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25장 헬라어 강해] 달란트 비유(마 25:14-30)

르호봇 2021. 3. 3. 15:08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달란트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열 처녀 비유 다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는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라면 달란트 비유는 자신이 받은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면서 살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각자의 재능이 있습니다. 이 재능을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받은 재능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달란트 비유(마 25:14-30)

 

14절은 호스페르 가르 안드로포스 아포데몬 에칼레센 투스 이디우스 둘루스 카이 파레도켄 아우토이스 타 휘파르콘타 아우투입니다.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5:14

(가르) - 이 등위 접속사는 새롭게 시작되는 달란트 비유가 바로 설명 한 열 처녀 비유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즉 종말적 심판에 관한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내용이 같은 것이라는 점을 예측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 이 구절은 막 13:34의 문장과 같은 형식이다. 막 13:34은 마가복음서의 종말론에 대한 결론부로서 그것이 본 달란트 비유의 도입부가 되고 있.

또 막 13:35는 마 25:13, 즉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암시한 종말 교훈의 결론이 되는 '깨어 있으라'는 구절이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막 13:34, 35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사람'은 같은 평행 비유인 눅 19:12-27을 보면 왕위를 받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는 귀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헤롯이 분봉왕(분봉왕) 책봉을 받기 위해 오래도록 로마에 있었던 사실이나, 아니면 당시 상업을 하던 부호들이 먼 무역 여행을 위해 오랜 기간 집을 떠났던 사실에 근거한 비유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같은 일상적 사실을 암시한 것이기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이 땅에 성육신(Incarmation)하셨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할 일을 맡기시고 승천하셨다가 다시 이 땅에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타국에 갈제'(아포데몬)란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입니다. 어떤 주인이 지금 먼 나라로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자신의 소유를 각각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자기가 살던 곳에서 '막 떠나려 할 제' 또는 '해외로 가려할 시점에'라는 뜻을 갖고 있다. 눅 19:12은 이와 유사하게 '먼 나라로 갈 때에'로 번역되어 있다.

그 종들을 불러 - 여기 '종들'(둘로이)은 그 주인의 전적인 소유였으나, 여기서는 하나의 인격적 친근감을 주는 그야말로 주인과 동등한 위치로서의 신분을 암시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그 '종들'은 여전히 주인의 권위 아래 놓여 있.

한편 이 '종들'은 상징적으로 주의 승천 이래로 당신의 교회를 책임질 복음 사역자들 및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 고대 사회에서 종들은 그들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권한과 책임이 있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종들에게 자기의 동업자처럼 각각 소유를 나누어 준다. 한편 여기서 '소유'(휘파르콘타)란 '재산', '소유물'이라는 뜻이며 본문에서는 주로 ''을 가리킨다.

''은 그들 각자에게 적당하게 '맡겨'질 것이지만 여전히 그것에의 원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즉 비록 '종들'의 노력과 지혜로 많은 이윤(이윤)을 남긴다 하더라도 그것의 범적 소유권은 여전히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필연적으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15절은 카이 호 멘 에도켄 펜테 탈란타 호 데 뒤오 호 데 헨 헤카스토 카타 텐 이디안 뒤나민 카이 아페데메센 유데오스입니다.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카타 텐 이디안 뒤나민) - 이 말은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인은 종들에게, 소유를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하였음을 말해 주는데 이것은 불공평에 의한 공평의 원리를 실현하시는 그분의 지혜를 반영한다(7:4-9).

이러한 재능에 따른 배분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인은 맡김을 받은 청지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소유 곧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성격, 지식, 교육, , 환경 등은 근본적으로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최선을 다해 잘 관리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2) 사람마다 능력과 재능에 따라 소유가 맡겨졌다는 것은 저마다 고유의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말이고, 또한 그것은 각각 소중하고 존귀한 것임을 말한다. 각 사람마다의 개성과 창조적 능력은 다양하지만 그것은 각각 독특하게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재능에 따라 적합한 소유가 맡겨졌다는 믿음은 각각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그 일을 맡긴 주인에 대한 충성의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 '달란트'라는 말은 구약시대에는 무게의 단위로 쓰였었는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무게와 화폐의 단위로 동시에 쓰였다.

