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민수기 6장 히브리어 강해 설교 중에서 제사장의 축복 기도문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을 위 하여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축복을 받게 됩니다. 교회의 목회자들도 설교를 마친 후에 축복을 성도에게 선포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제사장의 축복 기도문을 배워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축복을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제사장의 축복 기도문(민 6:22-27)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게 됩니다. 22절은 바예다베르 아도나이 엘 모쎄 레모르입니다.
민 6: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22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릴 축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자 선지자인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축도는 오직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할 수 있었다. 즉 모세와 아론은 각각 그 한계를 지녔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약 시대의 모세와 아론의 역할을 홀로 온전히 감당할 거룩한 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곧 우리의 영원한 왕이자 선지지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영적 이스라엘 백성 된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 선언을 받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23절은 다베르 엘 아하론 베엘 바나이브 레모르 코 테바라쿠 에트 베네이 이스라엘 아모르 라헴입니다.
민 6: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6:23
이의 중보자인 제사장을 선택하시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아래 언급된(24-26절) 축복을 선언할 권한은 오직 아론과 그 아들들, 곧 제사장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그 축복은 제사장 스스로의 권위에 기초하지 않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사장은 매 축복의 내용을 선언할 때마다 '여호와는'(예호와)이란 말을 전제한 후 각종 축언을 베풀어야 했다.
따라서 제사장들의 축복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임하신 그 특별한 권위에 전적 의존하고, 나아가 그 권위로 말미암아 그 축복의 내용이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게 후일 유대 랍비들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있다고 한다.
즉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을 주시는 자는 그 제사장이 아니라, 그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축복하여 - '축복하다'(바라크)는 말은 '하나님을 송축하다', '무릎을 꿇다', '은혜로 복주다', '풍성하게 하다'란 의미 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신적인 복의 선포와 그 선포가 지니는 긍정적이고 풍성한 영향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물론 신(神)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채 개인이나 공동체에 '축복'이 선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간을 복(福) 되게 하는 근원이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그 모두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 아래 놓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말의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이 말의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즉 (1)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善)을 베푸심으로써 그들에게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와 풍성함을 가리킬 때(신 7:12-16)와 (2)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자가 타인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고자 할 때 기원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창 14:19). 본문에서는 위의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다.
24절은 예바레케카 아도나이 베이쉐므레카입니다.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6:24
여호와는 - 본 축도문(24-26절)에 이 말이 세 번 언급된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주체자는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축도문의 시적(詩的) 운율상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볼 때 본 축도문에 '여호와'란 신 명칭이 세 번 언급된 것은 (비록 그것이 당 시대의 모세와 아론 및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가리어져 있었을지라도) 분명 삼위(三位)로 존재하시되 일체(一體)로 역사하시는(요일 5:8) 삼위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음에 틀림없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그런 견지에서 혹자들은 본 축도문에 나오는 '여호와'(예호와)란 신 명칭의 악센트가 각기 달랐다고 한다(Mattthew Henry's Commentary).
복을 주시고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이시자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계약자로서 그들에게 '복'(베라카), 곧 현세적이고 내세적인 모든 복을 주시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 '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과 지혜로 볼 수 있을 것이며(시 16편). 또한 물질적인 번영과 많은 자녀 및 건강과 장수 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창 24:1; 시 127:3). 이처럼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부르신 당신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아낌없이 풍성한 영육 간의 복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진정 복의 근원자이시다.
지키시기를 원하며 - 여기서 '지키다'(솨마르)는 말은 원래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의미가 발전하여 '세심하고도 철저한 보호와 보존', '주의 깊게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짐'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시 37:28)뿐 아니라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 및 전쟁으로부터의 보존(시 33:19; 76:3)까지를 의미한다.
