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열왕기상 18장 히브리어강해]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왕상 18:20-29)

르호봇 2021. 2. 14.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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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열왕기상 18장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합 왕 때에 영적으로 타락하다 보니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가 득세하였습니다. 엘리야와 같은 참 선지자는 핍박을 받아 산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니 제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거짓 선지자와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치르게 합니다. 지금도 아마겟돈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와 같은 거짓 복음을 가진 자들이 성도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핍박하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엘리야와 같은 참 선지자가 되어 복음의 빛을 세상에 비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로 응답했습니다. 복음을 가진 성도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응답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엘리야와 같이 아마겟돈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왕상 18:20-29)

 

히브리어 성경 원문으로 보겠습니다. 파란색은 히브리어 알파벳 상형문자입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습니다. 20절은 바이쉘라흐 아하아브 베콜 베네이 이스라엘 바이케보츠 에트 하네비임 엘 하르 하카르멜입니다.

 

왕상 18: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18:20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모으니라 - 여기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베네이 이스라엘)이란 이전의 세겜 총회(12:1)에 상응하는 말이다(Montgomery).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집단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21절 이하의 내용으로 보아 갈멜 산에는 이 대표자 집단들이 집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절은 당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전국 각지에 퍼져 활동하였음을 암시한. 왜냐하면 아합이 이들을 집합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기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무렵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전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을 모두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21절은 바이가쉬 엘리야후 엘 콜 하암 바요메르 아드 마타이 아템 포세힘 알 쉐테이 하세이핌 임 아도나이 하엘로힘 레쿠 아하라이브 베임 하바알 레쿠 아하라이브 베로 아누 하암 오토 다바르입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18:21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 원문에서 '두 사이에서''알 쉐테이 하세입핌' 즉 '두 의견(opinion)으로(혹은 사이에서)'이다.

그리고 ''머뭇머뭇하려느냐'는 '파사흐' 즉 '절뚝거리다'이다. 그러므로 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어느 때까지 두 의견으로 나뉘어 절뚝거리려느냐'는 뜻이 된다.

이는 곧 단순히 당시 백성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하기보다는 분열상을 지적, 해소를 촉구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승배를 혼합하려는 세력과 순수 여호와 신앙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을 것이다(Bahr, Keil). 그런데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그 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백성들은 왕실의 강압적 우상 숭배 정책에 눌린 나머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내팽개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를 격발(激發)시켰던 셈이다(6:24; 3:16).

한편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을 향해 과감한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계시니 우리는 스스로의 미지근한 태도를 중용(中庸)이라는 말로 미화시켜서는 아니 될 것이. 다시 말해서 참된 중용의 도()란 애매한 중간치기 내지는 비굴한 기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더 경건한 제3의 길을 따름인 것이다.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 이 장면을 수 24:16 이하와 비교해 보면 아합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즉 여호수아 당시 '하나님과 다른 신 중 과연 누구를 섬길 것인지 결정하라'는 요구에 그 시대의 백성들은 즉'다른 신을 섬기다니 말이 되는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아직껏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6: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항상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3:15)가 아닌가?

22절은 바요메르 엘리야후 엘 하암 아니 노타르티 나비 라아도나이 레바디 우네비에이 하바알 아르바 메오트 바하미쉼 이쉬입니다.

왕상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18:22

나만 홀로 남았으나 - 나만 홀로 남았으나! 이 말은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가 정말 단 한 명만이 남았음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다만 지금 여호와 선지자로서 활동하는 자는 엘리야 자신 홀로이며, 이제 그 혈혈단신으로 다수의 바알 선지자와 맞서게 되었다는 극적인 대조에 강조점이 있을 뿐이다(Hammond, Montgomery).

리고 이렇게 이해하여야만 앞서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4)가 그동안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리라는 불필요한 추측(Thenius)을 삼갈 수 있게 된다.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탓이다.

19절에는 이교(異敎) 선지자들의 총수가 850인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본절에는 오직 450인만 언급되어 있는 탓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더군다나 25절과 40절에서도 오직 '바알의 선지자'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 정리될 수 있다.

(1)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 산의 대결에 참여하지 않았다(25). 따라서 그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40).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바알의 선지자'로 통칭(通稱)될 수 있다. (3) 그렇다면 아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일부(아세라의 제사장?)를 보내지 않은 탓에 갈멜 산 대결에는 450인의 바알 선지자만이 참석하였을 것이다(Bahr, Keil ).

23절은 베이테누 라누 쉐나임 파림 베이베하루 라헴 하파르 하에하드 비나테후후 베야시무 알 하에침 베에쉬 로 야시무 바아니 에에세 에트 하파르 하에하드 베나타티 알 하에침 베에쉬 로 아심입니다.