본문의 경우에는 화폐의 단위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무게 단위가 화폐 단위로 발전된 것은 금이나 은을 저울로 달아서 상품 값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달란트를 화폐 단위로 취급했을 때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엄청난 가치가 된다(1 데나리온은 노동자 1일 품삯에 해당).

이것은 눅 19:11-1에 언급된 '므나'(1므나 = 100 데나리온)와는 큰 차이가 있다. 한편 본문의 비유를 통해 '달란트'는 보통 상징적 의미로 '재능'을 뜻하게 되었다. 실로 각자의 독특한 재능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인 것이다.

떠났더니 - 주인은 자신의 권위와 지혜로써 분배를 마친 후 더 이상의 염려나 망설임 없이 자기 길을 떠났다. 이것은 주인의 그 종들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 행동인 동시에 그 종들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는 행동이다.

16절은 포류데이스 데 호 타 펜테 탈란타 라본 에이르가사토 엔 아우토이스 카이 에포이에센 알라 펜테 탈란타입니다.

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25:16

장사하여 -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다. 에르가조마이라는 동사로서 직설법 과거 중간디포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바로 가서 실제로 장사를 했다는 의미다. 자신의 재능을 썩히지 않고 바로 장사했다는 말이다. 과거 시제는 주인에게 이미 받은 다섯 달란트를 의미한다. 중간디포는 중간태와 능동태가 합쳐진 문법으로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바로 장사하여 자신에게 유익을 주었다는 의미다.

17절은 호사우토스 카이 호 타 뒤오 에케르데센 카이 아우토스 알라 뒤오입니다.

마 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25:17

남겼으되 - 두 달란트를 주인에게 받은 사람도 즉시 가서 장사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다. 케르다이노라는 동사로서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실제로 두 달란트를 남겼다는 의미다. 과거는 열심히 장사했기 때문에 두 달란트를 남길 수 있었다는 의미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께 남겨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18절은 호 데 토 헨 라본 아펠돈 오뤽센 엔 테 게 카이 아페크륖센 토 아르귀리온 투 퀴리우 아우투입니다.

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25:18

땅을 파고...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 돈을 땅에 파묻어 두는 것은 그 당시의 돈을 보관하는 방법이었다. 13:44에서 천국 비유를 말할 때 '밭에 감추어진 보배'라고 묘사하는 바와 같이 땅 속 보관은 당시 안전하게 재산을 보관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

여기서는 앞서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위험을 안고 장사를 한 두 종에 대비시켜 모험을 두려워하는 안전제일주의의 소심한 종을 묘사하고 있다. 실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적극적인 범죄나 사취(詐取)가 아니었다.

그는 1 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고의(故意)로 그 재능을 묵혀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그는 주인을 위한 적극적 충성과 봉사를 등한히 한 것이다. 실로 진취적인 봉사 의식의 결여는 곧 소극적인 범죄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또한 그의 불충한 죄의 동기(動機)를 언급하자면 적어도 그는 상대적 빈곤 의식 때문에 주인이 맡긴 '1 달란트'의 가치를 무시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19절은 메타 데 크로논 폴륀 에르케타이 호 퀴리오스 톤 둘론 에케이논 카이 쉬나이레이 메트 아우톤 로곤입니다.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5:19

오랜 후(메타 데 포륀 크로논) - 여기서도 종말적 심판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표현은 5절과 24:48'더디 오다'(크로니조)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쓰여졌다.

물론 이 같은 '오랜 후'라는 시간적 감각은 순전히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실로 천년이 하루 같으신(벧후 3:8, 9) 그분께는 영원한 경륜(經綸)의 한 부분일 뿐이다.

주인이 들어와 - 이 말은 '너희 주가 임하다'(24:42), '인자가 오다'(24:44), '인이 오다'(24:46)라는 표현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는 것이다.

