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1장 성경말씀 중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온 이방인의 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의 죄와 타락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아담의 혈통으로 온 사람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인간이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시려고 예수님이 육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 전에 선택받은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뜻입니다. 이것을 이루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원죄가 사라지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온 이방인의 죄(롬 1:1-32)
1-7절, 문안 인사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였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신분이다. 그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이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또 자신을 그의 종으로 고백한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세상이나 돈이나 육신의 정욕에 종이 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와 주님이시다. 우리는 불평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즐거이, 즉시, 온전히, 절대복종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또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하였다. 사도(使徒)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명칭이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열두 제자들 중 가룟 유다가 배신했으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았다(행 1:26). 사도행전에서 단지 예외적으로 바나바에게도 사도라는 명칭이 두 번 돌려졌다(행 14:4, 14; 원어성경에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해설하고 선포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람들이며 영감(靈感)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자들이었다(엡 2:20).
그러므로 신약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 사도들에게로, 즉 그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성경만이 하나님의 바른 뜻과 진리를 확인하는 길이다.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혼잡되었었다. 어떤 길, 어떤 노선, 어떤 입장이 바른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한 사람의 신부이었지만 성경의 확실한 지식과 확신으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수 있었다. 다른 개혁자들도 그러하였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에도 참된 교회들과 종들은 오직 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구약성경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약속하였었다. 창세기 3:15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이나 창세기 12장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씨’나 창세기 49:10에 예언된 ‘실로’[안식의 사람]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예표의 말씀들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요 5:39; 눅 24:27, 44).
[3절]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씨, 자손]에서 나셨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인성(人性)과 참된 신성(神性)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본절의 ‘육신’이라는 원어(사르크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참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그의 몸만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이 아니고, 그의 인성(人性) 즉 그의 영육(靈肉)이 그러하셨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의 성취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예언들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 1:1)는 말로 시작된다.
[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성결의 영’(프뉴마 하기오쉬네스)이라는 말은 그의 속에 계신 거룩한 신성의 영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는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부활하심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기본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5:1-4,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 . .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반드시 확인하고 믿어야 한다.
특히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인정하다’는 원어(호리조)는 ‘확정하다, 선언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선언되셨다’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인정되고 확정되고 선언되신 것이다.
이 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을 증거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중심 인물이며 복음 자체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죄의 대속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이시다. 그는 슬픔과 불행, 절망과 허무가 가득하고 죽음의 어두움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과 영생과 기쁨과 소망이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예언되었고 주의 사도들에 의해 밝히 선포되시고 참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깨닫고 영접하고 믿고 온전히 따라야 한다.
[5-6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또 은혜는 사도의 직분에도 관계된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도 무자격한 자들이다. 사도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었다. ‘믿어 순종케’라는 원어(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는 ‘믿음의 순종을 위해’라는 뜻이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가 순종 곧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물론 행위로도 순종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지고 곳곳에 다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하였다.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교인들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무리 중에 들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부르심’은 성령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 이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 그의 양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만 그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
[7절]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평안]이 있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며 성도(聖徒,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된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진 무리들에 속한 자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기원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의 원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를 이루어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도 불가능했고 우리의 성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평안’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결과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기독교 복음 진리를 위해 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며 그것은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되어 있다. 우리는 배교의 시대에 성경으로 나아가 역사적 기독교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믿고 순종하는 것뿐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성화(聖化)를 이루고 또 하나님의 평안 가운데 거하여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누리다가 평안의 나라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자.
8-17절, 로마로 가기를 소원함
[8-10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먼저 로마의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널리 알려졌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우리의 감사의 이유도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형통과 번창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주위의 형제들이 구원받은 사실과 그들의 믿음과 믿음의 성장과 믿음의 소문의 주위에 퍼져나감을 감사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섬긴다고 표현하였다. 복음은 ‘그의 아들의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성부와 성자의 신비적 관계는 성부는 하나님으로, 성자는 그의 아들로 묘사된다. 성자는 참된 신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하나님으로 불리기보다는 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신다. 그럼으로써 성부와 성자의 인격의 구별이 증거된다.
