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26장 헬라어 강해] 예수를 세번 부인한 베드로(마 26:69-75)

르호봇 2021. 3. 7.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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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6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에서 베드로에게 예언합니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는데 닭이 울기전에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모든 제자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이 붙잡혀 가고 심문을 받게 됩니다. 그 자리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어린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당신도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니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닭이 울게 되고 베드로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게 됩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마음이 수시로 바뀝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겸손함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시간 항상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마 26:69-75)

 

69절은 호 데 페트로스 엑소 에카데토 엔 테 아울레 카이 프로셀덴 아우토 미아 파이디스케 레구사 카이 쉬 에스다 메타 이에수 투 갈릴라이우입니다.

마 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26:69

바깥뜰에 앉았더니 - 이 구절은 본래 58절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연결해보면 자연스럽다. 다시 장면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다. 베드로는 요한의 도움으로 가야바의 궁 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카데마이라는 동사이며 직설법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베드로는 실제로 바깥뜰에 계속해서 앉아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는 성전 수비대의 경비에 의해 예수가 심문받고 계신 궁전의 실내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궁궐이 둘러싸여 하늘을 볼 수 있는 궁전 안 마당에 앉아 산헤드린의 판결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 비자가... 가로되 -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이 '한 비자'(a servant girl, NIV)베드로를 궁 내로 들어가게 한 여자 문지기임을 알 수 있다(18:16, 17). 그 여자 문지기는 아마 베드로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14:67)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추궁한다. 결국 이 두 표현(나사렛, 갈릴리)은 지리적 문화적 우월감에 젖어있는 예루살렘 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심히 멸시적인 용어이다.

여하튼 그 '비자'는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의 얼굴이 불빛에 노출되자 그가 심히 당황하고 초조해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자기와 안면이 있는 요한과 그가 함께 궁내로 들어왔음을 보아 적어도 그가 예수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라는 추론을 하게 된 듯하다.

70절은 호 데 에르네사토 엠프로스덴 판톤 레곤 우크 오이다 티 레게이스입니다.

마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26:70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 마태는 '모든 사람 앞에서'라는 문구를 강조하고 있는데, 아마도 예수의 말씀 곧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10:33)는 말씀과 연관 지어 이 장면을 기록했을 것이다.

진정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장면에 직면한 베드로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공개적으로, 크고 단호한 음성으로 예수와 자신의 관계성을 부인했다. 이 베드로의 부인은 마치 공식적인 법정에서의 선서와 유사한 형태이다(M.Scebuoth 8:3). 부인하다는 단어가 아르네오마이라는 동사인데 직설법 과거 중간디포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베드로가 실제로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의미다.

지금 베드로가 부인하고 있는데 과거 시제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미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알고 있었다. 중간디포는 베드로가 부인한 이유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주님과 함께 있었다고 하면 붙들려 가서 심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 결정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베드로는 자기와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한다. 이처럼 자기 안전을 도모하려고 거짓을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한 제자이자 기독교 교회의 반석이라고 할 만한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실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연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면 누구나 겪게 될 장면인 것이다. 한편 이 베드로의 치욕스러운 자기부정적 패배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귀중한 연단의 기회였을 수 있다. 베드로는 매사에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 자신의 유약함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간구할 수 있다.

71절은 엑셀돈타 데 아우톤 에이스 톤 퓔로나 에이덴 아우톤 알레 카이 레게이 토이스 에케이 카이 후토스 엔 메타 이에수 투 나조라이우입니다.

마 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 여기서 '앞문'은 가야바 궁 밖으로 나가는, 그리고 불빛이 그곳까지 잘 미치지 못하는 출구였을 것이다. 이때 베드로는 다가오는 공포의 그림자를 떨치지 못해 아마 피신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비자가... 말하되 - 두 번째 부인(否認)'다른 여종' 앞에서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이 같은 '여종'앞에서 진행된 듯한 암시를 준(14:69). 요한복음에는 '여종' 앞에서 부인한 적이 없으며, 누가복음에서는 세 번 부인한 것 가운데 맨 처음만 '여종' 앞에서 했을 뿐 나머지 두 번은 다른 사람() 앞에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이 여러 사람에 의해 집중적으로 추궁된 뒤에 되어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여하튼 베드로는 불가의 밝은 곳을 피하여 어두운 곳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곳도 괴로운 질문을 피하기에는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한편 마가는 이러한 와중에 자정이 지났음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울렸다고 전하고 있다(14:30).

72절은 카이 팔린 에르네사토 메드 호르쿠 호티 우크 오이다 톤 안드로폰입니다.

마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 여기서 '맹세'(oath)는 어떤 자기 진실을 고백하기 전에 먼저 선언하던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습관으로서(Robertson), 이는 베드로 자신이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저주(詛呪) 내리시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어떤 거룩한 것에 호소한 것으로 보인다(5:33, 34 ; 23:16-22). 어쨌든 베드로는 첫 번째 부인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자기를 가장 사랑했던 스승을 '그 사람'이라는 경멸적 표현으로 부인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73절은 메타 미크론 데 프로셀돈테스 호이 헤스토테스 에이폰 토 페크로 알레도스 카이 쉬 엑스 아우톤 에이 카이 가르 헤 갈리아 수 델론 세 포이에이입니다.

