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린도전서 1장 강해설교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 신앙을 하고 있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복음으로 돌아섰습니다. 율법을 전하지 않고 복음만 전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멸망당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선택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항상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열심히 듣고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도(고전 1:1-31)
1-3절, 문안 인사
[1-3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라서가 아니고 타인의 권면을 따라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그의 직분은 권위가 있었다. 또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그는 낙심치 않고 고난 가운데서도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3:2에서 감독의 자격에 대해 첫째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신앙 인격의 성숙을 말한다. 교회의 직분자는 회중 가운데서 가장 본이 될 만한 자들 중에서 선택되어야 한다. 학력이나 재력, 외모나 사회적 신분, 구변(口辯) 등은 교회 직분자의 참된 자격 요건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마음, 바른 성경 지식, 진실하고 덕스러운 말, 감사와 겸손, 인내와 충성 등 칭찬할 만한 인품이 참된 자격 요건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이며 교회에도 유익을 줄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를 택하여 보낸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핍박자 사울을 부르셔서 사도로 만드셨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 사역을 증거하는 일, 그의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직분자를 부르시는 몇 가지 증표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그 직분을 위한 마음의 강한 소원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3에서,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했다. 둘째는 그 직분을 위한 은사의 확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직분을 위해 은사를 주시고 준비시키신다. 그가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는 다르다(롬 12:6). 셋째는 회중들의 인정과 추천과 선택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일곱 집사를 택할 때 그들이 인정하는 자들을 추천하고 선택하였고 사도들은 그들에게 기도하며 안수하였다(행 6:5-6).
바울은 그가 문안하는 자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을 가리키지 않고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곧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벧전 2:9).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신약교회도 그러하다. 로마서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후원을 받는다는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교회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었다. 죄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심히 부패한 죄인들이며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다. 죄 없으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담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음 받게 되었다. 죄씻음과 거룩하여짐이 구원이다. 죄가 불행의 원인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이었고 죄씻음은 영원한 행복과 평안의 원인이다. ‘성도’ 곧 거룩한 자라는 이름은 사람에게 매우 귀한 명칭이다.
‘거룩하여지고’라는 원어(헤기아스메노이스)는 완료분사이다. 그것은 ‘거룩하여졌고’라는 뜻이다. 우리는 법적으로 거룩하여졌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속죄 사역과 의와 거룩을 이루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義)가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중세 시대에 가리어졌었으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던 성경적 복음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진리를 밝히 증거한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구원이며, 여기에 참 자유와 평안이 있다.
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문안하지 않고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문안하였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예수님을 68회나 ‘주’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주인, 소유자, 하나님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고백이며 그에 대한 복종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 이 고백은 사람이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은 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고 우리 모두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有無識), 피부 색깔을 막론하고 구원받아 주를 믿게 된 모든 이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가족이요 한 형제들이다. 여기에 우리의 겸손함과 열린 마음도 필요하다. 우리는 외적 조건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 받아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된 모든 자를 영접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죄사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평안은 은혜의 결과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는 평안의 길을 알지 못했었다(롬 3:17).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57:21).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 평안을 주셨다(마 11:28). 평안이라는 말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사회적 안정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말이다.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이 있다.
우리는 신앙 인격의 온전함을 사모하며 조금씩 이루어가고 또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범된 성도를 직분자로 세워야 한다. 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늘 사모하며 받자.
4-9절, 하나님께 감사함
[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에는 항상 감사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거기에 내포된 복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것은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의 이유이다. 비록 어렵고 힘든 세상의 현실에서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성도는 결코 낙심하거나 실패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롬 8:28).
[5-6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口辯)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과 지식의 풍족함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케 되게 하셨다. 기독교 진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 곧 그가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하신 것, 그의 많은 기적들, 그의 부활, 승천 등에 근거했다. 그것은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그 사실들이 긴 시대적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믿어지는 이유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의 책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 위에 근거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확신했다. 믿음은 확신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기 위해 누가복음을 썼다(눅 1:4).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면하였다(딤후 3:14).
[7절]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감사한 이유는 그들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모든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요소들이다. 믿음은 과거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을 믿는 것이며, 사랑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실천하는 것이며, 소망은 미래의 영광의 천국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성도의 소망의 첫 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 후에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또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의 삶의 원동력이요 위로이다.
[8절]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그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바울은 빌립보서 1:6에서도,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했고,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믿음의 주[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라고 표현하였다(히 12:2).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구속(救贖)하신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주께서는 피 흘려 사신 자들을 다 찾으실 것이며 그가 찾아 구원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롬 8:35). 성도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는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자로 훈련시키시고 보존시키실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담대함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고 날마다 더 가까이하며,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힘을 내어 죄와 세상과 사탄과 싸워야 하고, 또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 그가 한번 우리를 불러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셨다면, 끝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주를 대항하며 죄 가운데 살았을 때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면, 그는 우리가 지금도 부족과 연약이 많을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은혜 안에서 신실해야 하며 복종해야 한다. 우리도 변덕스러운 심성을 버리고 꾸준히 주님만 따르며 주님의 성품만 본받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되 특히 구원을 감사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 즉 성경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자. 그날에 우리는 성도들의 부활과 영광의 천국과 복된 영생을 보게 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주 예수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곧게 서며 그에게 복종하자.
