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헬라어 강해 중에서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시는 예수님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가셔서 우리가 거할 천국의 처소를 준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죽고 하나님 나라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천국에 가시지 않으면 우리가 거할 처소가 준비되지 않으니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거처가 모두 마련되면 다시 이 땅에 재림하셔서 나를 영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데리러 오셔서 나를 영접하시고 하나님이 있는 곳에 나를 데리고 가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정혼한 사이입니다. 주님과의 혼인 기약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는 주님과 혼인하여 영원히 천국에 신랑과 살게 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다른 신랑을 섬기면 안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여 다른 신랑을 섬기게 되면 안 됩니다. 주님과 정혼한 사이이기 때문에 신랑이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슬기로운 처녀처럼 등과 기름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시는 예수님(요 14:1-4)
1절 메 타랏세스도 휘몬 헤 카르디아 피스튜에테 에이스 톤 데온 카이 에이스 에메 피스튜에테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예수님의 별세에 대한 말씀(13:33)을 들은 제자들은 근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그들더러 "근심하지 말라"라고 하신다. 그의 이와 같은 권면은, 이 아래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진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을 믿으라, 또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또 예수님 자신을 그만큼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고 믿으라는 뜻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보며 일체로 본다(5:24, 10:30, 14:9, 12:44).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하심은, 그가 일찍이 그들에 주신 내세훈(來世訓)(12:26, 13:36)을 믿으라는 뜻이다. 다음 절 하반에, 일찍이 주셨던 그의 내세훈이 다시 관설된다.
2절 엔 테 오이키아 투 파트로스 무 모나이 폴라이 에이신 에이 데 메 에이폰 안 휘민 포류오마이 헤토이마사이 토폰 휘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여기 "거할 곳"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모나이인데, 이것은 영구한 저택(邸宅)을 의미하는 바, 하반절의 "처소"라는 말과 다르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나이 곧, "거할 곳"은 구약 시대에도 늘 있어오는 것이니,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설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비하실 "처소"는, 본래부터 있던 아버지 집의 "거할 곳"에 신자들을 수용할 자리이다. 그곳에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 곧, 구속 사업의 완성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 번역은, 원문의 문구를 괄호 구로 취급하고 번역한 것이다. 그 뜻은, 만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사실을 그들에게 벌써 말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문구를 그 아래 호티로 시작되는 문구와 연속시켜서 의문(疑問)의 말씀으로 읽음이 더욱 문법적이다.
그렇게 하면 그 문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라고 일찍이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있을 곳을 예비하시겠다고 한 말씀은, 12:26, 32에 포함되었다. 어쨌든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천국 신앙을 강조함이다.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준비된 천국을 믿고 바라보는 신자는, 벌써 천국에 들어가 있는 듯한 생활을 한다"라고 하였다(Those who look for a heaven made ready will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in heaven-Notes from my Bible, p. 141).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에 조급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 사람들이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관설된 내세 소망이 유대적 기독교의 색채를 가지지 않고, 개인 본위로 말하는 노시스주의(靈智派)의 신화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 465). 곧, 요한복음의 내세관(來世觀)이 노시스 사상에서 말한 것(영혼이 하늘 세계에 올라간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의 말씀이 물론 신자의 별세 후 그 영혼이 하늘 세계에 감을 말하지만, 노시스 사상에 있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노시스의 내세관은 범신론적이며, 유출설에 속한다. 한스 조나스(Hans Jonas)는, 노시스 사상이 말하는 영혼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떨어져 내려온 부분이라"라고 하였다(Gnostic Religion p. 44) 헬미티즘(Hermetism) 문헌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분산된 것이니 이는 마치, 광선이 태양에서 분산된 것과 같다고 한다(Libelius, p. 12 ).
따라서 노시스 사상에서 말하는 영혼의 승천은, 그것이 질적으로 하나님과 다시 연합을 의미하는데, 점차 성화되어 올라간다는 것이다(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pp. 45, 166). 이 같은 사상이 헬메티즘(Hermetism)문헌에 있다(Libelius 1:25-26).
거기 있는 말을 보면, 별세한 영혼이 7 층 세계를 통과하여 결국 하늘에 이르러 성화되어 신화(神化)된다고 한다. 그 말을 소개하면 이렇다. 곧, "승천에 대하여 내게 말하시오"하니 포이만드레스(Poimandres)가 대답하기를 "내 몸이 용해되면 나는 하늘들을 통과한다. 첫째 하늘은 일이 증가되기도 하고 감손되기도 하는 곳이요, 둘째 하늘은 모든 악한 계획들이 있는 곳이요.
셋째 하늘은 사람을 속이는 정욕이 있는 곳이요, 넷째 하늘은 교만이 다스리는 곳이요, 다섯째 하늘은 거룩지 못한 용기와 담력이 다스리는 곳이요, 여섯째 하늘은 부하기를 원하는 악한 욕심이 있는 곳이요, 일곱째 하늘은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거짓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이다. 영혼이 이 모든 하늘들을 지나서 여덟째 하늘에 있는 본체에 올라가 그 본래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완성이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노시스 사상은 인간의 자력 구원을 말하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러나 요한의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단독 역사(役事)로 말미암는 구원론이다. 요 14:2 이하는, 실상 구약 사상(시 49:15, 73:24)에 근거한 것이다. 볼트만(Bultmann)의 신환 제거(Demythologizierung) 주의는, 실존주의적인 해석 방법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쓰는 말은 대부분 신화(神話)라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사람의 언사로 표현될 수 있다.
3절 카이 에안 포류데 카이 헤토이마소 휘민 토폰 팔린 엘코마이 카이 파랄렙소마이 휘마스 프로스 에마우톤 히나 호푸 에이미 에고 카이 휘메이스 에테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절 카이 호푸 에고 휘파고 오이다테 카이 텐 호돈 오이다테
요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14:3,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예수님께서 일찍이 자기를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많이 말씀하셨다(8:19; 10:1, 7,9,37,38, 12:26, 44,45,49,50; 마 11:27, 28). 다음 구절(6절)은 그곳을 명백히 가리켜 말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이라고 하였다.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인 고로 그들은 편하게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길 되시는 주님 자신은, 그 길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큰 고생을 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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