바울은 또 ‘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표현한다. ‘내 심령으로’라는 말은 ‘내 영으로’라는 말이다. 영은 인격의 주체이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영혼에 자리 잡고 있다. 몸은 영의 도구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단순히 몸의 종교가 아니고 영의 종교이다. 몸의 행위도 거룩해야 하지만, 그것은 영의 표현이어야 한다. 우리의 중생한 영의 새 성향이 우리의 마음을 항상 주장해야 한다. 참된 종교는 심령의 종교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아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은 우리의 영에서 나오는 진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로 갈 좋은 길 얻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 혹은 저것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약 4:15).
바울은 그의 감사와 쉬지 않는 기도 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사역을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하며 또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
[11-12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서로의 안에 있는](원문)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이 로마로 갈 좋은 길 얻기를 기도한 이유는 그들을 보기를 심히 원하기 때문이며, 그가 로마 교인들을 보기를 원했던 목적은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다. ‘신령한 은사’는 예언, 방언 같은 은사들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들의 사역은 말씀 사역이었다. 이것을 통해 성도의 신앙과 소망은 어린아이의 시기를 벗어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자라며 견고케 된다(골 1:28-29). 오늘날 목사들의 사역의 목표와 임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강론이다.
바울은 또 서로의 견고한 믿음을 인해 피차 안위함을 얻기를 원하였다. 이것은 사실일 뿐만 아니라, 그의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사도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한다고 겸손히 말했다. 성도의 교제란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 서로 안에 있는 믿음을 인해 피차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살전 5:14). 이것이 영적 교제이며 교제의 유익이다. 우리의 교제는 단지 먹고 마시는 데 그치지 말고, 이렇게 같은 믿음의 확인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교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약간의](원문)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은 그가 로마로 가기를 원한 또 하나의 목적을 그들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한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전도와 영혼 구원의 열매를 포함한다. 그는 거창하게 많은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약간의’ 열매 즉 몇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또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열매는 로마 성도들의 인격의 변화와 선행을 포함한다고 본다. 우리의 인격의 온전함과 선한 행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다(갈 5:22-23).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였다. 여기의 ‘빚’은 전도의 빚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배운 자에게나 배우지 못한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우리나라 사람에게나 다른 나라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택함 받은 자들만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을 것이지만, 우리의 전도 대상에는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해야 한다.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함이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원하였다.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헬라어 원문은 ‘능력’이라는 말을 문장 맨 앞에 두어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도 이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오늘날도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다른 어떤 수단으로써가 아니고 이 복음으로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이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힘써야 한다.
또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까닭은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義)가 복음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다 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바이었고(신 6:25), 죄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다 행하지 못한 상태이었다. 이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 문제 곧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범죄함으로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은 모든 사람과 세상의 근본적 문제의 해결이다. 사람의 가장 큰 복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근본적 문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의(義)를 복음에 나타내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이루신 의(義)이다(단 9:24; 롬 10:4; 고전 1:30). 이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의(義)를 주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치인 것이다. 어떤 큰 죄인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를 구주와 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을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것, 곧 속죄 신앙이 구원받는 신앙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형제들의 믿음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고 또 그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는 우리와 그들의 물질적인, 세상적인 복을 인해 감사하는 것보다 믿음과 구원과 성화의 영적인 복을 인해 감사하자.
둘째로, 우리는 바른 말씀의 교훈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또 서로의 믿음을 인하여 안위함을 얻는 교제를 나누고 선한 열매 즉 인격과 삶의 변화를 이루자. 이것이 성도의 복된 교제이다.
