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6장은 교회가 종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이 사라지면 사탄의 밥이 되고 맙니다. 성도는 복음을 듣지 못하면 거짓 복음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공격하더라도 방어할 수 있고 같이 공격할 수 있도록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이 없으면 힘을 잃어버립니다. 삼손이 머리카락이 잘리고 성령이 떠난 후에 힘을 잃어버렸듯이 교회도 복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떠나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의 소리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 오직 예수 오직 성경을 외쳐야 합니다.
마지막 종말 교회의 전투성(엡 6:1-24)
1-4절, 자녀들과 부모의 의무
[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는] 이것이 옳으니라[옳음이니라].
자녀들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의 내용이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쳐주신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생활 규칙이다. 이 규칙을 어기면 엄한 벌로 다스리라고 규정되었다. 신명기 21:18-21에 보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부모가 그를 성읍 장로들에게 내어주고 성읍의 모든 사람은 그를 돌로 쳐죽임으로써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을 제하라고 규정되어 있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를 보이고, 부모에 대한 순종의 한계성도 보인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방황했으나 이제는 목자 되신 주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므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녀는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은 주 안에서의 순종이어야 한다. 부모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수 없다. 그때에는 순종보다 불순종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행동일 것이다.
[2-3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자녀들은 자기들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을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사랑과 수고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 그것이 자녀로서 마땅한 일이다. 특히 부모 공경의 계명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서 “그리하면 내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약속하셨다. 사람이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잘 되고 오래 사는 복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본문은 자녀 교육에 대해 교훈한다. ‘아비들아’라는 말씀은 자녀 교육의 주체를 보여준다. 자녀 교육은 정부나 학교에 맡겨진 일이 아니고 심지어 교회에 맡겨진 일도 아니다. 자녀 교육은 부모에게 맡겨진 일, 그것도 아버지에게 맡겨진 일이다. 아버지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녀 교육의 책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완수해야 한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녀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을 포함한다. 비인격적 행위는 학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녀들을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무리하고 부당한 명령을 하거나 강압하고 위협하거나 감정적으로 때리는 행동 등이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 해가 되며 자녀들을 빗나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부모에게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고 겉으로나 가식적으로만 순종하는 이중적 인격이 되기 쉽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과 체벌을 가진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나 또는 엄격한 규율과 체벌이 전혀 없는 자유방임적 교육이 다 잘못임을 보인다. 부모는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교양’이라는 원어(파이데이아)는 ‘교육, 훈련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훈계’라는 원어(누데시아)는 ‘경고, 책망 등’의 뜻을 가진다. 우리는 주께서 성경에 가르쳐 주신 말씀을 따라 교훈하고 훈련하고 때때로 잘못을 경고하고 책망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부모는 자녀들이 잘못할 때 징계하고 체벌해야 한다.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늦기 전에]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 그것은 자녀로서 마땅한 의무일 뿐 아니라, 장수(長壽)와 번영의 약속이 있는 하나님의 계명이다. 이 계명은 인간관계의 계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부모 특히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자녀 교육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엄숙한 의무인 것이다.
자녀들의 순종과 부모의 바른 교육--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이다. 죄인들의 가정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마음이 부패되어 악하고 거역하며 배은(背恩)하며 거칠고 감정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은 죄악된 상태로부터 심령의 변화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들에게서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기대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부모에게 대해서는 좋은 자녀들 그리고 자녀들에 대해서는 좋은 부모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잘 믿는 자들은 가정 속에서 그 믿음과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5-9절, 종과 주인의 의무
[5-7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 교훈은 오늘날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직책상 아랫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종들은 주인에게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가?
첫째로, 그들은 주인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순종하라는 뜻이다. 주인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종은 그 주인에게 순종하기 어렵다. 종들은 주인을 향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참으로 순종할 수 있다.
둘째로, 그들은 주인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성실한 마음’이라는 원어(하플로테티 테스 카르디아스)는 ‘마음의 단순함, 성실함, 진실함’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른 곳에 두지 않고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진실하게 두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종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일을 성실하게, 진실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운 교훈이다. 육신의 주인이 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러나 종들은 육신적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순종해야 한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되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하는 것처럼, 사회에서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주인을 ‘단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이것은 세 번째 교훈에 대한 보충과도 같다.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하고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할 때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고 또 불평스러운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 순종하고 주를 섬긴다고 생각한다면 진심의 순종과 봉사, 즐겁고 기쁜 순종과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교훈대로 사회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직업의 현실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고 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8절]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우리의 선행은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의 보상은 단지 종교적 봉사의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세속적 직업에서의 선행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세상 직업에서 감사하게, 성실하게, 보람되게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보상은 마지막 심판 날에 주실 보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에서도 기대할 만한 보상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게 사는 자들에게 내세의 복뿐 아니라, 현세의 복도 약속하셨다(딤전 4:8).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위협]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종들에게만 두려움과 성실과 단 마음의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주인들에게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종들이 주인에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듯이, 주인들도 종들에게 합당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보인다. 그것은 주인들이 종들에게 이중적으로 행하지 말고 공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종들이 주인에게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듯이, 주인들도 종들에게 그와 같이 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들은 종들에게 정당한 책망과 경고를 할 수 있다.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고 자기의 분수를 모르게 될 수 있다(잠 29:21). 그러나 주인들이 종들에게 부당하고 무리한 책망이나 위협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인정 없는 윗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주인의 권위를 남용하거나 악용해서도 안 될 것이다.
주인들이 종들을 위협해서는 안 될 이유는, 모든 주인들의 주인, 크시고 높으신 주인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또한 너희 자신의 상전[주]’이라고 되어 있다. 하늘에 참 주인께서 계시다. 그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 앞에 살진대, 어떻게 주인들이 종들 앞에서 교만하고 부당하고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또 단순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단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들은 주인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그렇게 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들의 선행을 갚아주실 것이다.
