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9장 헬라어 강해설교] 혈루증 여인의 치유사건(마 9:18-26)

르호봇 2021. 3. 6.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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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9장 헬라어 강해설교 중에서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통받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모든 방법으로 치료를 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의 겉옷만 만져도 고침을 받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 부정한 여인은 정상적인 사람 앞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정하면서도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뒤에 가서 주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혈루증이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혈루증 여인의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마 9:18-26)

 

18절은 타우타 아우투 랄룬토스 아우토이스 이두 아르콘 엘돈 프로세퀴네이 아우토 레곤 호티 헤 뒤가테르 무 아르티 에텔류테센 알라 엘돈 에피데스 텐 케이라 수 에프 아우텐 카이 제세타이입니다.

마 9: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9:18

이 말씀을 하실 때에 - 마태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신 사건(9-17)과 직결시키고 있으나 마가는 예수가 바닷가에 계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5:21). 또한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와 연결시키지 않고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가다라 지방(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마태의 잔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모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한 직원이 와서 - 여기서 '직원'(아르콘)은 통치자, 또는 지배자라는 뜻으로서 어떤 관직이나 종교 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회당(synagogue)에는 몇 사람의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회당 건물의 유지. 보존과 운용 및 회당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눅 13:14).

본문의 이 직원은 아마 가버나움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 감독이거나 회당장이었던 것 같다(5:22; 8:41 참조).

절하고 - 원뜻은 '무릎을 꿇고'로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존경과 깊은 경의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8:2)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 누가는 이 직원의 딸이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나이가 12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그의 딸이 죽기 직전에 있었으며 그 후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의 집에서 보냄 받은 사람들이 알려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결합하여 상세한 과정을 생략한 채 예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Broadus). 뿐만 아니라 '방장 죽었사오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에테류테센' 은 반드시 '죽어 있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죽으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셔서... 손을 얹으소서 - 선지자들은 은혜를 빌기 위해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권위의 부여, 인격적인 관계성 설정, 생명과 축복의 전달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 아마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외에도 다른 병자들에게 손을 얹었던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회당장은 그 사실을 목격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살겠나이다 - 이는 그 회당장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에 주의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하는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8:8) 만큼이나 훌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절은 카이 에게르데이스 호 이에수스 에콜루데센 아우토 카이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입니다.

마 9: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9:19

일어나 따라 가시매 - 예수는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장소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의 요구에 따라 즉각 응답하여 따라가서 죽은 자가 있는 곳으로 가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영혼의 구원 문제가 달려 있다면 어떠한 위험과 고통도 무릅쓰고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이로'는 전후 문맥상 식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20절은 카이 이두 귀네 하이모르로우사 도데카 에테 프로셀두사 오피스덴 헥사토 투 크라스페두 투 히마티우 아우투입니다.

마 9: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9: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본문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이두'라는 감탄사가 본절의 앞부분에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을 소개하며 이 여인에게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혈루증이란 질병을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의식적으로 매우 불결한 것으로 여겨 공동체 생활에서 그 환자들을 격리시켰다(15:25). 마가는 이 여자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가 하여졌던 차에"(5: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녀의 투병 기간이 '12'년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더욱이 히브리인들의 숫자 개념으로 '12'는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녀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치유 사역에 의해 치료되기까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고난을 순간들을 보냈음을 암시한다.

예수의 뒤로 와서 - 이 여자는 12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자기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허비하며 애써왔지만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예수의 뒤로 가서 예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져보면 나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겉옷 가를 만지니 - 여기서 '겉옷 가'(크라스페돈)는 '옷의 가장자리'(edge) 또는 ''(tassel)로서, ''은 히브리어로 '치치트'라 부르며 겉옷의 네 모퉁이에 단청색 내지는 보라색의 장식을 가리킨다(15:37; 22: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이 술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었다(15:38, 39). 예수께서는 한 때 이 ''의 형식화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기도 하셨지만(23:5), 그 역시 율법의 가르침대로 그러한 장식이 있는 옷을 입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의 옷에 장식되어 붙어 있는 바로 이 옷가의 술을 만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예수의 겉옷을 만졌다고 했는데 아프토마이라는 동사이다. 직설법 과거 중간태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혈루증 여인이 실제로 예수님의 찌찌트를 만졌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혈루증 여인이 지금 현재 나와서 만지고 있는데 시제는 과거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수밖에 없었고 이 여인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중간태는 혈루증 여인이 주님의 겉옷을 만졌더니 즉시 혈루증에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21절은 엘레겐 가르 엔 헤아우테 에안 모논 하프소마이 투 히마티우 아우투 소데소마이입니다.

마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9:21

그 겉옷만 만져도 - 그녀의 믿음이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녀는 예수의 만져주심을 받은 사람들의 병이 치료받았다는 것을 알고, 역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예수의 겉옷만을 만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

만졌다는 단어가 아프토마이인데 가정법 과거 중간태 1인칭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 이 여인은 주님의 겉옷을 만지면 혈루증이 떠나갈 것을 믿고 있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겠다 - 구원이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짐 받는 것이다. 이 여인에게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다. 소조라는 동사이다. 직설법 미래 수동태 단수 1인칭이다. 이 여인은 실제로 고침 받을 것을 믿고 있었다. 미래 시제는 오늘부터 혈루증에서 놓임을 받아 병에서 해방될 것을 의미한다. 수동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병이 사라질 것을 믿었다는 의미다.

