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6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던 어떤 이는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셔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로 시인하고 믿는 것도 성령께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를 시인하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 16:15-20)
15절은 레게이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이입니다.
마 16: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는 헬라어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이로서 직역하면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이다. 이는 분명 예수께서 앞의 견해들(14절)에 대해 못마땅해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 정확히,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가라는 물음을 제자들에게 던지신 것이다.
특히 여기서 '너희는'(휘메이스)은 2인칭 복수 형태의 강조적 표현으로서 예수께서 한 두 제자에게만 질문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12제자들 각자에게 관심을 두시고 강조하여 질문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신앙의 주관성과 구원의 개별성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 볼 수 있다(겔 18:20). 베드로의 고백은(16절) '너희'라는 복수 인칭으로 질문하신 예수 시 물음에 대해 자신을 위시한 12 제자 모두를 대신한 예언적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16절은 아포크리데이스 데 시몬 페트로스 에이펜 쉬 에이 호 크리스토스 호 휘오스 투 데우 투 존토스입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6
시몬 베드로 - 사실 베드로는 부르심을 입은 이후 그의 적극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에 따라 예수 앞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남보다 앞서 나서는 등의 열성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베드로는 다른 동료 제자들이 주저하며 마음속으로 베드로와 동일한 신앙 고백을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 담대하고도 신속하게 천금(千金) 같은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한편 '시몬'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 있다(4:18).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신앙고백 사건을 통해 시몬에게 '게바'(수리아 명칭으로서 반석이라는 뜻), 곧 '베드로'(게바와 동일한 의미 어인 헬라어 명칭)란 이름을 새로이 부여하셨다.
한편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까지 자신의 인간적 열성을 나타냄으로써 계속 실패했으나(23절;17:4, 5; 26:31-35, 69-75),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이후에는 제자들 가운데서 항상 우선이 되어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며(행 2:14; 3:3-7; 4:8; 8:14)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역할을 하였다(갈 2:9).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주 예수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완벽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기독교 신조(信條)의 핵심을 이른다. 이 고백 가운데에 예수의 인성('그리스도')과 신성('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의 본질적 신분 등이 담겨 있다.
물론 베드로의 이 고백은 전혀 새롭고 획기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전에 몇몇 제자들(요 1:41, 49)과 가버나움에서 무리가 예수를 떠나갈 때 베드로에 의해 고백된 것이다(요 6:69). 그러나 예수의 초기 사역 당시(4장)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단순히 정치적 측면에서 받아들이려 했던 대중들의 기대를 회피하시기 위해 그러한 신앙 고백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메시아의 신분과 사역의 특성 및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오류들(14절)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 요구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쉬)는 단순히 2인칭 대명사인 '당신'을 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히브리어(마쉬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어 하나님의 종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의 인성(人性)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21절;20:28; 눅 24:7).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제사장, 왕, 선지자들이었다(출 29:29; 30:30; 삼상 16:13; 26:11; 왕상 19:16; 시 89:20; 사 45:1).
따라서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왕,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실 참 메시아이셨던 것이다(1:1;눅 1:32, 33; 행 3:22, 23; 히 4:15; 5:6,10). 한편 본문에는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앞에 관사 '호'가 붙어 있는데 이는 예수, 바로 그분이 일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능가하는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구원자, 곧 메시아가 되심을 힘주어 강조하는 표현임과 동시에 그분의 절대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이와 더불어 '살아계신'(투 존토스)이란 '내재적 생명이 충만하신', '영원히 생존하시는'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실로 이러한 표현은 오직 영원 자존적 존재이신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요 5:26; 살전 1:9)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탁월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분의 신성(神仙)을 강조하는 말로서 그분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 받으신 분(요 7:28, 29; 8:18,19)이요, 하나님과 하나 되신 하나님의 본체 시라는 점(요 5:17,18; 10:29,30 33)등을 나타낸다.
