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마태복음 6장 산상수훈 설교말씀] 천국 백성의 행위(마 6:1-24)

르호봇 2021. 6. 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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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6장 산상수훈 설교말씀 중에서 천국 백성의 행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구원은 하늘로부터 거듭난 상태입니다. 새롭게 태어났다면 성장을 해야 합니다. 성화는 성장 단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거룩한 천국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게 행동하거나 자만하여 나태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 백성의 행위(마 6:1-24)

 

(1) 보이려고 행치 않음 (6:1-18)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 그리스도뿐이다. 천국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있다. 그리스도는 천국의 성분이며 내용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하신다(6:1).

그리스도 아닌 어떤 사람이 그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이거나 기도이거나 혹은 금식이거나 간에 사람들에게는 보일 수 있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는 온전하지 못하다. 외식하지 않는 구제나 외식하지 않는 기도, 금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온전하고 그의 아들만이 온전하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외식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타나심이 아닌 것은 외식이다. 구제할 때에 남이 모르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오른손이 모르도록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도할 때 남에게 보이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금식할 때에 남이 모르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는 금식할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계시는 분이다. 은밀하다는 뜻은 "내부", "안에"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내부에 계신 분이다. 하늘 내부에 계시고 아들 내부에 계신다. 그러므로 밖에서 행하는 것은 온전할 수 없다. 온전하게 행하고자 하면 그것이 곧 외식이 되고 의롭게 행하고자 하면 곧 불의가 된다. 내부에 계신 하나님이 살아 나타난 것만 온전하고 그렇게 되도록 드려진 것만이 의로운 것이다.

이 사람은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할 때 남이 보는 데서 하더라도 외식이 아니며 소리치고 알리더라도 온전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행동은 외식이 없고 그들의 말은 불의함이 없다.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와 닭이 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기를 원하신다. 병아리를 만들지 말 것이며 닭을 키우지 말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껍질을 깨고 나와 병아리가 되고 닭이 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외식 없고 온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통하여 나왔다. 그는 하나님이 나오기 적합한 껍질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껍질을 깨지기 좋은 껍질로 만드신다. 야곱은 껍질이 두꺼웠던 사람이며 베드로는 거칠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깨고 나오셨기 때문에 그들이 드러났을 때도 온전했고 숨지 않았을 때에도 외식이 아니었다. 남몰래 구제한다고 해서 외식이 아닌 것도 아니며 숨어서 기도 한다고 해서 사람 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이 터져 나왔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사람들이 인정한다 해서 의로운 것도 아니며 보이지 않게 행한다고 해서 진실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 앞에 보이려고 자기 의를 행해도 안 되며 외식하지 않으려고 숨어 있어도 안된다. 전에 나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금식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다. 남몰래 구제하는 사람도 보았고 골방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를 터뜨리고 나오신 하나님만이 아들이요 실재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본다 해도 문제가 아니다. 나를 악하게 볼 사람도 있을 것이며 선하게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게서 터져 나온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선하게 보이든 악하게 보이든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선한가? 아니며 악한가? 진실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도구이고 그의 생명이 사는 몸일 뿐이다. 계란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은 닭의 알이고 병아리가 될 생명일 뿐이다. 그것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 놓는다고 해도 계란일 뿐인 것이다. 우리는 외식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존재다. 외식도 배운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도 배운 것이다. 배운 것이지 우리 자신은 아니다.

나는 외식할 이유도 없고 외식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나는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둘 자가 없고 산 위의 동네가 숨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드러날 것은 드러나고 알려질 것은 알려진다. 숨겨서 숨겨질 것도 없고 꾸민다고 해서 꾸며질 것도 없다. 나는 광명한 빛 가운데 서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기 전에 나는 빛 앞에 노출되어 있고 숨으려고 하기 전에 나는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나의 의를 행할 것도 없으며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거나 기도할 것도 없다. 나는 남에게 보일 의도 없고 구제할 재물도 없으며 남에게 보일 기도나 금식이 없다. 나는 남에게 보일 만한 것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숨길 것도 없다. 몰래 할 것도 없고 은밀하게 기도할 골방도 없고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머리에 바를 기름도 없다.