22절은 호 데 이에수스 에피스트라페이스 카이 이돈 아우텐 에이펜 다르세이 뒤가테르 헤 피스티스 수 세소켄 세 카이 에소데 헤 귀네 아포 테스 호라스 에게이네스입니다.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5:30-33). 그렇다면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1)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Hill). (2)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딸아 - 이 말은 중풍병자를 보고 '소자야'(2)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한 애칭이다.

안심하라(다르세이)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으로서 예수께서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안식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23:11).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병자에게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그 여인이 완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예수가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 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 시()에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5:27-29).

부연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 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해야 한다. 구원받았다고 했는데 소조라는 동사이다. 직설법 과거 수동태를 사용했다. 현재 시제를 쓰지 않고 과거 시제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혈루증 여인은 이미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자가 주님께 나와서 고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수동태는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구원도 수동태로 이루어졌다. 나의 힘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23절은 카이 엘돈 호 이에수스 에이스 텐 오이키안 투 아르콘토스 카이 이돈 투스 아우레타스 카이 톤 오클론 도뤼부메논입니다.

마 9: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9:23

피리 부는 자들 -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대하 35:25) 사람이 죽었을 경우 피리 부는 자들을 고용해서(잔치 자리에도 종종 초청함, 18:22) 떠들게 하여 슬픔의 극한을 표현했다. 이는 빈부와 귀천을 불문하고 당연히 베풀어져야 하는 관습으로서, 유대인들의 생활 전반의 규범 서라 할 수 있는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 일지라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 부는 자와 1명의 애곡 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Lightfoot).

한편 예레미야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피리같이 소리하리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 역시 장례식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48:36). 그리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사람을 고용해서 슬픔을 애도하였다.

훤화하는 무리 - 여기서 '훤화하는'(도뤼부메논)'소동을 일으키다', '애곡 하다'는 뜻으로 상당히 곡하는 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는 점을 암시한다(17:5). 아마 이들도 역시 피리 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로서 이들은 곡을 했던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고용 인원 외에 그 슬픔 당한 집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자, 술과 고기를 얻어먹기 위해 모여든 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혼재하여 더욱 소란스러웠을 것이다(Bruce). 이런 풍습은 오늘날, 중근동 지방의 원주민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24절은 레게이 아우토이스 아나코레이테 우 가르 아페다넨 토 코라시온 알라 카듀데이 카이 카테겔론 아우투입니다.

마 9: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9:24

물러가라 - 예수의 단호한 명령으로서 그들의 애곡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낸. 이는 이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give place, KJV)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하여 회당장의 딸이 실제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假死) 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Olshausen), 이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기 전 회당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음을 통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5:35; 눅 8: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실 때도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던 것이다(11:11).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에는 놓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녀는, 수의 능력에 의해 정복될 수밖에 없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죽음의 권세에서 일어나게 되라라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은 종종 '죽음'에 비견되나 절대적 절망인 '비존재'(nonexistence)의 상황을 일컫지는 않는다(12:2; 11:11; 고전 15:6, 18).

저들이 비웃더라 - 이는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서 피리 불며 곡하기 위해 왔던 자들이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며 멸시하였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특별히 '웃더라'(카테겔론)는 말은 직설법 미완료 시제로서 한 번의 조(嘲笑)가 아닌 계속 반복해서 추근거리며 경멸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란 흔히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좋아하지 않는 그런 진리를 비웃고 조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자기의 나아가야 할 길을 충실히 지키며 주의 사역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25절은 호테 데 엑세블레데 호 오클로스 에이셀돈 에크라테센 테스 케이로스 아우테스 카이 에게르데 토 코라시온입니다.

마 9: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9:25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 이 무리들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애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다기보다 의무감에서나 단순히 돈을 받고 울어주는데 지나지 않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예수가 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고 야유(揶楡)하는 저속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속(卑俗)하고 믿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비웃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악 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비밀에 부치시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 무리들을 다 몰아내셨으나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던 5인의 증인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양친)을 대동(accompaniment) 하시고 죽음의 현장에 들어가셨다(5:40).

소년의 손을 잡으시매 - 소녀의 아비인 이 직원은 예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다. 마가는 이때 예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5:41; 눅 8:54, '아이야 일어나라'). 실로 예수의 손길인 것이다.

일어나는지라 -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이 죽은 소녀의 목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생명뿐이다. 따라서 죽음이 점령하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이 죽음 앞에서 무슨 힘을 쓸 수가 있는가? 죄와 범법(犯法)로 죽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만 영적인 생명을 회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26절은 카이 엑셀덴 헤 페메 하우테 에이스 홀렌 텐 겐 에케이넨입니다.

마 9: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9:26

그 소문이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전능하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는 그 사역은 온 사방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온 땅'이란 저자 마태의 시각이 항상 성지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으로 볼 수 있다(Nosgen).

한편 예수께서 가능하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복음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성공적인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워야 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릴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 이적의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과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이같이 비밀을 요구하신 것 역시 믿지 않는 패역한 무리를 고려 하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

 

 

[마태복음 8장 헬라어 강해설교]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마 8:5-13)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8장 헬라어 강해 설교 중에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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