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8장 헬라어 강해 설교 중에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이 가셔서 고쳐 주신다고 말합니다. 백부장은 놀라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말씀으로만 하셔도 자신의 하인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런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마 8:5-13)
5절은 에이셀돈티 데 토 이에수 에이스 카페르나움 프로셀덴 아우토 헤카톤타르코스 파라칼론 아우톤입니다.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8:5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 4:13에 이어 예수 선교의 중추지였던 가버나움이 두번째 언급되고 있다. 이는 결국 4:13에 언급된 1차 갈릴리 사역이 5-7장에 언급된 산상수훈으로 중단되고 제 2차 갈릴리 사역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로마의 군단급(1군단은 700명의 기병을 포함한 3000 - 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은 아니지만 팔레스틴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보조 부대가 주둔(stationing)했던 곳이었다.
팔레스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는 타국에서 징집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비유대 계열, 여기서는 사마리아 정도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Pulpit Commentary), 레바논 또는 시리아와 같은 이방 지역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그들은 이방인들임에 틀림없다.
한 백부장이 나아와 - 프로셀코마이 라는 동사이다.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이다. 주님이 지금 들어가시는데 백부장이 나오는 것은 과거 시제를 사용한다. 현재 시제를 사용해야 맞는데 왜 과거 시제를 사용했을까 백부장은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다가 주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께 달려온 것이다. 그 이유가 간구한다는 단어는 현재 능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이 헤롯의 관할지에 있던 것으로 보아 이 백부장은 이방 출신으로서 아마 헤롯의 용병(傭兵)이었던 것 같다(Bruce). 여기서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서(눅 7:2 - 10) 이 사람이 유대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6절은 카이 레곤 퀴리에 호 파이스 무 베블레타이 엔 테 오이키아 파랄뤼티코스 데이노스 바사니조메노스입니다.
마 8: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8:6
주여 - 예수를 향한 백부장의 돈독한 믿음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말이다(7:21 참조). 내 하인이(파이스). 아들 또는 하인에 해당하는 '파이스'란 헬라어는 신약성경 중에 약 24회 등장한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계급이나 신분상 수하에 있는 자, 또는 피지배인을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서도 하인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 백부장은 자신의 부모, 혈육이나 상전(上典)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해 굳이 와서 간구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하인은 당시 사회 구조상 천민이었으나 백부장과는 특별한 우정이나 애정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자신의 수하 친병(親兵)을 위하여 체면과 만사를 제쳐두고 이처럼 간청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인간성(humanyty)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어쩌면 그가 이처럼 자상한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는 로마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예수에 대하여 선입관을 갖지 않고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 바사니조라는 동사로서 분사 현재 수동태 주격 남성 단수를 사용한다.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은 과거부터 계속해서 중풍병으로 매우 괴로워하고 있음을 말한다. 수동태는 외부의 요인에 의해서 병에 걸린 것을 말한다.
중풍병이란 말은 신체의 전체나 일부 또는 얼굴이나 기타 부위에 일어나는 마비 증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또 현대에 이르러서도 완전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대표적 원인으로는 역시 뇌졸증을 들 수 있다.
뇌졸증이란 뇌의 작은 동맥들이 파열되어 뇌 속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경우, 또는 뇌 속에서 혼탁한 핏덩어리가 뭉쳐져서 혈액의 순환이 막히는 경우, 발작이 일어나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발작과 혼수상태가 발생되는 경우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에라도 반신불수 등에 빠지게 된다.
물론 뇌졸증 이외의 원인으로 생긴 마비 증세도 중풍병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쨌든 이 중풍병은 문둥병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둥병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일어난 병으로서 이 또한 그 당시에는 기적이 아니면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7절은 카이 레게이 아우토 호 이에수스 에고 엘돈 데라퓨소 아우톤입니다.
마 8: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7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에고 엘돈 데라퓨소 아우톤) - '고쳐 주리라'의 원어 '데라퓨소'는 개역 성경대로 미래 서술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가서 고쳐주랴?'라는 뜻의 의문문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헬라어에서는 동사가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흔히 인칭 대명사 주어가 생략되며 또 이것이 생략되더라도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지만 본문에는 주어인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가 특별히 쓰이고 있다.
즉 본문에서는 주어인 '내가'란 말이 강조된 것이다. 어쨌든 예수의 치유 기적 장면을 보면 주로 병자들이 예수께 찾아오거나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 하여 치유되었지 예수께서 직접 병자를 찾아가시겠다고 제안한 것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예수는 여기서 굳이 가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여기 백부장은 헤롯 용병으로서 그의 혈통적 배경은 로마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일 수 있다. 심지어는 유대인 출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단 로마 식민 체제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로마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 당시 피지배자인 유대인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착취자 내지 종교적 이방인으로서 경멸하였고 또 로마인은 유대인을 편협하고 위험한 피지배자로 멸시하였다. 예수는 이런 벽을, 즉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의 벽을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로써 허물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설사 예수가 병자에게 가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예수는 이상의 방법을 동원해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보이셨던 것이다.