하나님은 하늘 곁에 계시지 않고 하늘 속에 계시며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고 생명에 있고 영에 있다. 나타나시는 분을 막을 자도 없을 것이고 숨으신 분을 끌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계시며 스스로 행하는 분이시다. 그가 아들로 나타나시기를 기다릴 뿐이다.

 

(2) 보물을 하늘에 쌓음(6:19-21)

 

세상 백성은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고 천국 백성은 하늘에 쌓아 둔다. 보물은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재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보물이며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명예가 보물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어디에 쌓아 두느냐 하는 문제다.

땅에 쌓아 두는 것은 내가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며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내게서 이미 떠난 것이다. 하늘에 쌓아둔 것을 내가 어떻게 내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은 보물을 가까이 두지 말라는 것이다. 보물을 하늘에 둔다면 그 보물은 하나님이 임의로 사용하실 것이고 나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보물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굳이 그 보물을 버릴 수 없거든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한다. 그러면 그 보물있는 곳에 자신도 거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중심)은 그의 보물 있는 곳에 그 보물에게 빼앗긴다. 그러므로 그의 보물 이상의 그 사람은 없게 된다. 가령 재물을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재물 이상의 사람이 아니다. 재물이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물 이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보물을 자기를 위하여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보물이 나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이라면 나는 누구이겠는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보물을 보면 될 것이다. 그 보물 있는 곳에 그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을 귀중히 여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람됨이 있다.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지으신 하나님이 땅에 보물을 쌓고 있는 사람을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 우리는 결코 보물을 땅에 쌓을 자가 아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다면 좀과 동록과 도적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것이다. 사탄에게 좋은 일을 해 줄 것이다. 땅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을 뜻한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모두 사탄의 것이다. 사탄은 주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끌고 가서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이면서 이것들을 내게 넘겨준 것이라고 말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탄에게 넘겨진 것들이다. 우리가 부지런히 그 보물들을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땅에 쌓는다면 사탄은 즉시 그것들을 넘겨받을 것이다. 결국은 그 쌓은 자의 것이 되지 않고 넘겨받은 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좀과 동록이 구멍을 뚫고 도적이 도적질 한다는 의미다. 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보물을 땅에 쌓고 있는 행위는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은 자기의 것으로 두는 것이며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두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그의 허락없이 가져올 수 없다. 보물은 하나님께 드리고 나는 갖지 않아야 한다. 내가 보물을 가지면 그 보물 안에서 나는 죽은 것이다. 나는 그 보물과 함께 있고 그 보물은 나를 대표하여 나는 그 보물의 종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중심은 보물 이상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지어진 하나님의 표현이며 대표자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신성한가! 세상의 그 무엇이 이보다 귀할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의 그 무엇이 이보다 보배로울 수 있는가! 우리에게 참 보배가 있다면 그리스도 뿐이다. 그는 나보다 귀하고 그는 나보다 영광스럽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 영광의 광채 시기(히 1:3) 때문에 그는 나의 보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도 나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가 나의 보화가 된 이후 나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를 위한 보화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재물이든 명예이든 혹은 성공이든 자랑이든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바꿀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앞에 있는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갈 뿐이다.

돈을 모아보려고도 했으며 정의를 지켜보려고도 했으며 내가 속한 단체(교파)를 위해도 보았으며 시무하던 교회를 위해서도 살아보았고 해 볼 만한 일을 두루 거쳐 보았으나 결국은 허사였다. 하마터면 내가 그것들을 위하여 지어진 사람처럼 살 뻔했다. 나는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 앞이 아찔하고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그것들을 위해 살 자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지어진 그의 표현이며 대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 받았고 부름 받았으며 구원받았고 영화롭게 된 자다. 나는 이제 절대로 그리스도 이하의 어떤 것에 내 중심을 둘 수 없다.

나는 보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 죽을 것이고 그를 위해서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위하여 내가 삼켜지기를 원하며 그에게 먹히기를 원한다. 나의 보물은 그리스도 뿐이다. 그가 땅에 있든 하늘에 있든 상관없다. 나의 보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하는 곳에 있는 그리스도다.