왕상 18: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18:23

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 신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희생 번제(犧牲燔祭)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들 모두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희생 번제는 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막론하고 고대 팔레스틴에 있어서 예배의 기본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다(Lange).

()을 떠서 - 이에 해당하는 동사 '나타흐'는 '잘라서 조각조각으로 나누다'(cut in pieces)는 뜻이다. 이는 곧 희생(犧牲) 제사에 쓰일 제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말한다(29:17; 1:6, 12; 20:6). 나타흐 동사는 피엘 강조 능동형을 사용했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을 떠는데 조각조각 내서 번제물로 드렸다는 의미다. 이 번제물은 신약에 오실 예수의 모형을 담고 있다. 예수도 십자가에서 각이 떠지듯이 고통스럽게 양 손과 발에 대 못이 박혔다.

24절은 우케라템 베솀 엘로헤이켐 바아니 에크라 베솀 아도나이 베하야 하엘로힘 아쎄르 야아네 바에쉬 후 하엘로힘 바야안 콜 하암 바요메루 토브 하다바르입니다.

왕상 18: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18:24

이름을 부르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한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그 인격의 본질과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즉 이름과 존재는 불가 분리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그 존재의 응답을 기대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때 그 이름의 존재가 실존()한다면 필연코 응답이 있을 것이다. 본절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알이 허구 존재가 아니라면, 그 이름을 부르는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밝히리라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불로 응답(應答)하는 신 -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의 희생 제의는 제물을 불로 사르는데 초점이 있다. 즉 신이 불태워진 제물을 흠향할 때 비로소 인간의 성의가 가납(嘉納)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곧 신이 있어서 차려진 제물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불로 응답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그런데 바알은 자연력을 지배하는 신이자 태양과 불의 신이었다. 그러므로 불로 응답하는 일은, 바알이 참신이라면, 그의 전문 분야와도 같다. 런데도 바알은 끝내 침묵하고 말았으니(25-29)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한편 이처럼 그 신의 가장 핵심 요소를 공략하여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찍이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써 애굽의 거짓 신들을 무색하게 한 것과 비견된다(7:4-12:34).

25절은 바요메르 엘리야후 리네비에이 하바알 바하루 라켐 하파르 하에하드 바아슈 리쑈나 키 아템 하라빔 베키르우 베솀 엘로헤이켐 베에쉬 로 타시무입니다.

왕상 18: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18:25

너희는 많으니 먼저... 부르라 - 본절은 결과적으로 엘리야의 승리(30-40)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즉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해 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자신감을 드러내어 보였다. 다시 말해 우선권을 잡은 바알 선지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던 반면(26-29) 엘리야의 승리를 더욱 값지고 위대한 것으로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하여 준 셈이다.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송아지를 잡아서 불을 붙이지 말라고 한다.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카라라는 동사인데 칼 능동형 명령법이다. 엘리야는 거짓 선자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다. 너희 신이 진짜라면 불이 내리게 해 보라는 것이다. 복음을 가진 우리도 거짓 복음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26절은 바이케후 에트 하파르 아쎄르 나탄 라헴 바야아슈 바이케르우 베솀 하바알 메하보케르 베아드 하초호라임 레모르 하바알 아네누 베에인 콜 베에인 오네 바예파세후 알 하미즈베아흐 아쎄르 아사입니다.

왕상 18: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18:26

아침부터 낮까지 - 여기서 '아침'(보케르)'이른 아침', 즉 동이 트고 난 직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회합을 갖은 이유는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초하르)은 다음 절에서 '오정'으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 그러므로 바알 선지자들은 이미 5-6시간 정도를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뛰논 셈이다.

응답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아나'는 본래 '보다', '향하다'는 뜻이다. 칼 능동태 명령법을 사용한다. 바알 선지자들이 바알신에게 강청하여 불로 응답해 주기를 원한다는 의미다. 열심히 불렀지만 바알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거짓 신은 절대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들을 외면치 말고 사랑과 관심을 갖고서 '쳐다봐 달라'는 간절한 염원(念願)의 말임을 알 수 있다.

뛰놀더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사흐'는 본래 '절뚝거리다'는 뜻으로 이미 21절에 나온 단어이다. 피엘 강조 능동형을 사용하고 있다. 바알 선지자들이 미친 듯이 뛰고 있음을 의미한다. 열심히 바알에게 간청하고 있지만 불로 응답을 내리지 않으니 마음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이 의견이 나뉘어 있다.

