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6장 산상수훈 중에서 주기도문의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어떤 기도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구원받았으니 하나님 앞에서 기도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 헬라어 강해(마 6:9-13)
9절은 후토스 운 프로슈케스데 휘메이스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하기아스데토 토 오노마 수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9
너희는 -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 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Carson).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 제자를 가리킨다.
이렇게 기도하라 -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후토스'로서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호 엔토이스 우라노이스) -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층 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왕상 8:27)과 편재성(偏在性, 시 139:8; 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 층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다(시 33:14;사 57:15;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 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아버지(파테르 헤몬) -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s, pp. 11ff).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only father)이시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 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 형태가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 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5:45).
(2)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 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 항-찬양과 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 뒤이은 4개 항-개인의 현실 문제)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 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시다(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레 19:2; 겔 36:23; 벧전 1:15).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고 했는데 하기아조 동사이다. 명령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의미다. 수동태는 하나님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loss)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 '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무흠(無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사 29:23).
10절은 엘데토 헤 바실레이아 수 게네데토 토 델레마 수 호스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입니다.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0
나라 -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거룩하시듯이 또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reign)가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28:10; 눅 21:27, 28; 계 21:1-8).
임하옵시며 -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 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고전 16:22;계 11:17;22:20). 엘코마이 동사이며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을 사용한다. 명령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시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 작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아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Jeremias, Prayers, p.9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 달라는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 26:42)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두 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했는데 기노마이 동사이다. 명령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3인칭이다. 명령법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간구이다. 과거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 예견되어 있다. 수동디포는 하나님의 뜻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아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
11절은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입니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1
오늘날(세메론) -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들이 기도되고 있다. 그중 첫째가 '양식'(bread)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란 뜻으로서, '매일매일' 또는 '날마다'라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로 보건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그날' 하루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지급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만일 며칠을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만 굶을 수밖에 없는 1세기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 자에게는 이 기도야말로 귀중하고 절박한 간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이를 '날마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본문의 오늘날이란 개념 속에는 '지금'이라는 뜻 외에 '바로 뒤 따르는'(immediately following)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된다.
일용할(에피우시온) - 이 단어 역시 그 의미가 좀 애매하며 또한 어원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이 단어는 흔히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제롬(Jerome)은 이를 라틴어 'Superstantialem'(뜻'물질을 초월하는', above material substance)으로 번역하여 그 양식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언어학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양식'은 실제의 음식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Luther). 한편 이 말은 전치사 '에피'( ...에 대하여)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동사의 변형으로 합성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또는 '매일의 생존에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용어이다(잠 30:8; 막 3:20; 살후 3:12; 약 2:15). 디도미라는 동사이다.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2인칭을 사용하였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달라는 의미다. 과거는 이렇게 매일같이 구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의미다. 우리는 육적인 양식도 구하지만 영적인 복음의 떡을 매일같이 구해야 한다.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의미의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 같이 비물질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6:34)을 전제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 수 있는 능력은 물론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신 8:18; 고전 4:7; 약 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부(富)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한다.
12절은 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피에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헤몬입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 신약성경에서 흔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는 '하마르티아'로서 어떤 목표에 미달(未達)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누가도 이 부분을 '하마르티아'로 기록하고 있다(눅 11:4). 그러나 마태는 이곳을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로 기록하였다.
아마 마태의 기록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은 것이고, 누가의 것은 2차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즉 누가는 온유적 의미가 담긴 빚이란 말보다는 그 뜻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빚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사하여 준 것 같이 - 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이다. 누가는 이곳을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눅 11: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대해 혹자(Jeremias)는 '우리가 사하여 주었다'는 뜻인 '아페카멘'을 완료 시제로 보지 않고 현재 완료형으로 보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 기회에 용서해 주오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 용서에 있어서 그 '공적'(deserts)과 '자격'(capacity)을 구분하여 해석한 모울(C.F.D. Moule)의 주장이 더욱 원문에 가까울 것이다.
즉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는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13절은 카이 메 에이세넹케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알라 뤼사이 헤마스 아포 투 포네루 호티 수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카이 헤 뒤나미스 카이 헤 독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아멘입니다.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6:13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사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약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 10:13;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Jeremias, Prayers, pp. 104-7). 그러나 본문의 시험(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 14:38; 갈 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고전 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알라) - 이는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反意的)인 접속사로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와 분명히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일곱 번째 기도)임을 보여 준다. 즉 이 '알라'라는 접속사는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바로 이어지는 간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사실 이어지는 간구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한 것이다.
악(투 포네루) - 이 말은 남성 또는 중성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중성으로 해석할 경우는 추상명사로서의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는 악한 자로서의 사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는 분명히 남성인 것으로 보인다(요 17:15; 살후 3:3; 요일 2:13, 14).
구하옵소서 - 이는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이다(엡 6:16; 요일 3:12). 우리는 사단 앞에서는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서 그를 이길 수 있는(4:1-11) 주님 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있사옵나이다 아멘 -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Doxology)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다.
한편 본문의 송영 자체는 신학적으로 심원하고 문맥상으로 적절하다. 특히 마지막 세 간구들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송영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송영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부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고, 성자의 속죄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며, 성령의 내주(內住)하는 능력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한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10절).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킬(12절) 권세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영광'이(9절)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앞의 주기도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본문의 송영은 전통 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낭송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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