마 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表明)한다 하거늘

=====26:73

조금 후에 - 누가복음에는 '한 시쯤 있다가'라고 기록하고 있다(눅 22:59). 이 시간 동안 예수는 공회에서 사형 언도와 하속들에게서 수치를 당하고 나신 후 안 뜰을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방으로 이송된 듯하며, 어쨌든 거듭되는 위험의 증대와 부인 가운데서도 아직 예수의 신상이 염려되어 떠나지 못하는 베드로의 인간미가 엿보인다.

곁에 섰던 사람들 - 요한의 보고에 따르면 이 무리 중 감람산에서 베드로의 칼에 귀가 떨어졌었던 말고의 친척이 있었다고 전한다(18:26). 아마 그 친척은 불 주위의 사람들이 웅성대며 예수와 한 통속인 자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말고의 일로 조금은 흥분된 감정으로 베드로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진실로 그 당이라 - 헬라어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가 된다. 이제 주변 사람들은 단순한 추측에서 확신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의 말투는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감출 수 없게 한다.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 북부 갈릴리 지방의 말과 발음은 잘 다듬어진 남쪽 유대지방의 말과 현저하게 달라서 금방 구별될 수 있었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릴리 사람들은 히브리 알파벳 중 '알렙, '헤트' '아인'같은 후두 문자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했으며 '''타우', '베트'를 '페'로 발음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atary).

베드로는 '내가 그 사람을' 할 때 '사람''이쉬' 발음을 '아투'로 발음하였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사 시대 때 있었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십볼렛''씹볼렛'이라고 발음하여 자기의 출신지를 나타냄으로써 죽임을 당했던 예가 있다(12:6).

74절은 토테 에륵사토 카타나데마티제인 카이 옴뉘에인 호티 우크 오이다 톤 안드로폰 카이 유데오스 알레크토르 에포네센입니다.

마 26: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26:74

저주하며 맹세하여 - 처음에는 부인, 다음에는 맹세로 부인, 그다음에는 저주로 부인한다. 이는 죄악과 위선의 가속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베드로의 고백들은 예수의 결정적인 고백에 맞서 있다.

즉 예수의 진실한 고백은 사형을 초래했으나, 반면에 베드로의 세 차례 거짓 고백은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시도들이었다. 정녕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키 위한 신성 모독의 중한 죄악까지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16:25).

닭이 곧 울더라 -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과 더불어 닭 울음소리가 베드로의 귓전을 때린다. 새벽이 되기 전 그 밤동안 닭은 두 번 울어댔다(14:72). 한편 이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의 혼란스럽고 완악해진 마음을 돌이켜 참회의 눈물로 변화시킨 일종의 신선한 경종이었다.

75절은 카이 엠네스데 호 페트로스 투 헤마토스 투 이에수 에이레코토스 아우토 호티 프린 알레크토라 포네사이 트리스 아파르네세 메 카이 엑셀돈 엑소 에클라우센 피크로스입니다.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6:75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 생각나서 - 34절에 나온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로 베드로는 지금껏 자기를 과신했기 때문에 예수의 경고를 개의치 않았으나, 회개에의 부름이라 할 수 있는 닭 울음소리에 마침내 연약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생각났다는 단어가 므나오마이 동사이다. 직설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닭이 울자 주님이 세 번 부인한다는 말이 실제로 떠오른 것을 말한다. 과거 시제는 베드로가 부인하고 나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수동디포는 베드로가 부인하고 나자 주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마음에 생각이 났다는 말이다.

한편 누가복음에 의하면(눅 22:61) 닭이 우는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와 눈이 마주치자 곧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한다. 실로 당신의 죽음이 선포된 바로 그 순간까지도 연약한 제자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다함없는 연민의 정을 쏟아부어 주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로써 베드로의 장담은(35) 철저히 부정되었고 예수의 예언은(34) 완전히 성취되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희롱 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찢어지는 가슴을 감싸 안고 황급히 그곳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길은 어두운 밤으로 치닫은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새벽에 무겁고도 어렵게 내리 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찢고 통곡하는 회개로 인해 그는 서서히 참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즉 그는 유다와 같이 약하여 주를 배반했지만 통곡하고 회개함으로 평화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몇 날 후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16:7), 오순절 때는 대중을 향해 반석같이 설 수 있었다(:2:14).

한편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후로 닭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말해 준다. 사실 이 같은 전설을 빌지 않더라도 베드로의 비통(悲痛)의 눈물은 그의 사는 날 동안 전보다 더 심령을 가난하게 하였을 것이다.

 

 

[마태복음 9장 헬라어 강해설교] 혈루증 여인의 치유사건(마 9:18-26)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9장 헬라어 강해설교 중에서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통받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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