8절은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헤카톤타르코스 에페 퀴리에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 히나 무 휘포 텐 스테겐 에이셀데스 알라 모논 에이페 로곤 카이 이아데세타이 호 파이스 무입니다.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8:8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이때 요한은 자신이 예수께 세례 베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백부장의 이 같은 겸손한 행위를 예수는 유대인이고 자신은 이방인이라는 민족 차별적 통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 만약 이러한 이유에서였다면 이 백부장은 예수께 이런 요청 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치가 않다.
또한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감당치 못하다'란 어구의 원어인 '우크 히키노스'는 영적, 도덕적 충족성이 몹시도 결여됨을 고백한 말로서(3:11) 어떤 권위 있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죄악 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 성을 인지(recognition)했음을 반영하는 진술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영혼에게 다함없는 은혜가 필시 수여될 것이다(시 147:6).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이 백부장은 분명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를 전능한 절대자로 믿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실 예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말씀으로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기록은 요 4:46 - 53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경우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한편 만약 그가 예수를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 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도나 안수 등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은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예수께 대해 신적 메시아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낫겟사옵나이다 - 이아오마이라는 동사로서 직설법 미래 수동태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주님이 직접 가지 않고 말씀만 선포하시면 실제로 하인의 중풍병이 낫겠다는 말이다. 미래 시제는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중풍병 하인이 앞으로는 완전히 고침 받을 것을 말한다. 수동태는 중풍병 걸린 하인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을 것을 백부장이 고백하는 것이다.
9절은 카이 가르 에고 안드로포스 에이미 휘포 엑수시안 에곤 휘프 에마우톤 스트라티오타스 카이 레고 투토 포류데티 카이 포류에타이 카이 알로 에르쿠 카이 엘케타이 카이 토 둘로 무 포이에손 투토 카이 포이에이입니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8:9
본절은 개역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지만 앞 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가르'란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이 예수께 다만 말씀만 해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이유가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안드로포스 휘포 엑수시안) - 이것은 권세(엑수시안) 아래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여기서 권세란 것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국가에 속한 자란 모두 국가 권세의 정점(頂點)인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 질서 체계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인으로서 황제로부터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기 수하에 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 같은 명령체계와 그 개념은 너무도 명확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 체계라는 인위적 차원에서의 상급자와 그 하급자 사이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질병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자연 세계에 적용시킨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결국 백부장이 예수를 인본주의적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재, 즉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본주의적 통치자로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하겠다.
10절은 아쿠사스 데 호 이에수스 에다우마센 카이 에이펜 토이스 아콜루두신 아멘 레고 휘민 우데 엔 토 이스라엘 토사우텐 피스틴 휴론입니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 '기이히 여기다'란 말의 헬라어는 '다우마조'로서 본문에는 단순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 등으로 번역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결코 놀라지 않으실 신(神)이신 동시에, 한편으로는 놀라는 감정적 성정을 지니신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Calvin).
즉 예수가 지닌 신적인 전지성(全知性) 마저도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제어하지 않았던 것이다(Homer A. Kent, Jr.). 한편 본문에는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에 대해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셨던 반면 막 6:6에는 예수께서 고향에 가셔서 권능을 행하고 병자도 고치셨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신 기록이 있다.
물론 예수께는 신앙과 불신앙 모두가 무관심이 아닌 일종의 경건한 경이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Bengel). 예수께서는 당신과 접촉한 모든 이에게 특별한 관심(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을 가지고 계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어구는 다음에 대단히 주요한 내용을 말씀하시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던 말이다(5:18).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 이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메시아로 계시하고 있는 구약적 배경을 거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어떤 유대인들보다 예수의 인격과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여태까지 만나 본 유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낫겠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다. 한편 마태는 이 백부장의 위대한 신앙을 누가 보다도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 전파의 대상이 유대인들에게서 옮겨질 것임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1절은 레고 데 휘민 호티 폴로이 아포 아나톨론 카이 뒤스몬 헥수신 카이 아나클리데손타이 메타 아브라암 카이 이사아크 카이 이아코브 엔 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입니다.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표현 뒤에 나오는 말씀의 엄숙성과 중요성을 일깨우는 문장이다(10절). 예수는 지금 거듭해서 유대인의 신앙관에 일대 변혁을 이루게 될 이방인 선교에의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 평행 구인 눅 13:29에는 좀 더 포괄적으로 '동서남북으로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유대 지경 내(內) 뿐 아니라 이 지구 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바 있는데(사 45; 6; 49:12), 본문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본문의 백부장이 이방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게 되었음을 예언자의 말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 아나클리노라는 동사인데 직설법 미래 수동태 복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로마인임에도 믿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미래 시제는 믿음으로 지금 이 순간부터는 천국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백부장이 앉는 것을 말한다. 수동태는 백부장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천국에 앉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한다. 율법의 의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안 된다. 백부장은 믿음으로 들어갔다.
