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린도전서 13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성령의 최고 은사 사랑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은사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능력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알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최고 은사 사랑(고전 13:1-7)
1절 에안 타이스 글롯사이스 톤 안드로폰 랄로 카이 톤 앙겔론 아가펜 데 메 에코 게고나 칼코스 에 큄발론 알랄라존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 카이 에안 에코 프로페테이안 카이 에이도 타 뮈스테리아 판타 카이 파산 텐 그노신 카이 에안 에코 파산 텐 피스틴 호스테 오레 메디스타네인 아가펜 데 메 에코 우덴 에이미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절 카이 에안 프소미소 판타 타 휘파르콘타 무 카이 에안 프라도 토 소마 무 히나 카우데소마이 아가펜 데 메 에코 우덴 오펠루마이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 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1-3은 은사의 목적을 설명하는 의미에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이 존재의 의의(意義)를 가지지 못한다고 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은사(恩賜)를 오용(誤用)하며 사랑은 없이 그것들 자체를 중대시하며 자랑하였다.
여기 본문에 있는 방언이나 예언 같은 것은 그때 초대 교회에 있었던 초자연적인 은사였다(Grosheide, De Openbaring God In Het Nieuwe Testament, p.186). 그들이 그 은사를 사랑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그것을 경계한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이 말씀엔, 사랑이 없이 그런 은사를 취급하는 자는 (1) 심령과 인격을 결여(缺如)한 도구와 같다는 의미도 있다. 인격적(人格的)인 것은, 사랑을 예상할 수 없는 쓸쓸한 세계에도 사랑을 건설한다.
인격은 미움을 미움으로 갚는 기계적 법칙에 예종(隸從)하지 않고 미움을 사랑으로 대하는 좋은 역리적 행동(逆理的行動)도 취한다. 현대는 기계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인간의 생활이 점점 기계화되고 마는 것은 유감이다. 인간은 기계를 초월하여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은 발달하나 사랑은 식어지고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 심령상 뜨거움이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위에 말한 대로 기계에 반대되는 요소 곧, 인격이라는 것이 자연적 인격(自然的人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으로 거듭나 진정한 사랑을 가진 인격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랑을 소유한 인격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 (2) 아무 의미 없는 소리라는 뜻도 있으니,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맹목적(盲目的)인 것이란 뜻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 말씀 역시 위에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말에 비하여 크게 다른 뜻을 가지지 않는다. 이 말씀도 역시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은사를 취급하는 자는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들도 모두 다 사랑을 가지고서야 그 의의(意義)를 성립시킨다.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선 사업과 같은 선한 일일지라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여질 때에는 그 행하는 자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신자는 남을 위하여 희생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올 줄 아는 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행하고, 혹은 어떤 명예를 위하여 행하고, 혹은 군중 심리(群衆心理)에 이끌려서 행하기도 한다. 그 행하는 일이 선한 일이지마는 진정한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 행동자 자신은 진정한 유익을 보지 못한다.
4절 헤 아가페 마크로뒤메이 크레스튜에타이 헤 아가페 우 젤로이 헤 아가페 우 페르페류에타이 우 퓌시우타이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이 두 가지 덕행은, 공격(攻擊)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여도 보복(報復)하지 않음이다. "오래 참고"란 헬라어 원어는 화를 내는 데서 멀리함을 이름이니, 곧, 격동성(激動性)있는 감정을 피함이다. 그리고 "온유"란 말은 친절을 베풀기로 준비된 태도이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성급한 사람이라도 이 두 가지 덕을 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1) 사랑은 수고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6,7).
여기 고전 13장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온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계된 사랑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을 생각하여 어려움을 참게 된다. 그뿐 아니라. (2) 사랑은 소망을 내포(內包)하기 때문에 참는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함께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망(贖罪的 死亡)은 그의 재림을 성립시켰다. 세상을 이기신 그는 장차 두 번째 오신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려 모든 난관을 참게 된다. 약 5:7,8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서 계시니라"라고 하였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여기 기록된 세 가지 말씀도 서로 연락(連絡)있는 한 뭉치이다. 이 셋은, (1) 자기와 남을 비교하여 경쟁(競爭)하는 심리로 범하는 죄를 범치 않음이고, (2) 명예주의(名譽主義)를 가지지 않음이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존경하는 것은 옳으나(빌 2:3), 나보다 우월하다고 섭섭히 여김은 투기이다. 의(義)와 선이 결핍(缺乏)한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한 의(義)와 선을 남이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것은 기쁜 일이지 섭섭한 일은 아니다. 남에게 있는 의(義)와 선도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救贖運動) 곧, 사랑에서 생겼을 것이니,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움직임이다. 그것들을 보는 나로서는 기뻐할 것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기독자는 자기 개인 문제(自己個人問題)의 해결을 그리스도 안에서만 기대한다. 그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독립인(獨立人)이니 자타 비교(自他比較) 혹은 경쟁의 의식(意識)부터 가지지 않는다. 기독자인 "나"의 구원 문제 기타 문제 해결이 "나" 자신의 진실한 믿음으로 관계된 그리스도의 힘에만 달렸고, 다른 사람들이 잘한 일에 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남의 잘한 일에 의뢰(依賴)할 것도 없거니와 간섭할 것도 없다. 투기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죄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는 독립인은 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기독자의 별명은 사랑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고, 그는 독생자의 속죄 희생(贖罪犧牲)을 받음에 따라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요일 4:9-11). 이와 같이 주님을 영접한 그는 주로써 자랑하나니,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한다(갈 6:4).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다 함은, 자기는 죄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주님으로만 광영(光榮)으로 여김을 이름이다. (1) 이와 같은 자랑은 주님만 자랑거리로 아는 심리인 것이니 만큼 그것은 믿음이다.