저희와 회계할새(쉬나이레이 로곤) - 18:23에서와 같이 종말적 심판을 상업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Deissmann). 이 상업적 용어는 종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장사로 비유하였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실로 심판과 재림의 주께서는 종말의 심판 때에 지상에 거하는 모든 종들의 사역 결과를 놓고 회계(會計)실 것이다(고후 5:10 ; 20:11-15).

주여 내게... 주셨는데 -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가 활용하여 두배의 소득을 올린 그 소유의 출처가 주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여준 주인을 항상 의식하며 성실히 일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소유의 어느 하나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밝힌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보소서 내가... 남겼나이다 -이는 '내가(에고)라는 말이 강조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단지 주인의 맡긴 바 임무를 성실히 감당한 종이 자신의 성실성을 인정해 줄 주인에게 그 이윤을 펼쳐 놓으면서 외친 기쁨의 탄성(歎聲) 일뿐이다(고전 15:58).

20절은 카이 프로셀돈 호 타 펜테 탈란타 라본 프로세넹켄 알라 펜테 탈란타 레곤 퀴리에 펜테 탈란타 모이 파레도카스 이데 알라 펜테 탈란타 에케르데사 에프 아우토이스입니다.

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0

주여 내게... 주셨는데 -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가 활용하여 두배의 소득을 올린 그 소유의 출처가 주인인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여준 주인을 항상 의식하며 성실히 일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나타낸 것이. 그리고 자신이 지닌 소유의 어느 하나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밝힌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보소서 내가... 남겼나이다 - 이는 '내가'(에고)라는 말이 강조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단지 주인의 맡긴 바 임무를 성실히 감당한 종이 자신의 성실 성을 인정해 줄 주인에게 그 이윤을 펼쳐 놓으면서 외친 기쁨의 탄성(歎聲) 일뿐이다.(고전 15:58) 우리도 주님이 오시는 날 회계할 때 많은 것으로 남겨야 한다.

21절은 에페 데 아우토 호 퀴리오스 아우투 유 둘레 아가데 카이 피스테 에피 올리가 에스 피스토스 에피 폴론 세 카타스테소 에이셀데 에이스 텐 카란 투 퀴리우 수입니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5:21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더 이상의 칭찬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극진한 주인의 칭송(稱頌)이다. 특별히 '잘하였도다'는 뜻의 헬라어 부사 ''종의 지난 노력에 대한 주인의 다함없는 만족과 인정의 표시였다.

그리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26절의 '악하고 게으른 종'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그 종의 온 인격이 무흠(무흠)하거나 완전하다는 뜻이기보다 그 주인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특히 '착하다'(아가도스)는 기능적 측면에서의 올바름을, '충성되다'(피스티스)는 윤리적 측면에서의 신실성을 강조한 칭찬들이다. 정녕 선()과 충성은 주인의 시험을 감당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었다(Wycliffe).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 이 구절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림을 받은 이후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말은 역시 주인의 관심, 즉 회계(會計)의 내용이 투자에 대한 이윤이 얼마나 되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충성하는 자세임을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주인이 맡긴 5 달란트는 상당히 많은 액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주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미미(微微) 한 것이었다. 여하튼 종말적 심판의 때에 성도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일을 했고,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에 있지 않고, 순간순간 매사에 얼마나 성실했는지에 있어야 한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 이 구절은 작은 일에 충성한 종에게 돌아가는 보상 내용이다. 물론 이 보상은 주인의 회계 이후에 주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현세적이기보다는 내세적인 것이 분명하며, 또 그 보상이 돈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일을 맡기는 것이다. 카디스테미라는 동사인데 직설법 미래 능동태 단수 1인칭이다. 직설법 미래 시제를 사용한 것은 주인이 많은 일을 더 맡기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열심히 한 사람에게 더 많은 일을 앞으로 맡기신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이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가 더욱 신뢰감으로 깊어졌다는 것이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參豫)할지어다(카란 투 퀴리우). 여기서 주인의 '즐거움'(카라)(1) 열 처녀의 비유에서 처럼(10) 주인이 와서 벌이는 천국 잔치로 볼 수 있다(19:9). 따라서 이 견해를 따르자면 우선 그 종이 천국 또는 영생에 들어가는 것과 그 주인의 초대를 받을 만큼의 영화로운 신분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천국은 잔치와 같은 축제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2) '즐거움'은 주의 영광스러운 현현(顯現)이 제공하는 넘치는 기쁨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충성된 자로 인정된 사람은 주의 영광에 참예하여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16:11 ; 21:6).

