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원문 설교강해 자료

[마태복음 3장 헬라어 주석강해]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식(마 3:13-17)

르호봇 2021. 3. 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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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3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공생애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사생애 기간은 요셉과 함께 했고 이제는 공생애의 시작은 성부 하나님과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 있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계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이 내렸고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식(마 3:13-17)

 

13절은 토테 파라기네타이 호 이에수스 아포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피 톤 이오르다넨 프로스 톤 이요안넨 투 밥티스데나이 휘프 아우투입니다.

마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3:13

이때에(토테) - 세례 요한의 등장(1)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요단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의 바로 그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아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듯이(11)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법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53:4-6) 위함이다.

14절은 호 데 이오안네스 디에콜뤼엔 아우톤 레곤 에고 크레이안 에코 휘포 수 밥티스데나이 카이 쉬 에르케 프로스 메입니다.

마 3: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3:14

말려(디에콜뤼엔) -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보는'(콜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30년 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일(눅 1:39-45) 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 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 간접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 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 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 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아 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 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 ''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2)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 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튼 요한이 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 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

15절은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이에수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톤 아페스 아르티 후토스 가르 프레폰 에스틴 헤민 플레로사이 파산 디카이오쉬넨 토테 아피에신 아우톤입니다.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3:15

이제 허락하라 -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허락하라는 단어가 아피에미이다. 놓아주다는 뜻이다. 명령법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주님이 세례 요한에게 명령하여 반드시 세례를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과거 시제는 이미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공생애의 사역이 시작될 것이 작정되었다는 의미다.

여기서 '이제'(아르)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백성들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아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아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 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예수께서 ''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 순종의 자,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53:13-53:12)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 그러나 ''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 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가장 적당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아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 받는(42:1-9; 49:1-6; 50:4-9; 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눅 12:50).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 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아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도래했음과 메시아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 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16절은 카이 밥티스데이스 호 이에수스 아네베 유뒤스 아포 투 휘다토스 카이 이두 아네오크데산 아우토 호이 우라노이 카이 에이덴 토 프뉴마 투 데우 카타바이논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이 엘코메논 에프 아우톤입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16

예수께서... 곧... 올라오실새 - ''(유뒤스)'올라오실새'(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 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오실새'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밥티조'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7:4; 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 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오실새'는 비둘기같이 '내려'(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하는 것 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늘이 열리고(아네오크데산 아우토) -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환상들(64:1; 1:1; 7:56; 4:1; 19:11)을 연상시킨다. 문법은 직설법 현재 능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직설법은 하늘이 실제로 주님이 세례를 받을 때 열렸다는 의미다. 현재 시제를 사용했으니 그 당시에 열렸음을 말한다.

고대 신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 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라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에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롭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비둘기같이(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 수도 있다.

누가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 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 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예수의 참 인간으로서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 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1:2;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 기름 부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30(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17절은 카이 이두 포네 에크 톤 우라논 레구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입니다.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3:17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 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 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였던 영()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 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틀어 히브리어로 '바트콜'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지금까지 있어 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 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포네)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 받는 종의 노'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노래한 시 2:7변형 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고난 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를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 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 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 같은 하나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랑하는'(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다음에 나오는 '기뻐하는'(유도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인 측면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아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 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여호수아 히브리어 주일설교] “헤렘을 손대어 저주받은 아간”(수 7:16-21)

안녕하세요. 오늘은 여호수아 히브리어 주일설교 중에서 하나님의 헤렘을 손대어 저주받은 아간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헤렘은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말합니다. 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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