은 원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돌이키는 방법은 그들의 과오를 줄이는 것이며, 그들을 끌고 다녔던 악으로부터 그들의 교화시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형제에 대하여 우리가 반드시 힐책하고 공격해야 하며, 그들에게 치욕과 재난이 임하기를 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돌이키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모든 노력으로도 그들을 돌이킬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핍박하고 파괴할 권력을 아무에게서도 부여받지 못했다. 우리가 만일 어느 누구의 돌이킴에 있어 도움이 된다면, 이 돌이킴의 역사가 대체로 위력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우리에게 그들을 돌이키는 일이 맡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인들의 회심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는, 그들을 회심시키고 변화시키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영이 임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회심시키는 일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결과로써 어떠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현재에 큰 위로를 얻고, 마지막에는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19절에서 "진리를 떠난"이라고 말해진 사람이 20절에서는 "미혹한 길에서"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우리가 그들의 길을 고치고 수정하게 해 주지 않고는 단순히 그들의 생각만 바꿈으로써 그들의 회심시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회심이라는 것은, 죄인이 그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지, 이쪽 파에서 저쪽 파로 옮긴다든지, 또는 단순히 한 사상이나 사고방식에서 다른 사상이나 사고방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는 그 영혼을 사방에서 구원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일은 분명히 훌륭한 평가를 얻을 것이다. 영혼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써, 여기서는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만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바로 전인적인 구원을 포함하는 것이다. 즉, 영혼은 지옥에서 구원되고 몸은 무덤에서 일으켜 세워지며, 이 둘이 모두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된다. 그러고 나서 마음과 생명의 회심으로 인하여 허다한 죄가 덮일 것이다. 성서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구절은 바로 이 구절이다. 우리가 여기서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의 죄가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할지라도, 그 모두가 덮이고 용서되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따돌려지고 버림받게 되면, 심판 때에 다시 우리에게 나타나지 못한다. 인간이 그들의 원하는 대로죄를 방어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날 방도를 꾸미게 하라. 그것은 가장 효과적이고 최종적인 방법으로써 죄를 표기하는 것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가리켜, 회심이 허다한 죄를 방지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회심한 무리들에게 수많은 죄가 방지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회심한 무리들에게 수많은 죄가 방지됐다는 것은 논쟁할 여지가 없을 진리이며, 이러한 현상은 그 무리들의 영향을 받게 되거나 함께 회심하게 될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생각하여 볼 때,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을 위하여 우리가 어떤 가능성 있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그것은 회심자들의 행복과 구원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많은 손해를 막으며, 죄가 세상에 퍼지고 난무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한 것이 되며, 마지막 날에 우리의 위안과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많은 죄인을 의인으로 돌아서게 한 사람들과 그러한 일에 협력할 사람들은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이다. 아멘.

[룻기 히브리어 설교말씀] 보아스가 룻에게 관심을 가지다(룻 2:5-7)

 

[룻기 히브리어 설교말씀] 보아스가 룻에게 관심을 가지다(룻 2:5-7)

룻기 2장에서는 룻과 보아스의 만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룻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시는 통로를 만들고자 합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지만 예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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