17절은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이에수스 에이펜 아우토 마카리오스 에이 시몬 바르이요나 호티 사르크스 카이 하이마 우크 아페칼뤼프센 소이 알르 호 파테르 무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입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17
바요나 시몬아 - 여기서 '비'(바르)는 아람어로서 '아들'을 뜻하며, '요나'는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로 히브리어 '요하나'(John, 요한으로도 부름, 요 1:42)의 축소형이며, '비둘기'라는 뜻이다. 그리고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베드로의 원래의 이름을 부르신 것, 즉 새 이름인 '베드로'(요 1:42)라 부르시지 않고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뒤의 말씀과 연관시켜 볼 때 매우 의미가 크다 하겠다. 실로 그의 천연적인 신분인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서의 시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 신분, 지식 등과 같은 탁월성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 그의 옛 이름을 그의 아비의 이름과 더불어 사용하신 것이다.
네가 복이 있도다 - 신약성경에서 유일회적(唯一回的)으로 한 개인에게 국한시켜 사용된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의 정도를 뛰어넘어 탁월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이다.
한편 베드로가 받은 축복의 종류는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특별한 계시의 은총을 누린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사실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원문이는 바로 뒤이어지는 말 앞에 축복의 이유를 밝히는 '호티'(왜냐하면, for)가 첨가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 여기서 '알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토'는 '계시하다', '보여주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실로 하나님의 이러한 계시의 산물(産物)로서의 영적 지각 능력이 있을 때에만 인간은 온건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헐육(사르크스 카이 하이마) - 이를 직역하면 '육신과 피'를 의미한다. 이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 된 인간 그 자체와 그의 본성적인 재능, 지식, 지혜 등을 뜻한다(갈 1:16; 엡 6:12; 히 2:14). 베드로의 이러한 천연성으로서는 도무지 영적 진리를 간과(看過)할 수 없어 것이다. 즉 타락한 이성, 거듭나지 못한 분별력으로는 복음의 비밀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 이는 베드로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의 대구이자 그가 말한 고백의 진정성을 인정하신 것이다. 여하튼 영적 진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영적 능력의 소지자에게 한정적(限定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고전 2:11-14).
이러한 영적 분별력이야말로 베드로가 받은 '복'의 핵심적 요소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본질적 관계성 및 그 각 위의 상호 교호적(interaction)인 인격성 그리고 각 위(位) 사이의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내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하셨다(11:27; 20:23: 26:39, 42).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초월적 신분 강조키 위해 '하늘이 계신'이란 말로 수식하고 있다(5:34).
18절은 카고 데 소이 레고 호티 쉬 에이 페트로스 카이 에피 타우테 테 페트라 오이코도메소 무 텐 에클레시안 카이 퓔라이 하두 우 카티스퀴수신 아우테스입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6:18
또 내가 네에게 이르노니(카고 데 소이 레고) -이를 직역하면'또한 나도 네게 이르노니'이다.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요...'라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거나 하신 것처럼 나도 베드로 너에게 한 가지 진리를 말하겠노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McNel).
너는 베드로라 - '베드로'란 헬라어로 '페트로스'로서 '돌' 또는 '반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돌멩이, 돌덩이' 등을 의미한다. 이는 아람어 '게바'(요 1:42; 고전 15:5; 갈 1:18)에 해당하며, 이 '게바'는 예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름이다(4:18). 예수께서는 일전에 그를 향해 이 같은 이름을 주실 것이라 예언하셨는데(요 1:42), 이제 그것을 실현하시고 계신 것이다.
내가 이 반석(盤石) 위에 - 앞에 제시된 '페트로스'가 남성형 고유 명사인데 비해 여기의 '반석'(페트라)은 여성형 일반명사로서 '바위 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 때문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을 동일시하려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반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베드로는 단순히 '돌'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중언한 바처럼 예수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는(벧전 2:5-8) 견해이다(Augustine, Gander, Lenski, Luther).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자도 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도 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2)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처럼 이 말이 교황의 수장권(收藏權)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견해이다(H.M. Riggle, J. Gibbons). 즉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모든 교회와 천국의 전권을 위임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한하고 유흠(有欠)한(23절) 자가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고전 3:11) 모든 신앙 고백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갈 2:9; 엡 2:29; 벧전 2:5).