"교만치 아니하며". "교만"은 스스로 높아진 심리이다. 사라이 일단 스스로 높아지면 낮아지는 처세를 못한다. 그가 겸손을 힘씀도 실상은 높아지기 위한 심리로 그리하기 쉽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처음부터 높아지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하나님 아들이 적신(赤身)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낮아지심이니, 이와같은 속죄의 사랑을 받은 기독자로서는 교만할 수 없다. 이렇게 낮아진, 사랑의 소유자가 어찌 교만하랴? 죄는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 예수님은 그것을 씻는 이가 되신 셈이다. 이 사랑이 얼마나 낮아진 처지에서 실현된 사랑인가?
5절 우크 아스케모네이 우 제테이 타 헤아우테스 우 파록쉬네타이 우 로기제타이 토 카콘
고전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이 두 가지 말씀도 역시 서로 통함이 있는 한 뭉치이다. "무례"란 말은 합당치 않은 행함이다. 그것은, (1) 공중(公衆)을 위한 예의(禮儀)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고립(孤立)되어 자행자지(自行自止)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개인(個人)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 줄을 알아야 된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인륜상(人倫上) 질서도 더욱 강화(强化)할지언정 약체화(弱體化)시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으랴?(요일 4:21). 하나님을 공경 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15:5,6). 사람에게 대한 예의(禮儀)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敬畏)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 18:4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 하여, 양자(兩者)의 관련성을 암시한다. (2) 권위(權威)를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역시 "무례"에 속한다. 이 세상에는 권위라는 것이 있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이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된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敬畏)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 레 19:32에 말하기를,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하였다. 권위를 존경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 의식(尊敬意識)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增進)시킨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상습적(常習的)으로 개인적 유익 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벌써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온다. 그는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한다(욥 13:15 脚註).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 만 행한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自我)가 없어진 까닭이 아니다. 그에게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자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이다(행 20:35).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이 두 마디 말씀도 서로 유사(類似)한 방면을 가진 한쌍(雙)이다. 성내는 것이나, 악한 것을 생각함은 둘 다 악독한 심리를 발함이다.
성내는 것은 잠재(潛在)하였던 증오(憎惡)가 폭발(爆發)함이니 그것이 곧, 살인 독(殺人毒)이다. 분노는 남을 죽이려는 마음의 발작(發作)이다. (1) 이것은 영생의 생명운동을 방해하며(요일 3:15), (2)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서 내쫓으며(요일 3:17), (3) 분노하는 자 자신이 죽는데 나아간다(요일 3:14). 남을 죽이려다가 먼저 자기를 죽이고 만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요일 3:16에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다. 성내는 죄를 이기는 비결은 무엇인가? (1) 남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할 때에 분노하나,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될 것은 이것이다. 곧, "내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을 책임까지 있는데 그 형제의 그만한 괴롭힘을 당하지 못하랴"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지니는 생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입으로는 받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그것을 받지 않은 자처럼 행하면 안 된다. 말로만 믿는 다하고 행위로 그렇지 않으면,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정성스럽게 받지 않는 불행이다. (2) 분노를 이기는 또 한 가지 비결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음에 있다.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간절히 원할 때에 받아진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령하였다(엡 5:18). 특별히 성내기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성질 하나가 자기를 망치는 줄을 깨닫고 그것 하나 고치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약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기독자가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에 가해자(加害者)에게 복수(復讐)를 안 할 뿐 아니고 그 받은 손해를 생각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벧전 4:8에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은 속죄(贖罪)의 사랑은, 사죄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이 어찌 복수 사상(復讐思想)을 가지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그의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이었다(롬 5:10). 리차드.윌렘손(Richard Willemson)은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아 얼음 가운데 피하였다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이 얼음 가운데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건져주었다.
