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빌립보서 3장 주일설교말씀] 바울의 포기된 자랑(빌 3:7-12)

르호봇 2021. 8. 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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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빌립보서 3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바울의 포기된 자랑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면서 앞을 보면서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뒤에 있는 일은 생각하지 않고 앞에서 하나님이 주실 부름의 상을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면서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했습니다. 우리도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의 포기된 자랑(빌 3:7-12)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념(信念)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또 하나는 신앙(信仰)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얼핏 보면 <신>이나 <신앙>이나 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념]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신앙의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의 의지력(意志力)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신앙이 없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력으로 살기가 일수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도대체 신앙이란 말 자체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약자들이 하는 변명이라고 말합니다. 대신 어떠한 경우에서도 <신념>만 있으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면 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말합니다.

 

신념의 사람은 자기를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외고집으로 나갑니다. 결국 고집불통입니다. 완악해지기 쉽습니다. 대쪽 같다는 평을 듣습니다. 얼핏 보면, 그런 것이 좋은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신념과 신앙은 별개의 것입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신념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철저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12 지파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바리새파에 속하였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이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신념은 철저한 선민의식과 함께 이방인에 대한 배타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하였고, 그러기에 자신의 의를 들어 내 보이려고 많은 사람들 앞에 더욱 열심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데반의 사건이었고, 다메섹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최대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모든 것은 변하였습니다. 지금껏 신념으로 살던 그가, 이제는 신앙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철저한 자기 신념의 포기였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용서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변하였습니다. 더욱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죄인 중 괴수라는 의식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검토해 보면, 바울처럼 아직도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음을 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생각> <자기주장>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도리어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이요, 하나님께 대한 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현장에서 바울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마땅히 이런 자들은 모두 잡아서 없애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굳은 신념 속에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잘못된 신념입니다. 과거, 동. 서양 진영으로 갈리어 이념투쟁을 하던 때를 상기해 보기를 바랍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갈라져 지금도 대립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인이 복음적 신앙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잘못된 종교적 신념으로 굳어져 있을 때, 그것이 제일 구제 불능이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 바로 바리새인들이었고, 서기관과 장로들이었고,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의식을 신앙보다 더 중요시하였고, 그러다 보니 율법의 가르침보다 장로의 유전을 더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 인간의 의지력! 자기주장이 결코 신앙이 아니건만, 그것을 마치 신앙화하려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컨대, 성경 말씀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려는 것보다, 어느 구절이 내 생각하는 바와 일치하는가? 어떤 성경 구절을 보고 내 생각의 주장을 관철시킬까? 만일 그렇게 성경을 보고 읽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신앙생활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고집일 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주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보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7:22-23).

 

무슨 말입니까?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였습니다. 또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법을 행한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저들은 자기를 내세우면서 예수의 이름을 이용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 예수 믿었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될까 심히 두려운 바가 있습니다. 정말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신앙인가? 아니면, 내 고집의 신념인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 봉사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으로 봉사하는가? 아니면 자기주장으로, 자기주장의 신념으로 하는가?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3:3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라]는 것은 자기 뜻을 버리고, 성령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즉 나의 생각과 주장은 이런 것이지만, 하나님이 시키는 것이기에 나의 생각과 주장을 포기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내 뜻이라면 안 하고 싶지만, 성령이 시키는 일이기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그런 뜻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8-9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김은 내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매우 귀중한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행위에서 난 의를 중시하고,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아니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난 의라고 했습니다. 즉 신념의 고집을 포기한 신앙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포기된 자랑>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믿음으로 무엇을 얻으려고만 하는데 바울은 신앙으로 포기한 것을 도리어 기뻐하고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행위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직도 자기라는 것이 너무 많이 있으면, 신념의 사람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의 사람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도 신념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비판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부흥회를 열고, 산상 수련회를 열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포기된 것이 없기에 변하는 것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좋게 여겼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다 포기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신념을 포기하고 신앙으로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을 보면,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아무리 교회에서 무어라 해도, 자기 고집대로 합니다. 자기 신념대로 합니다. 자기 포기는커녕,, 손톱만큼도 손해 보고는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에 조금이라도 틀렸다 싶으면 돌아섭니다. 목사의 말도, 장로님들의 권고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목회를 하면서 몇 사람에게서 이런 경우를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쭉 지켜본 결과, 공통적인 결론은,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신념의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변화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똑똑했으면 바울처럼 더 똑똑한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는 이제 얻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포기한 것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으로 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난 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통하여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란 세 가지가 있어야 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신앙의 사람은 푯대가 분명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사관이 확고해야 하겠다는 것이고,

셋째로, 포기된 자랑거리가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이미 생사 문제를 초월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포기한 것들로 자랑했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내가 신앙의 사람인가? 한 번쯤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그렇다면, 내게서 포기된 것으로 자랑할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혹시나, 아직도 자기 고집대로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생각대로 믿으면서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신앙의 사람은 변화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안 그것 때문에, 이전에 것들을 포기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흔적이 주 앞에 서는 날, 주께로부터 한없는 위로와 칭찬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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