(3) 계시된 진리, 곧 베드로가 증거 하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Allen, Calvin, Jerome, Clarke, Robinson). (4) 로마 가톨릭의 극단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반발이 아니라면 베드로 그 자체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이다(Bruce, Plummer).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페트로스'와 '페라'가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시어(詩語)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헬라어의 기초가 되는 아람어는 두 경우 모두 '게바'로 사용되고 있다. 즉 '너는 게바라, 내가 이 게바 위에...'로 표현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이름으로도, 또한 반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람어와 같은 어원인 시리아어로 기록된 '페쉬타 사본'(Peshhitta)에는 이 두 단어가 두 구절 속에서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 주석은 (3), (4)의 견해를 절충한 것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내 교회 - 이는 헬라어로 '무 텐 에클레시아'(the church of me)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 나와서 다시 아담에게 돌아가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산출되어서 다시 몸 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될 것을 시사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창 2:20-25; 엡 5:22-32).
한편 여기에서 '교회'란 '에크'(... 로부터)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서 교회가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구성되었음을 암시한다(요 1:16,19). 한편 70인 역(LXX)의 '에클레시아'는 '집회', '회의', '모임' 등의 뜻인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것으로, 이 히브리어 명사는 본래 여러 종류의 집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나(Munchen), 점차 하나님의 백성, 곧 여호와의 성별 된 무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카할'은 매우 광의적(廣義的)으로 사용되어서 반드시 '에클레시아'로만 번역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70인 역(LXX)에서 이 단어는 가끔 '회당', '군중'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편 70인 역에서 일반적으로 '회당'에 한정되어 번역되는 용어로는 '에다'(연합된 회중이란 뜻)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70인 역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된 적이 없다.
따라서 본문에 '에클레시아'가 사용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및 회당에 대한 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문의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카할'과 같이 넓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사실 뒤에 이어지는 '세운다'는 개념조차도 구약에 연유된 것이다(룻 4:11; 삼하 7:13; 시 28:5; 118:22; 렘 1:10; 암 9:11). 이와 관련해서 래드(G. E. Ladd)는 자기의 에클레시아를 세우겠다는 예수의 선언은 예수에 의해 확립된 공동 단체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관계임을 시사해준다. 바로 이 공동 단체가 장차 새계시와 연관을 맺게 되는 '믿음의 눈을 지닌 신실한 남은 자로 간주된다'라고 주장했다.
예수는 이제 자신이 메시아로 인정되자, 자기의 에클레시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한편 본문의 구절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아직을 은연(隱然) 중에 드러내고 있다는데 그 중요점이 있다.
실로 여호와의 백성은 이제 이 땅에 오시고, 신앙 고백된 메시아의 백성이 된다. 비록 당시 쿰란 공동체가 스스로를 언약 백성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는 오직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에클레시아라 말씀하신다. 정녕 예수를 믿고 그의 피로써 확립된 새 언약의 백성만이 그의 에클레시아라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26:28). 이와 더불어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교회'와 그의 '나라'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Hill).
이 두 단어는 서로 상이한 개념, 즉 전자는 '백성', 후자는 '지배', '통치'의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닌다(13:28-30, 36-43). 그렇다고 해서 이 양자를 완전히 구별된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Walvoord). 왜냐하면 메시아의 통치는 메시아의 백성을 불러내어 구분하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나라는 메시아에 의해 세워지고, 그 백성은 바로 그곳에 모이게 된다.
또한 예수의 에클레시아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최종의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는 역사에 나타난 전초 기지이다. 실로 그 나라가 최종 완성될 때 메시아의 백성은 그 나라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풍성한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세력도 메시아가 친히 세우신 교회를 제거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완성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세우리니(오이코도메소) - 헬라어 원문에서는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가 행한 신앙 고백의 실체 위에 장차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암시한다. 사실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기원을 가진다. (1) 근원적인 기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안에는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하여 교회 조직이 이루어졌다(엡 1:3-6).