22절은 프로셀돈 데 카이 호 타 뒤오 탈란타 라본 에이펜 퀴리에 뒤오 탈란타 모이 파레도카스 이데 알라 뒤오 탈란타 에케르데사 에프 아우토이스입니다.

마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절은 에페 아우토 호 퀴리오스 아우투 유 둘레 아가데 카이 히스테 에피 올리가 에스 피스토스 에피 폴론 세 카타스테소 에이셀데 에이스 텐 카란 투 퀴리우 수입니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5:22, 23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참예할지어다 - 셈어의 특징인 반복 기법을 사용하여 20, 21절의 내용과 거의 흡사한 칭찬과 약속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동일 내용의 보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심판주의 회계 기준은 은사와 능력의 크기에 있지 않고 그 맡은 바에 대한 성실성과 충성도에 있다는 점이다.

한편 주인은 두 종에게 모두 '많은 것'을 맡길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두 종이 똑같은 양의 '많은 것'을 맡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로 천국은 획일적인 평등주의(equalitarian)의 실현장(실현장)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능력과 충성이 모두 인정되는 곳이다.

24절은 프로셀돈 데 카이 호 토 헨 탈란톤 에이레포스 에이펜 퀴리에 에그논 세 호티 스크레로스 에이 안드로포스 데리존 호푸 우크 에스페이라스 카이 쉬나곤 호덴 우 디에스코르피사스입니다.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 주인이 주관하는 회계의 현장에는 충성된 자이든 불충분한 자이든 모두가 나아와 주인의 판결에 응해야 한다(고후 5:10). 한편 여기 '달란트 받았던 자'(호토 엔 탈란톤 에이레포스)의 시제가 완료능동태 분사로서 아직 그에게 '한 달란트'만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 여기 '굳은'(스크레로스)라는 말'박정하고 포악하며 거칠다'는 뜻으로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무서운 분'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같은 평행 비유 눅 19:21에서 나오는 '엄한 사람'(아우스테로스)이라는 단어보다 더 강경한 뜻으로 쓰인다(6:60 ; 26:14 ; 3:4 ; 1:15).

여하튼 종은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세워 결국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遺棄)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주인의 인격을 매도하는 더 큰 죄를 주인 앞에서 범하였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 주인을 매우 질이 나쁜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는 광적이면서 투자하는 데는 아주 인색하며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불로 소득을 얻는 파렴치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아마도 이 비난 속에는 자신이 다른 두 종들보다 훨씬 적은 양을 받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은근한 화를 분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Derrett).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호덴 우 디에스코르피사스) - 이는 추수한 곡식을 마당에 늘어놓고 말린 후 키질을 하여 겨를 헤쳐서 곡식을 모으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즉 좋은 주인을, 키질하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알곡(재산)을 모으려고 하는 불로 소득자로 비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좋은 주인, '굳은 사람', '심지도 않고 거두는 사람', '헤치지 않고 모으는 사람' 등으로 비난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 비난이 한 달란트를 받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인 앞에 나온 게으른 종 자신에 대한 묘사이다.

즉 이 본문은 자기변명을 통하여 자기 모습을 묘사하는 우화적(寓話的)인 문학적 표현 방법이다. 그러므로 종의 주인에 대한 비난은 모두 종 자신의 게으르고 완악한 심성의 고백적 표현으로 보면 된다(26; 눅 19:22).

내가 알았으므로(에그논 세) - 이는 제 2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경험을 통해 익히 알아오고 있었다는 뜻이다. 실로 그는 자신의 왜곡된 판단을 근거로 주인의 품격을 극도로 모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25절은 카이 포베데이스 아펠돈 에크륖사 토 탈란톤 수 엔 테 게 이데 에케이스 토 손입니다.