10-17절, 단합을 권면함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형제들’이라는 말은 주의 제자들에 대한 겸손한 호칭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마 28:10; 요 20:17). 겸손은 성도의 큰 덕이다. 직분이 중할수록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서 다 형제이다. 직분자가 된 자도 형제들 위에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항상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겸손한 자에게 직분이 주어지며 그가 그 직분을 감당하려면 더욱 겸손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명령과 권위로’라는 뜻일 것이다. 골로새서 3:17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말했다. 바울은 명령하지 않고 권면하였다. 그에게는 명령할 권위가 있었으나, 그는 조용히 권면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겸손한 모습이다. 우리는 피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자.
바울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였다. 말은 생각과 마음의 표현이다. 생각과 마음이 다르면 말도 달라진다. 그러나 생각과 마음이 합하면 말도 같아질 것이다. ‘분쟁(스키스마)이 없이’라는 원어는 ‘분열이 없이’라는 뜻이다. 또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은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이라고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합하는 것이다.
[11-12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 문제가 분쟁의 문제이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을 따르는 자, 아볼로를 따르는 자, 게바 즉 베드로를 따르는 자가 있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였다. 교회가 아직 분열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교인들 안에는 이미 단합된 마음이 없었고 교인들끼리 분파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답지 않았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며 나뉘실 수 없는데, 그의 몸 된 교회에 어떻게 분파가 합당하겠는가?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바울의 이름으로 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 예수뿐이시다. 우리는 주 예수 안에서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며 일치 단합을 보여야 한다. 분쟁과 분열은 수치스러운 죄악이다.
[14-17절]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그리고 스데바나 가족에게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 물론 세례는 주께서 친히 명하신 의식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다(마 28:19).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은 주의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세례는 중요하지만 구원에 본질적이지는 않다. 즉 세례 받으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든지 세례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본질적인 것은 복음 신앙뿐이다. 사람은 복음에 대한 지식과 신앙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복음을 깨닫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한다(막 16:16; 요 3:36).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웅변과 수사학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으로 이루신 일이며, 그 속죄 사역으로 지금 죄인을 부르시는 일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은 생각과 감정과 판단이 참 부족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된 후에도 서로 간에 오해와 갈등을 가지며 분쟁과 파당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한 분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분열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일치하며 단합해야 한다. 지교회이든지, 한 교단이든지, 전체 교회이든지 파당은 좋지 않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실히 부르는 모든 믿는 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교회에 속한다.
그러면 루터교회나 개혁교회-장로교회나 침례교회 등 교파의 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교파는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이해력과 지식의 제한성 때문에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파는 이단과 구별된다. 이단은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을 부정하거나 왜곡시키거나 더함으로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치명적 오류를 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신적 권위성, 무오성, 하나님의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신성(神性), 처녀 탄생, 속죄의 완전성,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의 재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신칭의, 以信稱義), 죽은 자들의 부활, 마지막 심판, 영혼의 불멸, 천국과 지옥 등을 부정하거나, 또는 마리아 숭배,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는 것 등이다. 그런 이단들은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파는 이단과 다르다. 교파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어떤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인간의 이해와 지식의 차이 때문에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다 인정한다. 감리교회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킨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인간의 책임과 자유로운 결정을 인정한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성경은 어떤 구절들에서(요 3:16; 딤전 2:4, 6) 보편 속죄설을 말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개혁교회는 제한 속죄설이 논리 일관하다고 이해한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감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회개와 믿음에 근거하여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사람의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적 예정의 결과라고 이해한다.
교파들과 교단들이 많은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교회의 하나 됨에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비록 한 조직체이지는 못해도, 교회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한 혹은 잘못된 견해를 지적하되 다른 교파나 교단을 한 교회의 지체로 인정하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18-25절, 십자가의 도
[18절] 십자가의 도(道)(로고스)[말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독교 복음은 ‘십자가의 도(道)’ 즉 ‘십자가의 말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 죽음의 속죄적 의미가 죄인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구원 얻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거기서 돌이키며 구주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소식을 듣고 감사한 마음으로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 복음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19-21절]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케뤼그마)[혹은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전도의 내용뿐만 아니라, 또한 전도라는 방식도 가리키는 것 같다. 전도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내용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며 또 말로 전하는 방법도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뜻은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웅변과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구원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을 따라야 한다.