셋째로, 우리는 빚진 심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의 영혼이라고 구원하기를 사모하자. 우리는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며 그 복음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은 사실을 깨닫고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널리 전하자. 오늘날도 참된 교회의 건립과 성장은 이 복음을 밝히 전하며 증거하고 또 신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충실히 강론하는 데 있다.
18-27절, 우상숭배와 정욕의 죄
로마서 1-2장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증거한다.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은 그들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다.
[18-19절]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나타남이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 바울은 죄인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죄인은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가로막는다. 사람들에게 진실이 있다면 죄는 죄로 드러나고 죄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겠지만, 죄를 감추는 곳에는 소망이 없다.
사람들의 죄는 불경건과 불의로 요약된다. 불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죄의 통칭이며, 불의는 모든 죄의 통칭이다. 물론, 불의는 불경건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의(義)요, 그것을 어기거나 지키지 못한 것이 죄이다. 죄들 가운데 불경건의 죄가 있고 이 죄가 근원적인 죄이다. 다른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불경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모든 사람 속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 알려주셨다. 이것을 하나님의 일반 계시라고 말한다.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오묘한 천지만물의 시작과 현재까지의 보존을 묵상할 때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원하심 즉 그의 신성(神性)을 깨닫게 된다.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자연 세계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신성(神性)의 증거가 확실하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신 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떨어졌기 때문에 진노하신다. ‘하나님을 알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인다. 무신론자도 전쟁 중에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신을 섬겨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의식하며 살지만, 그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또 그에게 감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미련하고 심히 어둡다. 천지만물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인생의 근본적인 무지(無知)요 어리석음이다.
[22-23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새들과 짐승들]와 버러지 형상[기는 것]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가 창조한 세계에 살면서 창조주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세상의 진행 방향과 목적에 대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천재적 사상가들의 결론은 바보들의 결론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을 다 무지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사람의 무지의 대표적 증거가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세계를 혼동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자존자시요 그의 영광은 썩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 세상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우상숭배는 불경건과 무지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불경건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라는 말은 불경건이 모든 정욕의 죄의 원인임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부도덕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도덕 갱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악을 떠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정욕의 죄 가운데 버려두셨다. 그는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구원하실 능력도 있고 그들을 버려두실 권한도 있다. 왜 자신들을 구원치 않으시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지금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고 자연 만물 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경건한 마음을 마음의 정욕과 더러움에 버려두셨다. 정욕의 죄는 불경건의 죄에서 나온다. 그것은 불경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추가적 징벌이다. 죄는 죄를 더한다. 불경건한 사회는 음란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징벌이다.
[25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바른 생각을 가리키고, ‘거짓 것’은 하나님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치했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생각을 우상의 생각들로 대치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조물을 조물주 대신 혹은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많은 사람이 우상 앞에 절하지만, 우상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죽은 조상들은 후손에게 복을 주지 못한다.
많은 현대인이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돈이 신이며 인간이 신인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는 병원 중환자실이나 장례식장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돈의 노예가 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을 위해 살며 또 자신만 의지하며 살다가 불쌍하고 허무하게 죽는다. 인간은 이런 헛된 것들을 극복해야 한다.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은 창조자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마음을 다해 그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26-27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사람의 죄들 가운데 두드러진 죄는 부끄러운 정욕의 죄 즉 음란의 죄이다. 바울은 여자들의 죄에 대해 말한다. 여자들은 자신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로 쓴다. 자신을 순리대로 쓴다는 말은 성년이 되어 결혼하여 정상적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며, 역리로 쓴다는 것은 정상적 결혼생활을 이탈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특히 여자들의 매춘 행위나 동성애 등을 가리켰다고 본다.
바울은 남자들의 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관계로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다. 이것은 남자 동성애를 가리킨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이렇게 심히 변질되고 부패되었다.