사실 향후 죽음의 땅 광야를 행진해야 하며 사나운 이방 세력과 맞부딪쳐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실제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목적하고 광야 같은 세상을 행진해가야 하는 우리에게도 간절히 요청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없이는 이 세상에서 한시라도 쓰러지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25절은 야에르 아도나이 파나이브 엘레이카 비후네카입니다.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6:25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그분의 '성품'과 전 인격을 상징하는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rmophism)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거나 감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의미한다(레 17:10; 신 31:17,18; 욥 13:24; 욜 2:6). 반면에 그분의 '얼굴'이 한 개인 또는 어떤 공동체를 향하여 돌려진다는 것은 바로 생명과 구원과 희열이 그위에 찬란히 비췬다는 것을 의미한다(Keil, Baumgarten, Pulpit Commentary; 시 27:1; 44:3; 잠 16: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 방향은 곧 인간 생존의 열쇠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간직한 채 지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당신의 그 사랑과 은혜와 보호와 평강의 얼굴을 항상 돌리시겠다고 축복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비취다'(오르)는 히필 사역 능동 미완료를 사용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의 얼굴의 빛을 비추어 주실 것을 말한다.
'영광스러운'(glorious)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는 말로써, 곧 당신의 영광스러운 광채가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에게로 향하여 짐을 의미한다. 실로 캄캄한 곳에서는 미미한 촛불 하나가 매우 값진 역할을 감당하는데, 하물며 의와 영광의 태양이신 하나님께서 어둡고 지친 우리 영혼에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데 어찌 벅찬 감격과 생의 희열이 솟아나지 않겠는가?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다. 여기서 '은혜'(하난)란 본래 '구부리다', '아랫사람에게 몸을 굽히다'는 의미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은혜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라 할 수 있다. 그런 고로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엡 2:4,5).
26절은 이사 아도나이 파나이브 엘레이카 베야셈 레카 솰롬입니다.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6:26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 여기서 '향하여 든다'(나사)는 말은 '받아들이다', '열망하다', '공급하다'는 뜻을 지닌 말로써 곧 '열정적으로 바라보다', '계속해서 주시하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베푸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25절의 '비취사'란 말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묘사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귀중한 대상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계속 주시함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 자는 하나님의 그러한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그 어떤 위협과 도전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며 아울러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롬 8:31-39).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평강'(솰롬)은 '안전', '행복', '건강', '번창', '평안', '우정'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불화)이 없는 상태', 곧 적막한 평화를 의미하지 않고, 기쁨과 생(生)의 환희가 샘솟듯 솟아오르는 역동적인 평화를 가리킨다(사 55:12).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평강'은 모든 기쁨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축복의 최고 절정을 이루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선포한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평화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죄와 불의를 멸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억제할 수 없는 참 평강을 맛보게 하셨다(사 52:7; 53:5; 행 10:36; 골 1:20).
27절은 베사무 에트 쉐미 알 베네이 이스라엘 바아니 아바라켐입니다.
민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6:27
내 이름으로 -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대변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명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전 의지와 인격을 내걸고 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내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셨을 뿐 아니라(출 3:14). 축복 선언(24-26절) 중에도 거듭 언급하셨던 '여호와'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렇게 절대 거룩한 당신의 이름을 전제하여 제사장들로 하여금 축복을 선언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전 인격과 명예를 걸고 그 축복 내용을 그 백성에게 반드시 이루실 것을 표명하셨다. 또한 이것은 오직 당신의 이름에 의해서 그 축복이 선포될 때만이 그 속에 담긴 내용이 유효하게 작용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고로 진정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빠진 축복은 공허한 주문(呪文)에 불과하다.
내가... 복을 주리라 - 바라크라는 동사로서 피엘 강조 능동 미완료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이 축복을 선포한 대로 그대로 계속해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유일한 복의 주체자가 되심을 분명히 선언하는 구절이다. 즉 비록 제사장에 의해 축복이 선포되지만, 진정한 선포자요 수여자(授與者)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 축복은 가장 완전하며 또한 모든 이들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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