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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유대인 성경문화]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왜 살리셨을까?

르호봇 2021. 9. 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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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유대인 성경 문화 중에서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왜 살리셨을까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인 성으로 들어가실 때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의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아들을 과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누가복음 성경 문화를 통해서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린 이유에 대해서 깨달아 보겠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왜 살리셨을까?

 

11절 카이 에게네토 엔 테 헥세스 에포류에토 에이스 폴린 칼루메넨 나인 카이 쉬네포류온토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히카노이 카이 오클로스 폴뤼스 

12절 호스 데 엥기센 테 퓔레 테스 폴레오스 카이 이두 엑세코미제토 테드네코스 휘오스 모노게네스 테 메트리 아우투 카이 아후테 엔 케라 카이 오클로스 테스 폴레오스 히카노스 쉰 아우테

눅7:11-12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이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이다. 귀신 들린 자, 각색 병든 자를 고쳐 주는 것과 달리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내는 기적은 온 인류의 근본적인 장애물인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전능자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 살아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의 공생애 사역의 마무리도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는 기적으로 종지부를 찍으셨다. 이를 볼 때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 가운데 최고의 정점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의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다시 살려 내신 기적과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기적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날 최종적인 기적으로 향하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가복음의 기자인 누가는 예수님이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고쳐 주신 곳의 도시 이름이 나인 성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북쪽의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사역하신 예수님의 행적은 사복음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방문하신 도시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두루 나니셨다.’고만 기록하기도 한다.

23절 카이 페리에겐 홀렌 텐 갈릴라이안 호 이에수스 디다스콘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아우톤 카이 케륏손 토 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카이 데라퓨온 파산 노손 카이 파산 말라키안 엔 토 라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누가가 나인 성이란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앞으로 그곳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일종의 복선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인은 히브리어로 (나임)인데, 이것은 즐겁다를 뜻한다. 나인 성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잇사갈 지파에 속한 곳인데, 아버지 야곱이 잇사갈을 축복할 때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14절 이사카르 하모르 가렘 로베츠 베인 하미쉐프타임

15절 바야르 메누하 키 토브 베에트 하아레츠 키 나에마 바예트 쉬케모 리세볼 바예히 레마스 오베드

창49:14-15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잇사갈을 향한 축복에서 아름답게 여기고는 히브리어는 (나에마 5276)로 되어 있는데 나인 성의 히브리어 이름인 나임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모두 유쾌하다, 즐겁다를 뜻하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즐거움의 땅 잇사갈에 그것도 즐거움 자체를 의미하는 나인성에 즐거움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것은 과부의 외아들이 죽자 과부의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겨 허다한 마을 사람들이 장례 행렬에 참여한 것이다. 예수님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슬픔, 비탄, 죽음으로 가득한 나인(즐거움)성을 심방 오신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인 성이란 도시의 이름을 기록한 저자 누가의 의도는 즐거움의 도시인 나인 성 전체를 덮어 버린 슬픔과 죽은 청년을 다시 살려 내심으로 즐거움을 다시 회복시키신 예수님의 기적을 드라마틱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남편이 죽고 외아들인 장남의 보호 아래 살아갔을 것이다. 남편의 모든 유산은 외아들에게 돌아갔을 텐데, 문제는 이 외아들이 죽으면서 발생했다. 외아들의 유산이 자연스럽게 남편의 형제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외아들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과부는 아들의 죽음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사회적 보호막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과부의 딱한 처지를 이해했는지, 과부 외아들의 장례 행렬에는 나인 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주었다.

12절 호스 데 엥기센 테 퓔레 테스 폴레오스 카이 이두 엑세코미제토 테드네코스 휘오스 모노게네스 테 메트리 아우투 카이 아후테 엔 케라 카이 오클로스 테스 폴레오스 히카노스 쉰 아우테

눅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당시의 장례 절차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확실히 구별되었는데, 무덤까지 시체를 운구하는 것은 남자가, 이후 무덤에서 시체에 향유를 바르는 것은 여자들이 맡았다. 나인 성 장례 행렬에서 마을의 남자들이 시체의 운구를 맡고 장례 행렬의 끝에 죽은 외아들의 어머니와 여인들이 따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인 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장례 행렬 현장에 친히 찾아오셨다. 흔히 본문을 읽으며 죽은 청년을 다시 살리신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먼저 외아들의 죽음과 함께 하루아침에 막막한 처지가 된 과부에게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먼저 장례 행렬의 맨 뒤에서 하염없이 흐느끼는 과부에게 찾아가 위로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13절 카이 이돈 아우텐 호 퀴리오스 에스플랑크니스데 에프 아우테 카이 에이펜 아우테 메 클라이에

눅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과부를 위로하신 후에 예수님은 죽은 외아들의 시체를 운구하는 장례 행렬의 맨 앞으로 다가가셨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을 살려 내는 기적을 행하셨다.

14절 카이 프로셀돈 헵사토 테스 소루 호이 데 바스타존테스 에스테산 카이 에이펜 네아니스케 소이 레고 에게르데티

눅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청년이 살아나자 예수님은 그냥 가시지 않고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다시 장례 행렬의 맨 뒤에 있는 과부에게 가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첫 번째 관심은 바로 죽은 청년보다 과부에게 있었던 것이다.

15절 카이 아네카디센 호 네크로스 카이 에륵사토 랄레인 카이 에도켄 아우톤 테 메트리 아우투

눅7: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살리심으로 외아들의 죽음과 함께 사회적 죽음을 당한 과부를 살려 내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는 동안 과부와 문둥병자, 눈먼 자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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