동성애의 죄악은 옛날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의 죄악이었다(창 19장). 또 옛날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런 동성애의 죄악이 있었다(레 18장). 또 고대 헬라와 로마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죄악이 보편적이었다. 시세로(Cicero)는 말했다. “[동성애의] 행위는 헬라인들 가운데는 보편적이었고, 그들의 시인들과 위인들 및 심지어 그들의 지식 있는 자들과 철학자들도 그런 일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자랑했다. . . . 그것은 어떤 특정한 도시들만의 풍습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풍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동성애에 대해 ‘상당한 보응’을 내리셨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유황 불비로 잿더미가 되었고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고대 헬라와 로마도 다 멸망했다. 오늘날 에이즈(AIDS)병의 유행은 현대 사회의 음란과 동성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보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경건한 자가 되어야 한다. 경건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두려워하며 그에게 합당한 경배와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께 돌려야 할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 불경건이다. 또 하나님보다 돈이나 세상의 것이나 육신의 쾌락이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 불경건이다. 오늘날은 심히 불경건한 시대이다. 성도들은 이 불경건한 시대에 참된 경건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한다. 모든 음란의 죄악들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 음란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최종적 심판은 불경건하고 음란한 세상에 임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과 더불어 멸망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해야 한다.
28-32절, 여러 가지 죄들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엔 에피그노세이)[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아도키모스 누스)[무가치한(BDAG), 부패한(NASB, NIV) 생각]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죄인들은 세상의 많은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가지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지식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지만 그들은 그 지식을 거절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무가치한 생각대로 내버려두셨다. 죄인의 생각은 하나님의 표준에 미달하고 무가치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절하는 자들은 결국 여러 가지 죄악에 떨어진다.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의 뿌리이다.
[29절] 곧 모든 불의, [음행](전통본문), 추악(포네리아)[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사람들에게는 모든 불의가 가득하다. ‘모든’이라는 말은 뒤에 나오는 ‘가득한 자요’라는 말과 더불어 여기에 대표적으로 열거된 죄악들의 다양한 종류들에 관계된다. ‘불의’(不義)는 모든 죄악들의 대표적 명칭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계명과 뜻에 일치하는 행위요, 불의는 그의 계명과 뜻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불의를 정죄하시고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원하신다.
또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음행이 가득하다. 음행은 인간관계의 죄들 중에 매우 크고 심각한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음행과 불결을 미워하시고 우리에게 거룩하고 단정한 삶을 원하신다.
사람들은 또 악이 가득하고 또 탐욕이 가득하다. 악은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물질적 해를 끼치는 것이다. 사람은 선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또 탐욕은 이 세상의 것을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다.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사모하며 그것을 더 가지려는 마음이며 그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이다(골 3:5). 성도가 영원한 천국을 참으로 믿고 소망하고 사모한다면 지나가는 이 세상의 것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사모하는 보화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은 하나님이요 장차 올 천국이다.
사람들은 또 ‘악의’(惡意)가 가득하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한다.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사람들은 또 ‘시기, 살인, 분쟁’이 가득하다. 시기는 교만과 함께 싹트고 미움과 함께 자라서 남과 다투며 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간다. 우리는 교만과 시기를 버려야 한다. 우리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하고, 남이 나보다 잘되면 축하하고 기뻐해야 한다. 또 진리의 싸움은 필요하지만, 그 외의 모든 다툼과 분쟁을 버려야 한다. 천국은 의와 진리 안에서 화평한 세계이다.
사람들은 또한 ‘사기(詐欺)와 악독’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인다. 이런 이기심에서 온갖 종류의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순복 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은 다른 이들을 위해 선한 마음과 행위를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은 또 ‘수군수군한다.’ 이것은 은밀히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남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하는 것이 사랑이며, 뒤에서 그에 관해 수군거리는 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또 그에 대해 말 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30절]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비방한다’는 말은 공공연히 남을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비방은 교만과 시기와 미움 등에서 나온다. 사랑은 이웃의 허물을 덮지만, 미움은 이웃에 대한 비난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관계에 금이 가고 가정이나 단체나 교회나 사회가 파괴된다. 사랑은 단체나 사회를 건설하는 덕이요, 미움과 비난은 그것을 파괴하는 악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라는 원어(데오스튀게이스)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사람은 왜 하나님을 미워하는가? 빛에 속한 자는 빛을 좋아하나 어두움에 속한 자는 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요 3:20). 악인은 하나님을 미워한다.