마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5:25

두려워하여 - 이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즉 너무 엄격한 주인이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여 본전도 돌려주지 못할 때 엄격한 주인에게 당할 벌이 무서웠던 것이다. 실로 이 종은 소심하고 진취적이지 못한 용기 없는 사람인 동시에 자기 생명과 안녕에 대해 강한 집착을 지녔던 자이다.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 종은 자기 나름대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돈을 보관한 것이다(18). 평행 본문인 눅 19:20에서는 수건에 싸 두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두 표현 모두 맡겨진 돈을 아무 일에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여기서 게으른 종이 무엇을 하여 모험을 감행할 의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 이는 표면적으로는 자기가 주인의 원금(元金)에 아무런 손해도 끼치지 않고 잘 보존해왔다는 뜻이지만, 실상은 '내 할 바를 다했으니 당신은 내게 아무런 꾸중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뜻의 무례하고도 원망 섞인 불평이었다.

즉 주인이 자기에게 맡겨준 것을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보관을 위해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실히 활용하여 그에 따른 이윤을 남기라고 맡겼음을 알지 못했다. 소유를 맡겼을 때는 그 소유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기의 것이나 다름없이 성실하게 애정을 갖고 그 달란트를 맡아야 했었다.

26절은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퀴리오스 아우투 에이펜 아우토 포네레 둘레 카이 오크네레 에데이스 호티 데리조 호푸 우크 에스페이라 카이 쉬나고 호덴 우 디에스코르피사입니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5:26

악하고 게으른 종아(포네레 둘레 카이오크네레) - 여기서 '악하고'(포네로스)는 '성가시게 굴음', '무가치', '악독한'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게으른'(오크네로스)은 '지체하다', '둔하다', '머뭇거리다'의 뜻을 가졌다. 따라서 전체적인 의미는 주인의 의도에는 전혀 무신경하고 자기 안일에만 심취하여 결국 주인에게 해가 된 무익하고 무가치한 종에 대한 묘사이다. 이는 21, 23 절에 이미 제시된 바 '착하고 충성된 종'과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나는...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이 구절은 앞서 종이 주인에게 변명한 내용에 대해 반문하는 것이다(24). 이 반문의 의도는 주인인 자기 자신이 절대로 종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악질적인 구두쇠나 부도덕한 사람이 아님을 밝히는 데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게으른 종에게 그렇게 반문함으로써 도리어 그 내용이 종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즉 이 문장을 끊지 않고 계속 연장시켜 본다면, '그렇게 악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라는 말이 나을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평행 구절인 눅 19:22은 이와 같은 의미를 분명하게 해 준다. 즉 누가복음에는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라는 문장이 삽입되어 종의 변명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심판 선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7절은 에데이 운 세 발레인 토 아르귀리온 무 토이스 트라페지타이스 카이 엘돈 에고 에코미사멘 안 토 에몬 쉰 토고입니다.

마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에데이 세 운) - 이 구절은 앞서 게으른 종이 한 변명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종의 변명대로 주인이 매정할 뿐만 아니라 원금을 손해 볼까 해서 그것을 이용하기가 힘들었다면 적어도 안전하고도 손쉬운 방법으로 이윤을 불릴 수 있는 일이 또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취리(取利)하는 자들(토이스 트라페지타이스) - 돈을 맡아 보관하면서 이자를 주거나 수수료를 받고 돈을 교환해 주는 환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의 은행이나 돈놀이하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돈놀이가 금지되었고(23:19 ; 15:5). 다만 이방인과의 거래에만 인정되었다(23:20). 그렇지만 이 같은 율법적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5:10-12). 한편 신약 시대에 이르러 유대 랍비들은 '변리(邊利)로 돈을 빌려주는 것'(lending at interest)'고리 대금업'(usury)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변리로 돈을 빌려주는 무리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변리(쉰 토코) - 이 뜻은 원래 '이자'로서 여기서는 높은 이윤 곧 고리대금(usury)을 가리킨다. 한편 이 단어는 '낳다', '생기게 하다', '자손' 의 뜻을 지닌 '틱토에서 유래된 말로 본전(本錢)에 이자가 증식하는 대금업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는 부당한 이익이나 억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통상적 관례에 의한 이자로 보아야 한다. 한편 초기 로마 제국 시대에는 합법적 이자율이 8%였으나 차츰 12, 24, 48%의 고이자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Vincent, W. W. Bukland).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변리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찬성하시거나 폐기하셨다는 이론을 전개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이자놀이에 대한 도덕성 여부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않으셨다. 다만 당신의 선한 의지를 설명하실 목적으로 융통성 있게 세상에 있는 제현상들을 활용하여 설명하셨을 뿐이다(눅 16:1-9 ; 18:1-8).