이는 전 세계 만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신앙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뜻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을 확약(definite promise)받은 당사자들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의 뿌리들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세 이름들은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할 때에 자주 언급된다. 이어서 '앉다'란 말은 '기대어 눕는다'는 뜻으로서 식사 기간 중 거의 눕다시피 식탁에 기대어 앉는 유대인들의 식사 예법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잔치상에 둘러 기대는 상태를 지적한 것이다. 한편 이 잔치는 메시아 왕국의 완성을 상징하는 '메시아 잔치'라고 명명되는데, 이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다(사 25:6 - 9; 65:13, 14 등). 그리고 메시아 잔치, 곧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에 앉을 수 있는 자들은 이방인인 이 백부장의 예(例)에서도 암시되었듯이, 백부장이 소유했던 그런 믿음을 소유한 자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은 천국에 들어갈 자들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보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세상 각처에 살고 있는 이 믿음의 소유자들은 나라가 임할 때 먼 곳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한편 '식탁에 앉다'란 말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향연(饗宴)과 그로 인한 큰 기쁨을 상징할 때 흔히 사용된 관용적 표현이다(마 26:29; 눅 14:15 -24).
12절은 호이 데 휘오이 테스 바실레이아스 에크블레데손타이 에이스 토 스코토스 토 엑소테론 에케이 에스타이 호 클라우드모스 카이 호 브뤼그모스 톤 오돈톤입니다.
마 8: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호아 데 휘오이 테스 바실레이아스) 이는 '그 나라의 자손들'이란 뜻으로서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된 자, 즉 나라에 대한 합법적인 상속권을 가진 자를 뜻한다. 여기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유대 민족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3:9, 10), 당연히 천국에 속한 자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겠기에 결국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셨다.
바깥 어두운데 - 이는 멸망의 장소, 곧 미래에 '메시아의 잔치'가 배설되는 곳의 외부를 상징한다. 한편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는 불의한 자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다(벧후 2:17). 즉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항상 밝은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곳은 어두운 곳으로써 어두움의 권세인 사람이 지배하는 곳 내지 영영한 절망이 있는 지옥을 가리키고 있다(22:13).
결국 '바깥 어두운데'란 존재론적인 절대 소외와 영적인 절망 및 종말론적인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실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빛을 내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요, 진리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의 빛이 없는 곳은 사단이 지배하는 어두움과 죽음의 세계임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쫓겨나 - 에크발로라는 동사인데 직설법 미래 수동태 복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자신의 의로 구원받았다고 자만하던 유대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다는 의미다. 미래 시제는 그들은 이제부터 앞으로 계속해서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질 것을 말한다. 수동태는 율법주의자들은 쫓겨나기 싫어도 하나님이 쫓아내어 버리기 때문에 쫓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율법의 의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결국 쫓겨나게 된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는 지옥의 장면을 더욱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한 표현으로서(Turner), '운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이를 간다'는 것은 심해(深海)의 절망을 의미한다(McNeil). 이와 같은 고통과 절망은 그들을 위해 찾아온 메시아를 거절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또 제거할 수 없는 영원한 눈물과 고통인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신 11, 12절의 두 구절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구약의 사상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은 장차 온 땅의 동서남북으로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구성된다(시 107:3; 사 43:5, 6; 49:12). (2) 이 지구 상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사 45:6; 59:19; 말 1:11). (3) 동서남북에 있는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이다(사 2:2, 3; 60:3 - 4; 미 4:1, 2; 슥 8:20 -23).
13절은 카이 에이펜 호 이에수스 토 헤카톤타르코 휘파게 카이 호스 에피스튜사스 게네데토 소이 카이 이아데 호 파이스 아우투 엔 테 호라 에케이네입니다.
마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8:13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 게네데토라는 동사인데 명령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3인칭이다.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대로 될 것이라고 명령했다. 이제는 네 믿음이 있으니 가라는 의미다. 그런데 현재 시제를 쓰지 않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주님은 이미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있었다는 의미다. 수동디포는 능동과 수동이 합쳐진 태이다. 백부장이 믿었는데 자신의 의지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수동으로 믿음을 주셨다는 의미다. 우리의 믿음도 내가 믿은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믿게 되었다.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주님은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하셨지만 이번에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란 말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다. 이 표현은 마태가 자주 사용한 말씀으로 주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9:22, 29; 15:28). 그런데 '믿은 대로'란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뜻이 파생(derivation)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1) 예수는 백부장의 믿음에 비례해서 기적을 행하셨다. (2)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시지만 그 은혜는 인간 편의 믿음의 양(量)에 따라 주어진다. (3) 본문의 기적은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었다. (4) 기적이 행사되면서 백부장이 믿고 있는 바 병 고침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2)와 (4)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그 시로 - 눅 7:6을 보면 예수와 백부장의 집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의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의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으로 보아 '그 시'란 말은 바로 그 순간, 즉 예수의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란 말씀이 떨어진 즉시 나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문둥병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며 실행이고 창조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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