6절 우 카이레이 에피 테 아디키아 슁카이레이 데 테 알레데이아
고전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1) 불의는 하나님의 원수이니,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가 그것을 기뻐할 수 없다. 시 5:4에 말하기를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의(不義)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사 53:4-6) 신자 된 우리가 어찌 불의를 기뻐할 수 있을까? (3)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배척하며 떠날 그때에 바로 참 기쁨은 신자의 마음속에 온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하반절 (下半節)은 뒤이어 말하기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한다. 이 말씀 뜻은, 복음 진리가 좋아할 바(복음 진리가 가르친 선과 의)를 기뻐한다는 뜻이다. "진리"는 여기서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골 1:5;엡 1:13;갈 5:7;살후 3:13,14;요 1:17). "함께"란 말은 "진리"란 말을 인격화(人格化) 한 경우의 용법(用法)이니, 성령께서 진리를 통하여 인격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런 표현법이 나왔다.
그런데 이 기쁨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1) 그것은 물론 몸의 건강을 위하여도 유익하다. 그러나 (2) 그보다도 그것은 영적(靈的)으로 유익하니, 기쁨이 있어야 믿음과 감사가 증진(增進)되고 또한 모든 덕을 힘 있게 피곤함이 없이 실행하게 된다.
7절 판타 스테게이 판타 피스튜에이 판타 엘피제이 판타 휘포메네이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1) 기독 신자와 모든 것. 여기 "모든"이란 말이 네 번 나온다. 속죄함을 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은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믿는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롬 8:32).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7). "만물이 다 너희(신자들)의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신자들)의 것이요"라고 하였다(고전 3:21,22).
그러면 속죄의 사랑을 입은 사랑의 사람, 곧, 기독 신자는 무엇이든지 결국은 자기에게 복될 줄 아는 것인 만큼, 그는 그 모든 일에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딘다. 한 번은 어떤 배가 파선되어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죽고 한 사람만 남았다. 그가 바닷물 위로 표류(漂流)하다가 필경 한 무인도(無人島)에 상륙하여 조그마한 초막(草幕)을 지어 가지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먹을 것을 잡으려고 섬에 돌아다니던 중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막이 불붙어 버렸다. 그러나 불붙는 연기 때문에 멀리서 다른 배가 그 연기를 신호(信號)로 알고 와서 그 외로운 사람을 건져 주었다.
그래스 사스(Grace Saxe) 부인은 외국 선교사로 가기를 작정하고, 타고 갈 기선을 정하고 떠날 시간까지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 부인은, 자기 부친이 병들었기 때문에 정한 날자대로 떠나지 못하여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러나 후에 알려진 대로 그 타려던 배가 가다가 파선당하여 승객(乘客)은 모두 다 죽었다.
(2) 저렇게 모든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 기독자는 모든 역경과 고난에 대하여 보는 방법이 불신자와 다르다. 기독자는 평안한 일들에 있어서도 인내와 소망과 신앙을 지키지만, 모든 역경과 고난 그 자체도 자기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줄 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롬 5:3,4).
기독자가 역경과 고난을 잘 이기어 지나간 뒤에 하나님의 상급이 오는 것을 믿는다(약 1:12). 그는, 자기를 위하여 독생자의 보혈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까지든지 실패하지 않을 줄 믿는다. 이 믿음으로 그는 어디까지든지 참으며, 이 믿음으로 바라보며 견딘다. 그의 이 생활은 비상(非常) 한 일, 곧, 큰 희생이나 순교 행위가 요구되는 경우에만 지향(指向)된 이상(理想)이 아니다. 그의 이 생활은, 여기 "모든 것"이란 말이 보여줌과 같이(고전 13:7),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실시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 이와 같은 승리 생활을 하면, 비상한 희생이나 순교의 승리는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독자가 일상생활에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비상한 생활이나 순교의 때가 와도 그 기회에는 참여하지 못한다(Lenski). 일상생활의 모든 어려움에 있어서, 기독자인 나는 참나니, 그 참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기쁜 맛있는 일이고, 키니네 교갑을 씹지 않고 그냥 통으로 삼켜 넘김과 같은 지혜 있는 일이다. 또 나는 믿나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시어 구원하여 주신 까닭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자로서는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 복이 될 줄로 믿는다. 나는 바라본다. 그 이유는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실과 마찬가지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뻐하면서까지 이 약속을 바라본다(벧전 1:3,4). 나는 모든 것을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견디라고 명령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인 것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동하여 나에게 유익이 될 줄을 아시는 주님은,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명령은 무거운 짐이 아니고 도리어 복된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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