[22-23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헬라인](전통 사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기독교는 기적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늘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을 추구하고 강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기적주의와 은사주의의 풍조를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는 또 지혜를 구하는 종교도 아니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경험을 중시하는 것이 철학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복음과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자들이 있었다. 현대신학은 칸트의 지식론이나 실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을 인간의 이성적, 경험적 생각으로 혼잡시키고 변질시키려는 시도들을 경계해야 한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적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전파한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신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속죄적 의미가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있고, 여기에 성경적 기독교가 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했다(사 53:5-6). 예수께서는 친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셨다(요 6:51). 또 그는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바울은 본 서신 뒷부분에서 복음의 골자를 표현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였다(고전 15:3-4). 속죄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말씀은 기적을 원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하나님의 능력의 체험을 강조하지 않고 과거의 한 사건을 중요시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 복음이 현재에 죄인들의 죽은 영혼들을 살려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참으로 지금 구원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말씀은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의 논리는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논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가 죄씻음을 받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리적 형벌의 개념이다. 그러나 지식인은 책임적 행동을 강조한다.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논리는 그들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사람의 책임 있는 행동이 좋은 인격의 요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무리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심히 죄악되어서 이미 많은 죄를 지었고 또 날마다 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최선의 의로운 행위들이라는 것은 단지 더러운 누더기 옷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가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와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가 바로 그 방법이다.
[24-25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믿으라’는 초청이 아니고 ‘믿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중생(重生) 즉 거듭남이다. 그때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속에 깨달음을 주셔서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자신이 죄인인 것과 예수께서 구주이신 것을 깨닫고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거리낌이나 어리석음이 아니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최선의 방법이다.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며 가장 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최선의 생각보다 낫고 그 어떤 힘 있는 수단보다 낫다. 그것은 인간의 웅변적 말이나 수사학적 말보다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조금 감동시키는 정도가 아니고, 사람의 죽었던 영을 살리고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한다. 우리는 오늘도 전도와 설교의 효력을 믿는다.
오늘날에도 정통 기독교회는 기적주의와 이성주의 혹은 경험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의 도전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상을 경계해야 한다. 정통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으므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 속죄 신앙이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복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이 십자가의 말씀, 곧 속죄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해야 한다.
26-31절, 예수님만 자랑해야
[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형제들’이라는 말은 주 안에서 믿음의 한 식구를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 학력, 재산 정도를 뛰어넘는 말이다. 교회에는 높고 낮은 계급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이다. 여기에 ‘부르심’이란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부르심이다. 이것은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이다.
고린도 교회에는 육신적으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 정치적 권력이나 재력(財力)이 있는 자, 좋은 가문이나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만의 현상이 아니고 역사상 모든 교회들의 일반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야고보서 2:5,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4).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의 무지와 어리석음이지만 세상의 만족과 즐거움은 그를 어둡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은 비교적 믿음에 들어가기가 쉽다.
[27-2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중 다수는 과거에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다.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하는 자들이 아니고 좋은 학교 출신도 아니고 몸이 건강한 자들도 아니다. 세상적으로 존귀하거나 인정받거나 잘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주와 인간의 근원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고 도덕의 근거와 내용을 알게 된다. 이것은 지혜 중의 지혜이며 지식 중의 지식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세상의 빛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한 세상 속에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생활을 한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소망과 용기를 가진다. 그들에게는 평안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의 이러한 지식과 삶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또 죄의 결과로 많은 고생과 슬픔과 허무함 가운데 살고 있다. 사람의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지 말자. 우리는 자신의 지혜, 학벌, 외모, 가문, 자식, 실력, 업적, 재산 등을 자랑하지 말자.
[30-31절]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엑스 아우투)[그로 인하여,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아포 데우)[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중생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의 은택 안으로 들어가 그의 의와 생명 안에 거하며 그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죽은 영혼이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우리는 과거에 지혜가 없이 정신적 혼돈 속에 살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이 선과 진리인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우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혜가 되셨다. 그는 우리의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 의는 율법을 다 지킨 것을 말한다. 세상은 불의하고 죄악 되었고 의가 없었다. 죄는 영적 죽음, 육적 죽음, 영원한 죽음을 가져왔다. 죄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 그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가 되셨고 또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에게는 거룩함이 없었다. 죄악 된 세상은 더럽고 불결하며 거기에 사는 죄인들은 더럽고 불결하였다.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죽고 속이고 속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 모든 더러움과 불결을 다 씻어주셨다. 그는 우리의 주홍 같은 붉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씻어주셨다(사 1:18). 또 그는 우리를 위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되셨다(슥 13:1). 우리는 날마다 그 샘에 나아가 씻음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구속은 값 주고 사서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죄의 형벌로부터, 죄에 대한 법적 책임으로부터, 죄의 공포와 위협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들 때문에 지불해야 할 값을 다 지불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 위에서 그가 이루신 구속에 근거하며 그 구속의 결과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무지한 자들, 불의한 자들, 불결한 자들, 죄의 형벌과 공포 아래 있는 죄인들은 다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한다. 그들은 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죄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 된 것, 의인된 것, 성도 된 것, 천국 시민 된 것, 영생 얻은 것, 이것들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랑할 것밖에 없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우리는 예수님만 자랑하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실상,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4:7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했고, 또 고린도전서 15:10에서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부족했던 우리들을 구원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자.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우리는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지 말자.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만한 마음과 당파심을 가지고 다투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단합해야 한다.
[마태복음 헬라어 설교말씀] 예수님의 열 처녀 재림 비유(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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