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열왕기하 5장 히브리어 강해] 나병에서 고침받은 나아만(왕하 5:8-14)

르호봇 2021. 3. 3.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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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열왕기하 5장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나병에서 고침 받은 나아만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와서 병을 고침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을 만나지도 않고 종을 보내어 요단강에 들어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만 했습니다. 나아만은 그래도 아람 군대장인데 자신에게 와서 안수도 하면서 고쳐줄 줄로 알았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이 나아만을 말려서 요단강에 들어가도록 권면했습니다. 나아만이 신하들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들어가서 몸을 일곱 번 씻었더니 아이 살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병에서 고침 받은 나아만(왕하 5:8-14)

 

8절은 바예히 키쉐모아 엘리샤 이쉬 하엘로힘 키 카라 멜렉크 이스라엘 에트 베가다이브 바이쉘라흐 엘 하멜렉크 레모르 라마 카라에타 베가데이카 야보 나 엘라이 베예다 키 예쉬 나비 베이스라엘입니다.

왕하 5: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5: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있던 곳은 사마리아로 추정된다(G.Rawlinson). 따라서 요단 강과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십 마일 정도)이었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1:6; 3:11; 8:7-15)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계심을 이방인 나아만을 통해 알게 할 것입니다'(K.W.Bahr) 혹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 마소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나아만을 구원하셔서 참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있음을 나타낼 것입니다'(Wycliffe)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근심하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심리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압박만 더욱 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근심을 떨쳐 버려야 한다(벧전 5:7).

9절은 바야보 나아만 베수소 베수사이브 우베리케보 바야아모드 페타흐 하바이트 레엘리샤입니다.

왕하 5: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문에 서니 

=====5:9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 애굽으로부터 말과 병거를 수입한 아람은 전쟁뿐 아니라 평화적인 용도, 즉 사람과 물건의 운반을 위해서도 말과 병거를 사용하였다(왕상 10:29). 한편 애굽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일찍 이러한 말과 병거의 사용이 있었다(41:43; 50:9).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 여기서 나아만이 취한 태도는 4:15에서 수넴 여인이 취한 태도처럼 존경의 표시로 볼 수는 없다. 나아만은 자기의 직책과 부귀영화로 인한 교만 때문에 말에서 내려 들어가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Pulpit Commentary)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치려는 간절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교만한 나아만을 맞이하러 엘리사 선지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부귀영화로 구원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K.W.Bahr).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12:12) 문둥병자 나아만은 오히려 선지자 엘리사를 교만하다고 진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11, 12).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 고침이 선지자의 어떤 마술적인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겸손함으로 순종한 결과라는 사실을 후에서야 깨닫게 된다(Keil).

10절은 바이쉘라흐 엘라이브 엘리샤 말아크 레모르 할로크 베라하체타 쎄바 페아밈 바야르덴 베야쇼브 베사르카 레카 우테하르입니다.

왕하 5: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5:10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 본절에 나오는 엘리사의 명령은 율법에 준한 것이지만(14:8, 9) 그 의미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율법에서 몸을 씻는 것은 문둥병이 완전히 고쳐지고 난 이후 깨끗게 되었음을 증거 하는 상징적 의식행위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깨끗하게 되기 위한 예비적 동작으로 몸을 씻는 행위를 명령한 것이다(T.R.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64).

이와 비근한 예로 예수께서 한 소경을 치료하실 때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9:7)고 하시니 이에 소경이 즉시 순종하여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게 한 것은 치료를 위한 행위나 치료 후 행하는 의식적 행위에 대한 명령이라기보다는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일곱 번이나 씻으라고 한 것은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청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인내까지도 포함된 명령인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하다', '만족시키다'란 뜻의 히브리어 '솨바'에서 온 말이 '일곱'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을 일명 '완전 수'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여리고 성을 칠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말씀(6:3-5)36개월 동안의 가뭄 끝에야 엘리야가 자기 사환에게 비 올 증거를 찾도록 명령한 것(왕상 18:43)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곱 번씩이나 같은 행위를 하게 한 것은 사람들이 흔히 소유하지 못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만 치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내용들로 살펴볼 때 이와 같은 엘리사의 명령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 나아만의 교만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다.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관인 반면에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에 불과했으므로, 나아만이 교만한 자라면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결코 당신의 능력과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다(8:13; 16:5; 눅 16:15).

2) 나아만의 문둥병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치유됨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주술행위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러한 처방은커녕 아주 평범하게 여겨 오던 혼탁한 요단 강가에서 씻으라는 처방을 했다(12).

11절은 바이케초프 나아만 바옐라크 바요메르 힌네 아마르티 엘라이 예체 야초 베아마드 베카라 베솀 아도나이 엘로하이브 베헤니프 야도 엘 하마콤 베아사프 하메초라입니다.

