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6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우리에게 내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육적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육적으로는 거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삶을 정 반대의 삶입니다. 부자는 겉사람은 부자였지만 속 사람은 나사로처럼 거지였습니다. 나사로는 겉사람은 거지였지만 속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나의 겉사람으로 속 사람의 부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겉사람으로 있을 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 내세에서는 속 사람이 구원받고 천국에서 부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겉사람으로 있을 때 이 세상의 것에만 정신 팔려 속 사람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속 사람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속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살아가는 것을 열심히 준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
19절은 안드로포스 데 티스 엔 플루시오스 카이 에네디뒤스케토 포르퓌란 카이 뷔손 유프라이노메노스 카드 헤메란 람프로스입니다.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16:19
한 부자가... 연락(宴樂)하는데 - 이 부자는 왕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의 의복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이었는데 자색 옷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만이 입던 매우 비싼 옷이었으며 고운 베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더 비쌌다.
또한 그는 매일 잔치를 벌여 세상 연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사실 부자가 누리는 부(富) 자체가 죄일 수는 없다. 다만 넘치는 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난한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에 부자의 잘못이 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자신의 부귀가 스스로의 뛰어난 노력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 믿으며 가난한 자들의 가난을 무능과 게으른 탓이라고 돌려버리기 쉽다. 따라서 부자는 점점 더 특권 의식과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경계하신 예수의 말씀은(18:25) 재물의 강한 부정적 흡인력을 경계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부자들의 이러한 냉혈성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절은 프토코스 데 티스 엔 오노마티 라자로스 호스 에베블레토 프로스 톤 퓔로나 아우투 헬코메노스입니다.
눅 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16:20
나사로 - 이는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이다. 예수의 비유들 속에서 등장인물에 이름을 붙인 경우는 이곳 한 군데뿐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의 경건을 암시하기도 하나 그가 지금은 고통 중에 있으나 죽은 후에는 평안을 누리게 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한편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과 일치하는가 하면 나사로는 요 11장에 나오는 인물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버니요,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린 자의 이름과 같다.
헌데를 앓으며 - 나사로는 몸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자(에베블레토. '던져져 있는')이며 피부병을 앓는, 거지이다. 그의 병이 '궤양' 혹은 '종기'라고도 하지만 문둥병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사로가 문둥병 환자라고 한다면 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대문 - '퓔로나'는 보통의 대문과는 달리 장식이 된 높은 솟은 대문과 같은 것으로서 그 부자의 집의 호화스러움과 사치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21절은 카이 에피뒤몬 코르타스데나이 아포 톤 프시키온 톤 피프톤톤 아포 테스 트라페제스 투 플루시우 알라 카이 호이 퀴네스 엘코메노이 아펠레이콘 타 헬케 아우투입니다.
눅 16: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16:21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 대개의 유대인들의 경우 일단 그릇에서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은 먹어서는 안 되며 도로 접시에 담지도 않는데 이는 전염병을 염려해서 생긴 습관이다. 오히려 그들은 찌꺼기를 식탁 아래로 버린다(S.Kraub).
여기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던져지다'의 의미이다. 즉 부자의 식탁에 앉은 자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땅바닥에 던진 것을 뜻한다.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여기서 개란 사람들이 집 안에서 기르는 개인 '퀴나리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납게 거리를 쏘다니는 개의 뜻인 '퀴온'이다. 이러한 개에게 시달리는 사람이란 고대 유대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벌을 받고 있는 죄인을 의미한다.
리펠드(Liefeld)에 의하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는 것은 나사로가 '개'에게까지 모욕을 당한 것을 뜻한다고 한다. 한편 몇몇 학자들은(Vincent, Geldenhuys, Alford) 개들만이 나사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헌데를 핥아주었다고 해석한다.
22절은 에게네토 데 아포다네인 톤 프토곤 카이 아페네크데나이 아우톤 휘포 톤 앙겔론 에이스 톤 콜폰 투 아브라암 아페다넨 데 카이 호 플루시오스 카이 에타페입니다.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16:22
천사들에게 받들려 - 성도들의 삶을 보호하고 인도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는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천사의 역할을 보여주는 표현이다(행 27:23; 히 1:14). 아포페로 동사이다. 부정사 과거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 의해서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나사로는 이 땅에 살면서 육적으로는 거지였지만 속 사람은 구원받은 부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후기 유대교 사상에 의하면 의로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선한 천사들이 받들어 모셔가고, 악한자가 죽으면 악귀들이 데려간다고 한다. 아마도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을 부자의 죽음과는 달리 거지인 나사로는 장례식도 없이 공동묘지와 같은 곳에 버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그들의 영혼이 도달하게 된 장소는 전혀 반대였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막 12:26; 행 7:32) 이시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 2 :23)으로서 낙원에 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간접적이나마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죽은 후 머무는 처소에 대하여 성경이 결정적인 확증을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의 종합적 고찰을 통해(단 7:10; 마 25:31, 46; 롬 14:10; 고전 15:44; 히 9:27) 대략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사후에 인간의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인 반면, 음부는 이 세상에 비해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림자에 불과하다(23:43; 고후 12:4; 계 2:7; 6:9-11; 7:9,10; 20:13).
