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히브리어강해 설교

[창세기 1장 히브리어 설교]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창 1:1-4)

르호봇 2021. 3. 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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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1장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시작과 끝이며 처음과 나중이며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주님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이 세상이 창조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며 구원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함께 하셨던 그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영원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부터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신부로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영적인 신부수업을 받으면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마지막으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고 영적인 신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창 1:1-4)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처음에 창조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이 세상에 함께 하시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시작을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함께 역사하셔서 만물을 창조할 때에 같이 사역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조사역의 말씀을 가지고 영적으로 우리들에게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나의 인생에도 적용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은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베에트 하아레츠입니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의 처음 시작 부분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시작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베레쉬트의 시간을 창조하게 됩니다. 이 시간이 시작되면서 유한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유한한 시간은 사라지고 무한한 시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영원입니다.

 

태초에’라는 단어는 베레쉬트 7225입니다. 처음, 시작, 근본, 이라는 뜻입니다. 태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 세상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근원이 되셔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창조론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처음으로 이 세상을 만드셨는데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나의 시작은 어디부터 시작되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탄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에도 태초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가 신약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베레쉬트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엄밀히 따져서 창세기 1장 1절의 베레쉬트와 요한복음 1장 1절의 베레쉬트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가 더 앞선 태초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를 만들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들 때 예수님께서도 함께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거짓 이단들은 예수님을 피조물로 성부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창조하시니라’라는 단어는 바라 1254 동사 칼(능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창조하다, 만들다, 조각하다, 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세심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창조입니다.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후회하심이 없이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절대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잘못되었다고 고치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능동태입니다. 후회함이 없이 이 세상을 무에서 유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은 베하아레츠 하예타 토후 바보후 베호쎄크 알 페네 테홈 베루아흐 엘로힘 메라헤페트 알 페네 하마임입니다.

 

1:2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절이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면 2절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됩니다. 빛이 없었기 때문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단어는 루아흐 7307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역사, 생명, 기운, 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는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의 역사는 없었습니다. 전혀 빛이 없는 세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운행하시면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생명을 불어넣어 숨을 쉬게 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운행하시니라’라는 단어는 라하프 7363 VPPAFS동사 피엘(강조능동) 분사능동 여성 단수입니다. 알을 품다, 운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둠에 휩싸여 있는 땅을 운행하시면서 보호하시고 배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닭이 알을 품듯이 이 세상을 품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둠에 있는 땅을 보호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강조능동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데 모든 곳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11절은 케네쎄르 야이르 키노 알 고잘라이브 예라헤프 이페로스 케나파이브 이카헤후 이샤헤후 알 에베라토입니다.

 

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고 독수리의 날개 위에 새끼를 업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너풀거리며’라는 단어가 라하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법은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시제입니다. 이것은 독수리가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고 양육하여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수리도 자기 새끼를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보호하는데 하물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이 세상의 수면을 운행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땅은 인간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땅은 사람의 심령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심령에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마음이 혼돈하고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씨가 뿌려졌는데 자라 2232라는 동사입니다. 문법이 닢알(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령이 좋은 준비된 땅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의 밭을 기경하니 좋은 씨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씨가 떨어져 큰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혼돈하고’라는 단어는 토후 8414입니다. 황무지, 헛된 것, 허망,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이 땅이 공허하고 헛되며 황무지와 같은 땅이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나의 인생이 이렇게 황무지와 같고 마음이 공허하여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으로 달려가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다 보니 마음에는 항상 허황된 꿈만 꾸다가 인생이 끝나버렸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런 심령에 성령 하나님이 운행하여 주셔서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 작업을 하고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나의 삶에 공허한 마음이 들어온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운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공허하며’라는 단어는 보후 922입니다. 텅 빈, 공허한, 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땅은 아직도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텅 비어 있는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마음이 텅 비어 공허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빛이 없는 사람들은 마음이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려도 마음이 공허하여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가 천지를 만들었을 때 아직 빛이 임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때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땅을 기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공허하고 마음이 텅 비어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 하나님은 운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도 이런 심령들을 찾고 계십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심령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들을 찾아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단어는 테홈 8415입니다. 깊은 바다, 깊은 웅덩이,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훔 1949 혼란하게 하다, 편하지 못하다, 혼란에 빠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은 아직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 이것은 흑암이 깊은 바다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짙은 흑암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흑암은 혼란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마음의 땅에 흑암이 자리 잡고 있음으로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생각이 혼란스러우며 고민과 번민이 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빛이 임하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싸여 고민하고 깊은 수렁에 빠짐과 같이 나올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곳에 성령 하나님이 임하셔서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아직도 빛을 모르고 흑암에 싸여 있는 선택받은 백성들의 심령에 임하여 구원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세상에 있을 때에 내 힘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것 같지만 이미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 작업을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습니다.

