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17장 헬라어 강해설교] 변화산 부활 예표 사건(마 17:1-8)

르호봇 2021. 2. 25.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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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7장 헬라어 강해 설교 중에서 변화산 부할 예표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홀연히 부활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될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끝나지 않고 부활하실 것을 살아계실 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보면서 주님이 이 땅에 부활하신 몸으로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이 땅에 재림하시게 됩니다. 

변화산 부활 예표 사건(마 17:1-8)

 

1절은 카이 메드 헤메라스 헥스파랄람바네이 호 이에수스 톤 페트론 카이 이아코본 카이 이요안넨 톤 아델폰 아우투 카이 아나페레이 아우투스 에이스 휘프셀론 카트 이디안입니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17:1

엿새 후에 - 이는16: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 구이다. 즉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16:16)과 그의 수난 예고(16:21) 및 도래할 심판(16: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광휘를 예고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팔일쯤 되'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9:28). 이는 마태가 예수께서 앞부분을 말씀하신 후의 기간의 첫째 날과 마지막째 날을 뺐는데 반해,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일과 본 변형 사건 일을 모두 가산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일 것이다(Hendriksen).

더욱이 누가는 '팔일 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통해 대략적 시간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튼 이 날은 16장의 사건이 있은 후 만 6, 곧 온전한 한 주간이 경과한 때를 가리킨다(Wyciffe).

실로 예수께서는 그 한 주간이 완료하는 시점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J. P. Lange).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상징적 숫자 개념에 따라, '엿새'는 완전한 수요, 일상과 노동에의 숫자로 볼 수 있으며, '엿새 후'는 곧 '이레(7)'로 승리의 완전 수요,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숫자로 볼 수 있다(The Pulpit Commentry). 예수께서는 참 안식과 천국이라는 새 지평을 이제 여시고 계신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 이 세 사람은 전직(前職) 어부 출신들로서(눅 5 :10) 예수께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시던 자들이다(26:37; 5: 37; 13:3; 눅 8:51). 물론 이들의 피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러운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무(責務)를 맡기시었다. 실로 두, 세 사람의 증거야말로 진실된 중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19:15; 8:17; 고후 13:1).

더욱이 예수께서 증인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시킨 것은 혹시 발생하게 될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아직은 침묵의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9). 한편 이들 3인의 제자는 이제 12제자 중에서도 핵심 구성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러운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따로(카트 이디안) - 문자적으로는 '따로 떨어져서', '개인적으로'(privately)이다. 이는 그들에 대해 예수의 영적이고 내밀한 친밀감을 암시한다.

높은 산 -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近距離)라는 점에서 '예벧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W. Ewing).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근접성을(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고 있다(Wyliffe, Clarke, Carr).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신 3:8; 대상 5:23), 시료(3:9)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참조, 133:3). 이 산은 구약에서는 '시온산'(4:48)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족장의 산'이라는 뜻인 '예벧 에쉬 쉐이크'(Jebel esh Sheikh), 또는 '설산'이란 뜻인 '예벧 에트 탈'(Jebel eth Thalg)등으로 지칭된다.

2절은 카이 메테모르포데 엠프로스덴 아우톤 카이 엘람프센 토 프로소폰 아우투 호스 호 헬리오스 타 데 히마티아 아우투 에게네토 류카 호스 토 포스입니다.

마 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변형되사 - 예수가 홀연히 부활의 몸으로 변형되었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메타모르포오라는 동사인데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변형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설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

과거는 이미 예수님은 부활될 것이 작정되었다는 의미다. 수동태는 예수님이 능동으로 스스로 변화의 몸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이 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께서 부활시켜 주셨다. 성도의 부활도 능동이 아니라 수동태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이 될 것이다.

3절은 카이 이두 오프데산 아우토이스 모세스 카이 헬리아스 메트 아우투 쉴랄룬테스입니다.

마 17: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보이거늘 - 예수가 변형될 때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있었다. 호라오라는 동사로서 직설법 과거 수동태 복수 3인칭이다. 제자들의 눈에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가 보였다. 수동태는 그들의 눈에 보여졌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주시니 주님의 변화된 몸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게 되었다는 의미다.