23절은 카이 엔 토 하데 에파라스 투스 오프달무스 아우투 휘파르콘 엔 바사노이스 호라 톤 아브라암 아포 마크로덴 카이 라자론 엔 토이스 콜포이스 아우투입니다.
눅 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23
고통 중에 - 24절에는 그가 '불꽃'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옥의 상태가 종종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당하는 고통 상태로 묘사된다(막 9:43). 이 불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 문자 그대로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거지 나사로의 축복된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철저한 결핍과 소외의 상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의인들이 풍성하고 사랑 가득한 교제의 축복을 누리는데 반해, 악인들은 그 마음속에 있는 엄청난 탐욕과는 정반대로 결핍 가운데서 목말라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부자의 돈을 매개로 찾아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자 더 큰 결핍과 소외에 직면케 된 것이다.
눈을 들어...보고 - 예레미야스(Jeremias)는 말하기를 '의인들과 악인들이 저 세상에서 서로 마주 본다고 하는 것은 후기 유대교에 잘 알려진 표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3:28에 의하면 저주받은 자들이 축복받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은 최후 심판 이후에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는 장차 지옥에서 당할 끔찍한 고통의 장면을 어느 정도 앞당겨 보여줌으로써 경고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24절은 카이 아우토스 포네사스 에이펜 파테르 아브라암 엘레에손 메 카이 펨프손 라자론 히나 바프세 토 아크론 투 다크튈루 아우투 휘다토스 카이 카타프쉬크세 텐 글로산 무 호티 오뒤노마이 엔 테 플로기 타우테입니다.
눅 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16:24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요 8:39). 이 부자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처럼(마 3:9)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여 긍휼을 얻기를 간구한다.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 21절에서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표현과 대조가 된다. 후기 유대 사상에 의하면 의인들이 있는 곳에는 생수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상태가 저 세상에서는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고민하나이다 - '오뒤나오'의 원래 뜻은 '괴로움을 겪다', '고통당하다'이다. 이 말은 '고통', '근심', '비탄'의 뜻인 '오뒤네'에서 온 것으로, 고통으로 인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는 극심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육체적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영적 절망과 소외감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25절은 에이펜 데 아브라암 테크논 므네스데티 호티 아펠라베스 쉬 타 아가다 수 엔 테 조에 수 카이 라자로스 호모이오스 타 카카 뉜 데 호데 파라칼레이타이 쉬 데 오뒤나사이입니다.
눅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16:25
얘 - '테크논'은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호칭으로 남자아이일 경우 '아들아'하는 말이며 여자 아이일 경우 '딸아'라는 말과 같다. 아브라함은 그를 '아들아'라고 부름으로써 그 자손 됨을 시인(是認)하였지만, 다음에 나오는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자신의 자손 즉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는 유대인만의 특권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치로는 인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네 좋은 것...고난 - '네 좋은 것'(your good things, NLV)의 '네'라고 하는 소유 대명사는 12:2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기를 위하여'라는 의미와 유사하다. 그러나 나사로가 받은 고난(bad thing,NLV) 앞에는 소유 대명사가 없음으로, 부자가 받은 '좋은 것'은 자신의 재물로 누린 안락인 반면 나사로는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 받은 고난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사회의 구조적인 악 또는 가난 등에 의해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라는 정죄를 받았던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자였음을 암시한다.
위로를 받고...고민을 받느니라 - '위로를 받고'의 원어 '파라칼레오'는 '옆으로 혹은 자기가 있는 쪽으로 부르다'의 뜻이 있다. 직설법 현재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나사로는 현재 실제로 아브라함의 품에서 속 사람인 영혼은 위로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낙원에서 위로를 받게 된다.