3절은 바요메르 엘로힘 예히 오르 바예히 오르입니다.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의미하고 있는 빛입니다. 이 빛은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있으라고 하셔서 나타난 빛입니다. 이 빛은 가시적인 빛이 아닙니다. 가시적인 빛은 아직 없습니다. 태양과 달을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4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은바 되었다고 했는데 하야 1961 동사입니다. 닢알(수동태)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아니면 절대 이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이 함께 하셔서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또한 그 안에는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빛이 땅에 있을 때에 생명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현재 땅은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기 때문에 생명의 빛이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빛이 있으라고 했는데 바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오르 216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말씀합니다. 이 빛은 사람들의 빛이며 가시적인 빛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이 아니라 속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입니다.

 

빛이 있으라’라는 단어는 하야 1961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단축형입니다. 임하다, 성취하다, 이루다, 얻다, 라는 뜻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빛을 이 땅에 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흑암이 있는 세상에 빛이 임하기를 소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단축형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임하기를 원하시고 이들에게 빛이 임하여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선택받은 백성들을 얻게 됩니다. 이 빛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심령에 머물러 있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있습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빛이 있었고’라는 단어는 하야 1961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임하다, 성취하다, 이루다, 얻다, 라는 뜻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이 빛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빛이 순종하여 즉시로 땅에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와우접속사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땅에 빛을 비춤으로 생명들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이 빛이 땅에 비추지 않았는데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빛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성취하신 일입니다. 이 빛이 비치어짐으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빛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바로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빛입니다. 이 빛이 현재 흑암에 싸여 있는 심령들에게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공허하여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이 빛이 비치게 됩니다. 이 빛이 들어가면 마음이 공허하거나 헛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심령이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빛은 아무나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4절은 바야르 엘로힘 에트 하오르 키 토브 바야베델 엘로힘 베인 하오르 우베인 하호쎄크입니다.

 

1:4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이 빛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을 기준으로 빛과 어둠을 나누고 있습니다. 빛에 거하는 자들과 어둠에 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둠들은 자신들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나누었기 때문에 빛을 거부한 것입니다.

 

나누사’라는 단어는 바달 914 와우접속사 동사 히필(사역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구별되다, 쫓아내다, 분별하다, 갈라내다, 절교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과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갈라내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기준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통하여 거룩한 백성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역능동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빛을 통해서 가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와우접속사는 시제를 바꾸어 해석하기 때문에 미완료이기 때문에 완료로 해석합니다. 그러면 빛과 어둠으로 갈라지고 나면 서로 오고 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처럼 음부에 떨어진 부자도 이쪽으로 올 수 없고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도 저쪽으로 갈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결국 타락한 백성들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듯이 빛에 거하지 못하도록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은 어둠에서 살게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교된 상태를 말씀합니다.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어둠에 비쳤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의 심령에는 어둠만 있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탈람바노 2638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입니다. 깨닫다, 잡히다, 얻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붙잡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직설법은 실제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 시제는 영원 전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의 심령은 어둠으로 붙잡혀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마지막 날에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이 빛을 거부하고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이미 이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깨닫지 못하도록 계획된 백성입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에 빛을 비추어주고 있지만 이미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깨닫지 못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께서는 빛에 거할 자와 어둠에 거할 자를 갈라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 3:19-21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어둠에 있는 자들의 정죄는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게 되고 빛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자신의 율법의 행위가 들어 날까 봐!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는데 그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심령에 받은 자들은 시작도 예수님과 함께 하고 끝도 예수님과 함께 맺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내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나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선포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히브리어강해]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삼상 17: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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