둘째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고 공정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다스려야 한다. 주인들은 종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영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 크시고 참되신 주인께서 계시고 그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 교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직장생활에 적용된다.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단 마음으로 주를 섬기듯이 순종하고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또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위협하지 말고 부당하고 무리한 책망을 하지 말고 공정하게, 선하게, 겸손하게, 진실하게 대하며 그들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10-24절, 교회의 전투성
[10-11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힘이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 중에 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와 악령들과 그들을 돕는 악한 자들이다. 우리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힘과 강건함이 필요하다. 겁약한 군인은 작은 어려움에도 불안해하고 낙심하지만, 강하고 용맹스러운 군인은 불안하거나 낙심치 않고 용감히 싸우며 승리할 수 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강건해질 수 있는 방법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시 62:11).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들에게 힘을 주신다(사 40:28-2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마귀는 지혜와 능력이 있어 간교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함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져서 넘어지지 않고 이기고 서기 위함이다.
[12-13절] [이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대함임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본문은 성도들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 싸움의 성격이 어떠함을 보인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들이 아니고 이 세상 나라들의 권세자들과 그들 배후에 있는 악령들이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시조를 범죄 하게 한 이래 인류 역사상 계속하여 온 세상을 미혹하여 세상을 죄악 되게 하고 사람들을 죄 가운데 빠져 살게 했으며, 또 교회를 부패시키고 혼란시키려고 열심을 다하고 있다.
성도들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영적인 무장이다. 우리에게 그런 무장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탄과 악령들이 참된 교회들을 대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악한 날, 곧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날 또 환난과 핍박의 날이 올 때, 우리는 마귀의 시험들을 능히 이기고 주께서 명하신 모든 일을 다 완수하고 설 수 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는 자들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고 범죄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모든 성도들은 마귀와 악령들과의 싸움에서 패배치 않고 이기고 굳게 서게 될 것이다.
[14-17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엇인가? 첫째로,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것이다. ‘진리’는 ‘진리’나 ‘진실’을 다 의미할 수 있다. ‘진리’는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할 수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리띠를 띠어야 한다. 또 ‘진리’는 ‘진실’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지만,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의 특징이며, 거짓은 마귀 왕국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의 진실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면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의의 흉배를 붙이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나 우리의 의로운 행위를 다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이제 그 의 안에서 의만 추구하고 의롭게만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불의에 넘어지거나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들은 마귀와의 전쟁에서 지는 자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불의와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항상 의롭고 정정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셋째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 것이다. ‘평안의 복음’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복음이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 또 ‘평안의 복음’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는 복음이라는 뜻도 가질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또 우리는 이 화목의 복음을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넷째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 속죄 신앙이 중요하다. 이것이 복음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다. 우리의 행위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밖에 없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요일 5:4-5).
다섯째로,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리킨다고 본다. 투구를 쓴 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는 마귀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마귀의 밥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견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진다면 승리할 것이다.
여섯째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과 같다. 그것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구약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자는 칼 없이 전쟁에 나가려는 자와 같다. 그 전쟁의 결과는 보나 마나 실패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패의 삶을 살면서도 성경 읽기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배워야 한다.
[18-20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일곱째로,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마지막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라는 말은 어떤 문제에 대해 많이 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무시로’라는 원어(엔 판티 카이로)는 ‘항상’이라는 뜻이다.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을 암시한다. 과연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 중에 기도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마귀에게 휴전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귀는 결코 휴전하지 않는다. 그에게 휴전이란 없다. 마귀는 결국 기도하지 않는 이들을 자기 밥으로 삼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마귀를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는 마귀를 이길 것이다. 마귀는 기도하는 성도들을 무서워한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성도들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원을 받는 방법이다.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원문은 직역하면,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한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이다. ‘모든 인내로’라는 말은 기도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함을 보인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낙심치 말고 오래 참으면서 기도해야 한다(눅 18:1-8). 또 ‘깨어 있으며’라는 말은 기도가 곧 깨어 있는 일임을 증거한다. 기도하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이지만, 기도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자이다.
기도의 내용에 관하여, 본문은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선한 일이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이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을 위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지름길이다.
바울은 특히 지금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인 자신의 전도 사역을 위해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것은 복음 사역자들로 하여금 마땅히 전해야 할 복음 진리의 내용을 담대히 말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가리킨다. 복음 사역자들을 돕는 방법들 중에 기도보다 더 중요하고 좋은 방법은 없다. 설교는 영혼들을 구원하며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에(고전 1:21; 골 1:28-29),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을 위한 기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21-24절]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에게는 두기고 같은 진실한 동역자들이 있었다. 그는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며 바울의 모든 사정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충성된 일꾼들이 필요하다.
또 사도 바울은 다른 편지들과 달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 외에 ‘믿음을 겸한 사랑’을 기원하였다. 그는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축복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본문은 교회의 전투성 곧 성도들의 영적 싸움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와 악령들과 그들에게 속한 자들이다.
둘째로, 우리의 싸움의 목표는 지지 않고 이기고 굳게 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들 특히 복음 전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세상에서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의 싸움의 방법은 주 안에서와 그의 능력으로 강해지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마음의 진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정직, 하나님과의 화목과 마음의 평안, 믿음, 구원의 확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도로 무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특히 복음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택자들의 구원과 참 교회의 건립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기도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서 잘 무장하여 항상 승리하자.
[헬라어 성경 사도행전 설교말씀] 생명의 복음 말씀을 선포하라(행 5: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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