이는 고통이나 슬픔을 당한 사람 옆에서 그를 격려, 고무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본 구절이, 지상에서의 부유함이 저 세상에서는 고난을, 지상에서의 가난함이 저 세상에서는 위로를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 응보론적 논리를 가르치거나 부는 지옥을, 가난은 낙원을 예비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탐욕과 이기심과 허영을 위해 자기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가난하여 다른 사람을 돕지는 못했으나 그의 이름 '나사로'(하나님의 도우시는 자)에서 그 경건성을 추측할 수 있는 거지가 더욱더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자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스탤톤(Stanton)에 의하면 '그 부자는 재물만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무관심한 죄 때문에 정죄받았다'라고 한다. 즉 여기서 무조건 정죄되고 있는 것은 바로 재물의 남용, 과소비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묵가 하심과 외면이다. 이 비유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었던 냉혹한 태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26절은 카이 에피 파신 투토이스 메타크쉬 헤몬 카이 휘몬 카스마 메가 에스테리크타이 호포스 호이 델론테스 디아베나이 엔튜덴 프로스 휘마스 메 뒤논타이 메데 호이 에케이덴 프로스 헤마스 디아페로신입니다.
눅 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6:26
큰 구렁이 끼어 있어 - 정확한 의미는 '큰 구렁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이다. '큰 구렁'의 원어 '카스마는 '벌어진 틈'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은 팔레스틴의 사막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으로서 장마철외에는 전혀 물이 없는 골짜기를 지칭하는 말인 '와디'나 '협곡'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에 대한 아브라함의 언급은 하나님의 결정이 결코 변경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1) 이 땅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죽고 나면 더 이상 그 같은 기회가 없게 된다는 것과 (2) 죽음에 의해 결정된 각자의 처소는 어느 누구의 권세의 능력으로도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서는 '연옥'(purgatory)이란 교리를 만들어 지상이 있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 가있는 자를 위해 미사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를 행할 때 그는 점차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김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사상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벧전 3:18-20).
27절은 에이펜 데 에로토 운 세 파테르 히나 펨프세스 아우톤 에이스 톤 오이콘 투 파트로스 무입니다.
눅 16: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16:27
나사로를...보내소서 - 유대인들 중에는 죽은 사람을 통해서(물론 그 방법은 꿈이든지 환상일 수 있다) 산 사람들에게 전갈을 보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 예를 구약의 사울이 엔돌에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본 사실에서 제시하기도 한다(삼상 28:8-19).
그러나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영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다른 차원의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 하지 못한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볼 때(19-31절; 23:43; 고후 5:1) 사울의 경우는 사단의 기만에 속은 예였다.
한편 여기서 부자는 나사로를 여전히 그의 종 정도로 생각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현세에서의 신분 차이가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효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말이다.
28절은 에코 가르 펜테 아델투스 호포스 디아마프튀레타이 아우토이스 히나 메 카이 아우토이 엘도신 에이스 톤 토폰 투톤 테스 바사누입니다.
눅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8
증거 하게 하여 - '증거 하다'의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마이는 '자세하게 모든 것을 증언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확언이나 맹세 또는 경고 등을 의미한다. 이는 죽고 나서 음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심판의 엄정함과 무서움을 깨닫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만 나사로를 보내주도록 요청한 것은 여전히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낸다.
29절은 레게이 아우토 아브라암 에쿠신 모세아 카이 투스 프로페타스 아쿠사토산 아우톤입니다.
눅 16: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16:29
모세와 선지자들...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들을지니라'의 원어 '아쿠오'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이해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들은 바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쿠오는 명령법 과거 능동태를 사용했다. 이 땅에 보냄 받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과 목사들과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함을 말한다. 이런 자들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말해도 듣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말씀을 듣고 암송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의미이다. 한편 부자는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그의 다섯 형제에게 나타난다면 그들이 나사로를 하나님의 사자로서 확실히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끊임없이 강조한 모세와 선지자들을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들이 설령 죽었다 살아난 자가 경험담을 이야기해준다고 해도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은 그 완악한 심령 가운데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아이러니(irony)를 주목해 보라. 예수는 그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 조차도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30절은 호 데 에이펜 우키 파테르 아브라암 알르 에안 티스 아포 네크론 포류데 프로스 아우투스 메타노에수신입니다.
눅 16: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0
죽은 자... 회개 하리이다 - 이 부자의 생각은 오늘날 일반인들의 생각과 같다. 즉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불신자들도 믿음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기적 자체에만 연연하는 자는 그 기적이 드러내고자 하는 참된 진리에는 오히려 무관심하다. 더욱이 초자연적 기적이 계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곧 자신의 세속적인 삶으로 쉽게 복귀하고 만다.
31절은 에이펜 데 아우토 에이 모세오스 카이 톤 프로페톤 우크 아쿠우신 우데 에안 티스 에크 네크론 아나스테 페이스데손타이입니다.
눅 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이중의 폐단을 제시하며 부자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하나는 현재적 사실로 그들이 현재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글에서 지시하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미래의 가능성, 즉 요 11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죽음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서도 회개치 않은 것처럼, 누군가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사용하는 참신앙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브라함의 이 말은 이 비유뿐만 아니라 본장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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