(2) 역사적 기원. 그리스도의 예언(8절)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신약 교회가 성립되었다(행 2:2-4; 4:32). 구약에 이미 '교회'라 불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무리가 있었지만(행 7:38) 이는 장차 주님께서 세우실 교회의 예표(豫表)였고, 실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들 위에 임하신 오순절 때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근거하여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로 연합하여 주님의 몸, 즉 교회가 되게 하셨다(행 2:1-4; 4:32; 고전 12:13).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여기에서 '음부'란 헬라어로 '하데스'로서 '지하 세계, '죽은 자의 거처'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히브리어로 선인과 악인이 구분 없이 들어가는 '죽은 자의 영역'이란 뜻의 '스올'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어둡고 소외된 장소로서 매우 높고 단단한 성벽과 문으로 둘러 쳐져 있기 때문에 인간을 한 번 받아들이면 다시는 내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권세'(퓔라이)란 문자적으로 '대문'이란 뜻이다. '음부의 권세'란 '음부의 문'(gate of Hades)이라는 의미로서, 음부로 들어가는 문에는 항상 죽음이 따르게 된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 및 이와 유사한 표현들은 정경(욥 17:16; 38:17; 시 9:13; 107:18; 사 38:10)이나, 유대인의 외경에서(솔로몬의 지혜서 16:13; 마카비 3서 5:51; 솔로몬 시가서 16:2), 또는 이방 문서에서도(Homer, Iliad 9. 312;Odyssey 11. 277; a Schylus Agam 1291;Euripedes Hecuba 1) 자주 나타나는데, 쓰일 때마다 이 말은 사망과 임종을 의미한다.
따라서 RSV는 본문의 구절을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the powers of death shall not prevail)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이기지 못하리라'를 나타내는 '카티스퀴수신'은 '대항하여 힘을 겨루다'는 뜻의 '카티스퀴오'의 직설법 미래 3인칭 형태로서 결국 죽음의 세력이 교회의 한 부분도 이길 수 없거나, 비록 잠시 이긴다 하더라도 곧 패망하여 영원히 굴복할 것이라는 강한 암시(暗示)를 제공하고 있다.
실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설립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육체적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문'을 깨뜨리시고 죽음의 정복자로서(롬 6:9; 계 1:18) 군림하시기 때문이다(Alford).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생존하셔서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保證)이 되실 뿐 아니라 교회의 영속성의 영원한 지지자(支持者)가 되신다(고전 15:50-58).
19절은 카이 도소 소이 클레이스 테스 바실레이아스 톤 우라논 카이 호 에안 데세스 에피 테스 게스 에스타이 데데메논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카이 호 에안 뤼세스 에피 테스 게스 에스타이 레뤼메온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입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19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본문은 사 22:22에서 유래한 내용으로서 그곳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의 절대 주권을 예언하고 있다(계 3:7). 한편 여기 '열쇠'는 청지기로 임명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창고관리에 대한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표식, 문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천국'은 지금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교회, 곧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장차 세워질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대상에 대해서 몇 가지 대별(大別)되는 견해가 있다. (1)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으로서 베드로 한 사람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고, 역사적으로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그 권한이 계속 부여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하여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A.J. McClain). (3) 특히 그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더욱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견해이다(Plummer). (4) 12 사도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12 사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Wycliffe, Hendriksen).
이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천국(교회)은 궁극적으로 유대인들(행 2:14)과 이방인들(행 10:1-11; 15:7, 14)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28:18-20). 그렇다면 '천국의 열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가 계시에 의해 점차 깨달아지는 천국 복음을 선포함으로써(4:23)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열어 주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행 2:14-39; 3:11-26; 4:11, 12:8: 20-23) 바로 이런 방법으로 주께서는 교회에 구원받은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행 2:45), 자기 교회를 강건하게 세우시는 것이다(18절). 이와 더불어 '천국의 열쇠'가 매고 풀 수 있는 통제권이 따르는 것으로 보아 공개적이고도 심각한 범죄를 범한 자에게 교회를 통한 천국의 축복을 금할 수 있는 치리 및 입법 통제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행 8:21;고전 5:1-13).