왕하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5:11

당처(當處) - 이 말은 히브리어 '하마콤'을 번역한 용어인데 이는 '일어나다'란 뜻의 ''에서 파생한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질병으로 인해 부어 오른 바로 그곳', '환부'란 의미이다.

손을 흔들어 - 이러한 표현은 흔치 않다. 14:12에서 여호와 앞에 요제를 드릴 때에 흔들어 드린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본절과의 연관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선지서에는(사 11:15) 이와 같이 손을 흔드는 행위가 심판과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T.R.Hobbs).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손을 흔드는 행위는 나아만이 알고 있는 고대 근동 지방의 주술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지도 않고 이러한 주술적 행위도 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였던 것이다(Menien).

한편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노를 발한 원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엘리사가 친히 나와 자기를 맞이하고 '당처', 즉 헌데 난 곳을 손으로 만지고 병을 제거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2)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는 것, 다시 말해서 침례 하듯이 몸을 잠기게 하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이야기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병이 물에 씻어 낫는다면 요단 강같이 적고 더러운 물보다는 차라리 맑고 큰 다메섹의 강들이 더 효력을 나타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2절은 할로 토브 아바나 아마나 우파르파르 나하로트 다메세크 미콜 메메 이스라엘 할로 에르하츠 바헴 베타하르티 바이펜 바옐레크 베헴마입니다.

왕하 5:12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5:12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 여기에서 '아마나'는 시리아 역본과 아람어 탈굼 역본에 의한 것이며 히브리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에는 '아바나'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베트'''의 혼동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Keil & Celitzsch, Vol. , p.318).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이것 둘 다를 사용하고 있다. '아마나'는 다메섹의 중심부에 있는 안티레바논(Anti-Lebanon) 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오늘날의 바라다(Barada) 동일한 강이다(G.A.Smith, The Historical Geography of the Holy Land, p.429-430).

그리고 '바르발'은 다메섹 지방에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강으로서 다메섹에서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오늘날의 '와디아와이'(Wadi Awaj)와 동일한 강이다. 이 두 강 중에 특히 아마나 강은 대단히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물이 찬 강으로서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에게는 '크리소로아스'(Chrysorrhoas), 즉 '황금의 강'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요단 강은 깊고 서서히 흐를 뿐만 아니라 진흙 색을 띠는 혼탁한 강이다(Robinson). 그래서 나아만이 요단 강보다 자기 나라의 강들이 더 좋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 나아만의 이런 생각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적이 오직 순종함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웠다(30:8).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했을 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합리적인 생각을 따라 불순종했다면 '여호와 이'의 축복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22:12-14). 그리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대에 높이 매달린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다.

이때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 살았다(21:6-9). 이것은 구원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이다(3:14),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3:21-24; 2:8).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위해 쉬운 방법으로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은 이성(理性)만 고집하여 하나님의 능력은 물론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구원마저도 거부해 버린다. 그러므로 본절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는 진리가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13절은 바이게쓔 아바다이브 바예다베루 엘라이브 바요메루 아비 다바르 가돌 하나비 디베르 엘레이카 할로 타아세 베아프 키 아마르 엘레이카 레하츠 우테하르입니다.

왕하 5: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5:13

본절은 조건을 나타내는 전치사 ''이 없는 조건문으로서 나아만이 종들이 행한 지혜로운 구변이 나타나 있다(Keil & Delitzsch).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태도는 주인을 노하게 하지 않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였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여'라는 존경과 충성을 포함한 본절의 표현은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공손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6:21; 삼상 24:12, Lang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이와 같이 오늘날의 성도들도 남을 책망하거나 충고할 때는 틀린 점에 대해서 비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존경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삼하 12:1-15).

14절은 바예레드 바이테볼 바야르덴 쎄바 페아밈 키드바르 이쉬 하엘로힘 바야샤브 베사로 키베사르 나아르 카탄 바이테하르입니다.

왕하 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 '내려가서'라는 말속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 1) 나아만이 요단 강으로 내려갔다는 뜻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당시 엘리사가 있던 곳은 사마리아 땅의 고지대이므로 나아만은 상당한 거리를 여행하여 요단 강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2) 나아만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였다는 뜻이다(T.R.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65).

몸을 잠그니 - 여기서 '잠그다'라는 말은 몸을 물에 완전히 적시거나(왕하 8:15) 물속에 몸을 전부 집어넣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10절의 '씻다'라는 단어와는 뜻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또한 모세 오경에서는 이 단어가 '피에 잠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14:6; 33:24; 삼상 14:27). 따라서 나아만은 선지자의 명령(10절) 보다 더 철저히 몸을 씻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아만의 병이 치유가 되고 그 살이 어린아이와 같이 부드럽게 된 것은 그의 철저한 순종적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일곱 번'은 나아만이 엘리사의 요구에 얼마나 철저히 순종했는가를 나타냄과 동시에 나아만의 문둥병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일곱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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