 

(3)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함(6:24)

 

사람은 지존자가 아니다. 스스로 자기 위치를 갖는 자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을 혹은 누구를 섬기는 존재다. 그의 섬기는 곳에 그의 존재가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너희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곳에 있다. 그의 섬기는 곳에 그 자신이 존재한다.

아담은 독처하려고 선악을 아는 지식을 먹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모두 독존하려고 한다. 선과 악을 아는 자로 자기를 존재케 하려고 했던 아담은 그의 피를 받아 그 원리대로 자기 위치를 세우려고 한다. 무엇에도,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매이거나 속하지 않으려 하고 거기서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한다. 인류는 부단히 이 자유를 획득하려고 투쟁해 왔다.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독존하려고 투쟁해 왔고 지금도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어느 하나에서 독립하고 자유하면 또 다른 하나에게 예속되며 노예가 된다. 물질에서 해방되려 하면 정신의 노예가 되고 정신에서 해방되려고 하면 영의 노예가 된다. 죽은 자 외에는 종 되지 않을 자가 없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고집한다. 그 사람의 어디엔가 반드시 고집이 있다. 이것은 그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에 매여 있는 것이다. 자기 재물을 팔아서 제자들 앞에 두면서도 일부를 몰래 숨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베드로는 "네 것을 가지고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성령을 속였느냐"라고 꾸짖었다(5:16). 자기가 무엇을 소유할 줄 아는 사람은 그의 소유에 종이 되어 있고 자기가 무엇을 버린 줄로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종이 되어 있다. 자신에게 매여 있는 것은 자신의 주장같이 보이지만 실은 고집인 것이며 그것은 종이 된 상태인 것이다.

모든 것에서 자유하려는 사람이 있고 어느 하나에서 자유하려는 사람도 있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은 자유를 원하고 자신이 주인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인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지으신 자가 있기 때문에 주인이 있도록 창조된 존재다. 내가 스스로 존재한다면 나는 지음 받지 않은 자여야 한다. 지음 받은 자가 어떻게 주인이 없을 수 있는가! 자기를 지으신 자를 모르는 인생은 자신이 독존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지으신 이를 모르면 자기 이하의 피조물에게 종노릇 하게 된다. 이것이 멸망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새로이 섬길 자를 찾는 것이다. 피조물을 섬기던 자가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으로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두 주인을 섬기는 문제가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섬기도록 애굽에서 구속된 백성이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세상에서 구속된 무리다. 이 사람들에게 두 주인을 섬기는 문제가 생겼다.

사람은 구조적으로 누구를 섬기든가, 무엇을 섬기든가 좌우간 섬기도록 지어졌다. 이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섬기는 자로서의 운명은 바뀔 수 없다. 그렇다면 섬길 자를 피하여 자존자가 되려 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섬길 자를 알아야 할 것이다. 누가 참 나의 주인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다. 잠언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잠 9:10) 하였다. 사람은 그의 섬길 자를 아는 것이 지식이며 섬길 만한 자를 섬기는 것이 지혜다. 어차피 시집을 가야 한다면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듯이 어차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복인 것이다.

주 예수님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는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어리석은 것이다. 자기는 이미 재물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은 그를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미 섬기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재물을 섬기지 못하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 결국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사실상 재물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재물을 섬기는 것은 재물의 종이 되는 것이다. 재물의 종이 되고 또 하나님의 종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셨다. 이 말은 땅이 아닌 더 안전한 곳에 보관하라는 말이 아니다. 돈을 집에 두지 말고 은행에 두라는 말로 들어서는 안된다. 집에 두는 것보다 은행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말로 들어서는 안된다. 너희 보물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로 듣는 자가 복 있는 자다.

이와 같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을 내 마음대로 한 주인을 택할 수 있다는 말로 듣지 말자. 우리는 주인을 택할 수 없다. 이미 주인은 정해져 있고 그 주인을 섬기지 않으면 주인 아닌 것을 섬기기 때문에 그것이 곧 멸망이라고 알아 들어야 한다. 사람은 주인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있다면 그것은 곧 멸망일 뿐이다. 아담의 선택은 그것 자체로 멸망이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멸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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