또 사람들은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이다. ‘능욕하는 자’라는 말은 영어성경에는 ‘멸시하는 자, 오만불손한 자’라고 번역되었다. 능욕, 교만, 자랑, 이 세 단어의 뜻은 서로 가깝다. 교만은 죄악의 근원인 마귀의 죄악이었고, 모든 죄인들의 특성이 되었다. 피조물이 자신을 주인과 왕으로 여기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요 왕이시므로, 교만은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요 매우 근본적 죄악이다. 거기서 남을 멸시함과 자랑이 나온다.
사람들은 또 악을 도모하며 계획한다. 이것은 실수의 악이 아니고 의도된 악, 계획된 악이다. 고의적인 악행은 실수로 범한 악보다 더 악하다. 부지 중에 범한 죄와 고의적인 죄는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또 부모를 거역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지 않은 많은 자녀들은 부모들을 거역한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성이다. 아이들은 엄한 징계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도무지 통제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어릴 때부터 징계의 매로 아이들을 교육하라고 말했다(잠 23:13-14). 사람의 부패된 인간성은 사랑의 징계를 통해 비로소 조금 제어될 수 있다(잠 13:24; 22:15).
[31절] 우매한 자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자요](전통본문) 무자비한 자라.
사람들은 우매하여 참 지식도 깨달음도 없다. 그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불행을 가져온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추구하여 얻지만, 참으로 알아야 할 지식, 곧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왜 여기 있으며 무엇을 위해 있는지에 대하여는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무지하고 우매한 인생의 모습이다. 과연, 이런 사람이 소와 말 같은 짐승보다 뛰어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배약(背約)하는 자’는 약속을 어기는 자, 불신실한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데는 부득이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의 불신실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쉽게 저버린다. 특히 사람의 불신실함은 시간에 대한 약속과 돈에 대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신실한 인격, 믿을 만한 인격은 약속을 하는 데도 신중하지만, 약속한 바는 반드시 지키려 한다.
‘무정한 자’는 인정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는 인정이 있어 보이지만, 환경이 조금만 악화되면 무정함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부모님을 저버리며 아내를 학대한다. 힘센 자는 약한 자의 것을 빼앗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입한다.
또 사람들은 원통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마음 깊이 오래 간직하고 잘 풀지 않고 심지어 보복하려 한다. 이런 마음 때문에 인간관계는 허물어진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와도, 그가 사과하면, 언제나, 즉시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하기를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무자비하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은 이기적(利己的)이게 변하였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교묘히 빼앗는다. 또 그들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악을 행하며 또 거칠고 폭력적이고 사악한 자들이 되었다.
[32절]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런 죄악들을 행하는 자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를 알고 있다. 이런 공의는 그들의 사회법들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고 그들의 양심의 법에도 반영되어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사망이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도덕 법칙이다. 죄인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영원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지 죄인들의 육체적 죽음 정도가 아니고 그들의 영육이 당할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계 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만 이런 죄악들을 행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더 가증한 뻔뻔함과 완악함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죄악 됨은 명백하고 충만하다. 모든 불의, 음행, 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고, 수군수군하고 비방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능욕, 교만, 자랑하고, 악을 계획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우매, 배약(背約),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무자비하다. 또 악행 하는 자들을 옳다 하는 뻔뻔함까지 있다. 이런 모든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임한다.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한다. 사람의 죄들은 어떻게 씻음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깨끗이 씻음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의 구원을 받고 이제는 모든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잠언 2장 주석 설교말씀] 지혜가 우리를 악에서 지킴(잠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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