28절은 아라테 운 아프 아우투 토 탈란톤 카이 도테 토 에콘티 타 데카 탈란타입니다.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해 단지 '악하고 게으른 '이라고 꾸짖은 정도의 심판이 아니라 그에 따른 물리적 징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구절은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어진 보상(21)에 극한 대비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더 큰 것을 맡기면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더욱 깊은 신뢰감으로 형성되는 착한 종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악한 종의 경우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는 악화되고 그 모습은 더욱 처참하게 된 것이다.

실로 자기에게 맡겨진 은사와 재능과 은혜를 성실하게 활용하지 않으면 그 주어진 것은 그대로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어 버린다(12:5).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타인을 부요케 함으로써 고통의 강도(강도)를 배나 더하게 된다.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 하나님의 계획과 거룩한 사역은 인간의 불성실에 의해 훼손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비록 게으른 자에 의해 조금 지연되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정하신 때, 정한 목적에 따라 당신의 일을 맡을 만한 자를 통해 끝내 성취하시고야 마신다.

한편 열 달란트를 맡은 자는 주어진 역할을 온전히 수행했던 자로서, 국 주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를 활용하면 할수록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9절은 토 가르 에콘티 판티 도데세타이 카이 페릿슈데세타이 아포 데 투 메 에콘토스 카이 호 에케이 아르데세타이 아프 아우투입니다.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 이러한 격언 구절은 막 4:25에서도 사용되고 13:12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된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달란트 비유와는 전혀 다른 내용에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독립적으로 전해져 사용되는 격언 구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유를 마무리짓는 결론적인 말을 대중이 익힌 사용하고 있는 격언 구로 맺으신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일에 성실하게 충성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종말적 심판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명료(明瞭)하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정녕 영적 세계에서도 물질적 세계에서처럼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상이 분명 나타날 것이다(삼상 21:3, 4)

30절은 카이 톤 아크레이온 둘론 에크발레테 에이스 토 스코토스 토 엑소테론 에케이 에스타이 호 클라우드모스 카이 호 브뤼그모스 톤 오돈톤입니다.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25:30

이 무익한 종(톤 아크레이온) - 이 말은 '유익하다(크레이아스)라는 단어에 부정 접두어 ''를 붙여 '유용하지 않은', '모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실로 능동적으로는 선한 일에 매진하지 않고, 동적으로는 주인이 맡긴 일에 소홀히 하는 종은 그 주인에게 아무 쓸모없는 자인 것이다(눅 17:10).

이처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외에도 소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께 패역한 죄가 된다.

바깥 어두운 데로(토 스코토스) - 이 구절은 앞의 21절과 23절에서 착한 종에게 했던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말과 반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바깥 어두운 데'는 주인과 영영한 관계 단절(斷絶)을 암시하는 동시에 어둠의 세력인 사단이 거할 최종적 심판 장소로 익혀 알려진 표현이다(8:12 ; 20:10-15).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와 같은 구절은 종말에 관한 비유를 제시한 24:51 외에 8:12 ; 13:42, 50 ; 22:13 등에도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서 끔찍하고도 영원한 징벌을 나타내는 상투적 문구임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3장 헬라어 주석강해]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식(마 3:13-17)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3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공생애의 사역이 시작됩

rhb-bible.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