4절은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페트로스 에이펜 토 이에수 퀴리에 칼론 에스틴 헤마스 호데 에이나이 에이 델레이스 포이에소멘 호데 트레이스 스케나스 소이 미안 카이 모세 미안 카이 미안 헬리아입니다.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17:4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기에서 ''(퀴리오스)'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통치하는 자', '결정권을 가진 자', '주인' 등을 의미한.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영예의 칭호로써 일반적으로 부르는 주 존칭이었다.

한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이 말에 대하여 '랍비'(선생, 9:5) '에피스타테스'(곁에서 서 있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 통치자, 9:33)로 각각 묘사되었다. 이 이유는 3절의 '모세와 엘리야'의 기록 순서에 대한 이유와 같은 것 같다.

한편 눅 9:33에는 베드로의 강력한 요청과 관련하여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떤 강제적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주위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즉흥적인 말을 한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말은 그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잘못 인식한 것임을 보여 준다. (1) 예수께서 아직 당신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 즉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이미 그 영광을 얻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고자 했다는 점(2:9, 10).

(2) 산 아래에는 아직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지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안식(安息)을 취하고자 했다는 점(14-20). (3)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전파된 다음에야 영광스러운 세계와 안식이 오는데 그 세계의 안식을 미리 구했다는 점(24:14;1:8) 등이다.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 베드로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시 하지 않고 예수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 드렸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심히 육신 적이요 인간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심'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21-23).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사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수난과 대조되는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주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무지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초막 - 이는 헬라어로 '스케나스'로서 '장악', '천막' 등을 의미한다. 당시에 아랍인들은 존귀한 자가 왔을 때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하여 장막을 쳐주곤 했다 한다(왕하 4:9, 10).

만약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초막 치기를 제의했다, 그는 아마 이 안전한 산상에서 지금 전개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휘와 영적 계시를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이 지체되거나 아예 무산되기를 소원하는 잠재적인 바람에서 이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명절의 하나인 장막 절기의 회상이라는 점이(23:42, 43). 이 절기는 종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에 감사하며, 메시아 시대의 임박한 개시를 인식하고 장막 짓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CARSON). 그러나 후자의 견해는 전체 문맥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리이다 - 이는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스러운 위치에서 예수와 동등시 취급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자의적 판단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과 자신의 동료 제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들로서의 그 세 사람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이 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세 분을 수종 드는 자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5절은 에티 아우투 랄룬토스 이두 네펠레 포테이네 에페스키아센 아우투스 카이 이두 포네 에크 테스 네펠레스 레구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아우투 아쿠에테입니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너희는 말을 들으라 -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제자들을 덮었는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도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이다. 주님의 말을 들으라고 했는데 아쿠오라는 동사인데 명령법 현재 능동태 복수 2인칭이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하고 있다. 부활의 몸을 하신 주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6절은 카이 아쿠산테스 호이 마데타이 에페손 에피 프로소폰 아우톤 카이 에포베데산 스포드라입니다.

마 17: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17:6

제자들이 듣고... 심히 두려워하니 - 본 구절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께서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영광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의 절대적인 공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죄악 된 인간의 통상적인 느낌이다(6:5; 14:27; 28:5, 10).

7절은 카이 프로셀돈 호 이에수스 헤프사토 아우톤 카이 에이펜 에게르데테 카이 메 포베이스데입니다.

마 17: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시니

=====17:7

예수께서 나아와...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 이는 예수의 다함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 보이는 행동이다(6:5-7; 10:9, 10: 계 1:17).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깊은 공포에 휩싸여 있던 제자들의 산란(散亂)한 심령을 넉넉히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 사랑과 신적 권위에 입각한 예수의 이중 명령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공포의 자리를 떨고 일어날 뿐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셨다(14:27).

이 이중적 명령은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자 오직 당신만이 인간이 지닌 심연의 공포를 제거하실 수 있음 보여 주는 것이었다.

8절은 에파란테스 데 투스 오프달무스 아우톤 우데나 에이돈 에이 메 톤 이에순 모논입니다.

마 17: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17: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았을 때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다. 예수는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미리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에게 보여주셨다. 이렇게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도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요한계시록 20장 헬라어 주석강해] 사탄의 무저갱 감금과 천년왕국(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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