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시편 42편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내 영혼아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영혼이 낙심이 되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요단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너무나 힘이 드니 하나님이 멀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너무나 큰 시련과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라는 탄식이 나도 모르게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이 시편을 통해서 다시 힘을 얻고 나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힘을 내어 일어나 주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려드려야 하겠습니다.
내 영혼아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6-11)
6절 엘로하이 알라이 나페쉬 티쉐토하 알 켄 에즈코르카 메에레츠 야르덴 베헤르모님 메하르 미츠아르
시 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42:6
요단 땅 - 이 언급은 현재 시편 기자가 거하고 있는 장소를 가리키거나 그가 그 장소밖에 나와서 회상투로 언급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Anderson). 그러나 처소격 조사 '민'이 '요단 땅'에 부착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전자가 옳은 것 같다. 이 요단 땅은 당시 잡목과 빽빽한 숲이 우거진 곳으로 동물들이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렘 49:19).
헤르몬 - 정확하게는 '헤르몬 땅'으로 헤 몬 산이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여기 '헤르몬'은 복수형 '헤르모님'으로 되어있는데 그 이유는 헤르몬 산이 몇 개의 정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헤르몬이 언급된 이유는 이곳이 팔레스타인 북동쪽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요단 근원 동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미살 산 - (메하르 미츠아르). 직역하면 '작은 언덕'이다. 이곳은 커다란 헤르몬 산맥의 어느 작은 곳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시편 기자가 도피 족에 거처로 삼았던 특정한 지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요단 땅으로부터 그리 먼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7절 테홈 엘 테홈 코레 레콜 치노레이카 콜 미쉐바레이카 베갈레이카 알라이 아바루
시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42:7
주의 폭포 소리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바다 회오리 소리'이다. 여기서 '폭포'에 해당하는 '치누르'는 본 용어를 '수구'(水口)로 번역하고 있는 삼하 5:8과 이곳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을 해내기가 어렵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를 대홍수, 폭포, 수로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며 또한 혹자는 하나님의 처소 주위에 있는 두 개의 큰 물줄기라고 번역하기도 한다(Driver). 그러나 바로 앞절에 요단이 나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요단 강물 줄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저자가 엄청난 물줄기가 아닌 한낱 작은 강줄기를 바라보면서 대홍수, 폭포, 바다 회오리로 번역이 가능한 용어인 '치누르'를 사용한 것은, 곤경에 처하여 있기 때문에 모든 환경이 자신을 꾸짖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작은 물줄기의 소리'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크게 꾸짖는 큰 소리로 들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물줄기의 근원이나 소속이 주님임을 밝히는 '주의 폭포 소리'라는 표현을 미루어 볼 때 당시 저자는 고통을 허락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 (테홈 엘 테홈 코레). 직역하면 '깊음이 깊음을 부르며'이다. 여기에서 '테홈'은 파도, 큰 물덩어리, 홍수 바다 등을 의미하는데(36;6 ; 창 7:11 ; 신 8:7 ; 욥 28:14 ; 38:16, 30 ; 겔 31:4) '주의 폭포 소리를' 근거로 볼 때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 해변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바위가 많은 요단 강 골짜기에 부딪히며 요란스럽게 내려오는 '요단강의 급류'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바다'의 이미지와 '강'의 이미지와의 조화는 종종 큰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근원인 강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고대 신화에서 간접적인 근거를 찾을 수 있다(Driver). 이 은유는 하반절의 '엄몰하도소이다'를 통해 암시되었듯이 고통과 재해의 묘사인 것 같다. 또한 깊음과 물들은 항상 잠재적 파괴력으로 간주되어 왔음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의 묘사는 아주 적절하다 하겠다(71:20 ; 104:6, Anderson).
8절 요맘 예차베 아도나이 하세도 우발라옐라 쉬라흐 임미 테필라 레엘 하야이
시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낮에게 여호와는 그의 자비를 명령하실 것이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 혹은 은총을 명령하거나 지시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 언급된 '낮'(요맘)이란 용어는 분명히 번성을 암시하기에 본 구절에는 언젠가 번영의 시기가 돌아올 것이라는 저자의 기대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절대 자포자기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기대는 하반절과 같은 결과, 즉 재앙의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본절의 '낮'과 '밤'을 '낮과 밤'이라는 하나의 합성어로 보아, 즉 '항상'으로 해석하여 본절을 하나님이 항상 그의 인애를 보이시리라는 저자의 확신을 나타내 주는 구절로 보기도 한다(DeWette).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려면 하반절의 '찬송하다'나 '기도하다'를 '하나님이 인애를 보이신다'로 해석해야 하는데 이 같은 견해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 상반 절에 비추어 볼 때 '심지어 재앙과 슬픔의 어두운 밤에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비록 역경의 때이지만 마음속에 위안이 있고 위안이 감사로 바뀌고 감사가 찬양으로 바뀔 수 있는 근거는 과거 하나님이 인애를 베푸셨듯이 미래에도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욥 35:10 ; 행 16:25, Barnes).