실로 이 땅의 교회에서 치리(18:17; 딛 3:10)는 천국의 통제권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8:12). 이로써 원소유자이신 예수께서 인간에게 위탁하신 '천국의 열쇠'는 사도들을 위시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인정과 함께 자신들의 사역을 수행하고 그 권위를 세 우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땅에서...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 이처럼 대치되는 전통적인 랍비들의 용어 사용법에 의하면 '매다'(데세스)란 '금지하다' 또는 '금지하여 불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풀다'(뤼세스)란 '허락하다' 또는 '허락하여 합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고 한다.
즉 그들은 이 용어를 어떤 행동의 규율을 부가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대치되는 두 용어를 응용해 유대인들은, 인도적이고 자유스러운 힐렐(Hillel) 학파의 랍비들과 엄격하고도 보수적인 샴마이(Schammai) 학파의 랍비들의 '묶은'것들을 '푼다'는 말을 통해 두 학파 간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본문의 '풀고', '맨다'는 말은 여러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1)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를 베드로의 수장권(首長權)과 절대적 권한을 가리킨다고 한다. (2) 특별히 죄를 면제하는 권한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3) 단순히 교회에서 행동의 규범, 곧 허락과 금지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4)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교회 치리권과 그의 권위의 탁월함을 근거로 해서 그가 제정하는 규칙과 그의 사도적 권위에 합당하게 권면하고 실행한 내용들이 하늘에서도 인정되고 비준(比準)될 것이라는 견해이다(Josephus).
물론 이 견해는 베드로의 권세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그리고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요, 처음으로 놓인 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는 견해이다. 결국 베드로는 '구원사적 수위직'(salvation historical primacy)을 차지하게 된 것이며, 그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이 놓이고 또한 매고, 푸는 권한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 제도나 사제 주의 및 성직자의 독재 개념은 본문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한편 메시아의 종말론적 백성인 교회가 천국의 열쇠, 곧 매고 푸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면, 그 일의 하나는 앞에 언급된 대로 진리 선포와 사도적 권위에 의한 권위와 권면 이외에 신앙 고백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징(權懲) 일 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사를 추적해 보면 분명 권징은 사도들, 장로들, 나아가서 온 교회의 특수한 임무임을 알 수 있다(고전 5:1-13; 고후 13:10; 딛 2:15; 3:10 ,11). 더욱이 권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 고백을 근거하였을 뿐 아니라 도래할 메시아 왕국을 대망하는 무리들로 구성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스스로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것이다. 사실 교회가 담당한 진리의 참된 선포는 이 권징을 전제한 것이며 또한 이를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20절은 토테 디에스테일라토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히나 메데니 에이포신 호티 아우토스 에스틴 이에수스 호 크리스토스입니다.
마 16: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16:20
이에(토테), '그리고 나서', 그때에'(then)를 의미한다, 이는 시각적인 연속성을 강조한 말로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지닌다.
제자들을 경계 하사...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사실이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자 예수께서 즉각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로서 그들은 스승이 스스로를 나타내신 방법과 한계성 안에 머물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을 회심케 하고 천국 시민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이 같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하는 것이다.
(2) 제자들의 욕망에 찬 생각들을 잠재우시기 위해서였다. 비록 당시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이 되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고난 받는 메시아 상(像)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메시아 도래의 선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곧 이어지는 베드로의 실수는(22절) 이 같은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실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예수의 사역의 본질과 그분이 가르치신 천국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3)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적인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각종 이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다(요 6:14, 15).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經綸)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방해하는 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에서 예시된 메시아를 그의 정치적인 욕구, 즉 현재 외부(로마)의 압제(壓制)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혁명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다(요 12:34; 행 1:6).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리실 경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할 당신의 사역의 노정에 더욱 더 혼선만 빚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당신 자신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막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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