9절 오므라 레엘 살르이 라마 쉐카흐타니 라마 코데르 엘레크 벨라하츠 오예브
시 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42:9
내 반석 - 이는 '하나님'과 동격 관계에 있는 명사인데 직접 화법을 시작하는 호격 명사로 볼 수도 있다(나의 반석이시여, 어찌하여... 70인 역). 이 용어는 시편에서 여호와를 가리킬 때만 사용되고 있다(18:2). 그런데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는 이 용어를 본 문맥에서 특별히 사용한 것은 파도와 물결(7절)과 극명한 대비가 되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Driver).
어찌하여 - 이것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지금 겪고 있는 혼란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13:2 ; 22:1 ; 77:9).
잊으셨나이까 - 저자는 자신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잊혀지고 버림을 당한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 중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탄식을 내뱉었던 것이다. 이러한 탄식은 시편에서 종종 발견된다. 한편, 22편의 이와 동일한 표현은 메시아적 예언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슬프게 다니나이까 - 여기서 '슬프게'를 가리키는 '코데르'는 '카다르'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용어는 탁류처럼 '흙탕물이 된'(욥 6:16), 더럽고 오염된 의복이나 베옷을 걸치고 '이리저리 다니는'(38:6 ; 욥 5:11 ; 렘 14:2), 햇볕에 그슬린 피부처럼 '더럽고 먼지가 낀듯한 색깔의'(욥 30:28), '검은'(왕상 18:45 ; 렘 4:28 ; 14:2)등을 뜻한다.
이상 의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단어는 내적인 상태가 아닌 외적인 상태, 그것도 굉장히 어둡고, 슬프고, 처량한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슬프게 다닌다'는 본 구절은 고통으로 인한 저자의 외적인 슬픈 상태에 대한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10절 베레차흐 베아츠모타이 헤르푸니 초르라이 베오므람 엘라이 콜 하욤 아예 엘로헤이카
시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 (브레차흐 브아츠모타이). 자세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을 해내기는 힘든 구절인데 여기에서 '칼'에 해당하는 원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그런 뉘앙스를 담은 단어가 전혀 없다) 일차적으로 개역 성경의 번역은 원문적이지 못하다.
개역 성경은 여기 '레차흐'를 '칼'로 번역했는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죽이는', '도륙하는', '산산이 쪼개는', '부셔버리는' 등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구약에서 이곳과 겔 21:22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정확히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겔 21:22에서 '도륙'이란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중시하여 70인 역(LXX)은 '멍듦'으로, 벌게이트역(Vul-gate)은 쪼개다'로 루터(Luther) '죽음'으로 각각 이 용어를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에 대한 주요 역본 및 주요 주석가들의 이와 같은 번역을 종합하고 이 말 뒤에 나오는 '아츠모트'의 뜻이 '뼈들'인 사실을 고려할 때 본 대목의 일차적인 번역은 '나의 뼈들에게 죽을 것 같은 상처를 주려는 것 같이'가 무난한 것 같다. 사실 그의 대적들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조롱하듯 물었을 때 시편 기자는 마치 그 뼈가 쪼개져 그 통증으로 인하여 죽을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었다. 그러기에 이 구절에 나타난 저자의 태도는, 자신의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어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이 상하지 않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준다.
11절 마 티쉐토하히 나페쉬 우마 테헤미 알라이 호힐리 레로힘 키 오드 오데누 예슈오트 파나이 베로하이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11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 본절은 5절과 그 내용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차이가 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5절의 '그 얼굴의 도우심'이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으로 바뀌었고 5절에 없던 '내 하나님'이 내 얼굴을 도우시는 바로 뒤에 첨가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으로 살펴볼 때 결국 차이의 핵심은 '내 얼굴'. '내 하나님'이란 표현이 대변하는 바 5절에서 보다 좀 더 명백하게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리라는 확신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5절에서 낙망 중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구하시리라는 확신을 일단 피력한 뒤에도 계속해서 낙망하였던 저자는(7-10절) 다시 한번 동일한 확신을 본절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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