(1)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광란(狂亂)의 춤(28)을 비꼬아 표현한 것이다(Pulit Commentary). (2)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춤의 형태가 실제로 절뚝거리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Davis). 이상의 두 견해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엘리야가 계속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으로 보아(27) 첫 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상 춤은 자주 예배 의식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나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의 처녀들이 포도밭에서 춤춘 것, 법궤 앞에서 춤을 춘 다윗 등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출 15:20; 21:16-24; 삼상 18:6; 삼하 6:14). 그러나 이러한 춤도 참된 찬양의 대상자에 대한 진솔한 경외의 표현이 아니라면 본절에서 보듯 이는 한갓 광란의 몸짓에 불과하고 마는 법이다

27절은 바예히 바초호라임 바예하텔 바헴 엘리야후 바요메르 키르우 베콜 가돌 키 엘로힘 후 키 시아흐 베키 시그 로 베키 데레크 로 울라이 야셴 후 베이카츠입니다.

왕상 18: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18:27

저는 신인즉 - 이처럼 '바알은 신이니까'로 서두를 연 본절은 그러나 신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즉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오정에 이르기까지 간절히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바알 우상의 허구성을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조롱조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묵상하고 있는지 - 바알 선지자들이 그토록 발버둥 치고 있는 마당에(26, 28) 알은 멀지 감치 물러 앉아 묵상에 잠겨 있다고만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없을 것이다.

잠깐 나갔는지 - '나가다'에 해당하는 '시''옮기다', '이동하다'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잠깐 자리를 옮겼는지'의 뜻이다. 그런데 이는 '좀 쉬려고 물러갔는지' 정도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라 한다(Rashi). 하지만 신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시며 곤비치 않으시지 않는가(40:28)

길을 행하는지 - 여기서 ''(데레크)'여행'(대개 수일이 걸리는)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이 여행을 떠나서 자신의 경배자들의 청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 유한성(有限性)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소 부재(無所不在) 하신 분이시다(139:7-12)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무더위로 인해 한낮에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엘리야의 조롱은 바로 그러한 습관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121:3, 4).

28절은 바이케르우 베콜 가돌 바이트고데두 케미쉐파탐 바하라보트 우보르마힘 아드 쉐파크 담 알레이헴입니다.

왕상 18: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18:28

그 규례를 따라... 상하게 하더라 - 가다드라는 동사인데 히트파엘 강조 재귀를 사용했다. 자신의 몸을 자신 스스로 상하게 만들고 있다는 의미다. (14:1; 16:6; 41:5; 47:5). 그런데 본절에서 처럼 피가 흐르기까지 자해하는 습속은 피가 신비한 효능으로 신을 감동시킨다는 이교적 관념 때문이다(Plutarch).

즉 당시 이교도들은 자해와 고행이 신에 이르는 길을 여는 일종의 공로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한편 본절은 바알 선지자들의 한낮, 팔레스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의 광란을 묘사함으로써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 바알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해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지나친 금욕주의적 태도 또한 자의적(恣意的) 숭배의 소산으로 간주하여 참된 경건에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골 2:20-23).

29절은 바예히 카아보르 하초호라임 바이트나베우 아드 라알로트 하민하 베에인 콜 베에인 오네 베에인 카쎄브입니다.

왕상 18: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18:29

진언을 하여 - 이에 해당하는 '네부아'의 문자적 뜻은 '미친 듯이 예언하다'이다. 따라서 이 예언이 참된 예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실 이러한 예언은 광란에 미친 행위자들이 한숨과 신음을 토로하는 현상에 다름 아니다 (Movers). 그리고 이러한 예언이란 대개 비인격적인 외적 조작, 즉 주문(呪文)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려는 주술적 성격이 짙게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의 진언은 일종의 주문, 신비한 웅얼거림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저녁 소제(素祭) 드릴 때까지 - 요세푸스의 기록(Josephus, Antiq., XIV, 65))따르면 이스라엘 인들이 저녁 소제를 드리던 시간은 오늘날의 오후 3시쯤(유대력의 9)에 해당한다고 한다(A. Edersheim, Pulit Commentary). 이때 신약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과도 일치한다(3:1). 한편 '소제'(민하)란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비교적 간단한 제사이다.

이 제사에는 희생 제물이 아닌, 떡과 과자가 바쳐졌다(29:28-41; 28:3-8). 이 소제의 의미는 백성들이 자신의 일상적이고 전체적인 삶을 하나님께 위탁한다는 뜻이다

아무 소리도...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 이 부분에는 '전혀 없다'는 뜻인'아인'이 세 번이나 거듭된다. 이 단어는 26절에도 두 번이나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점층법적 강조의 효과를 준다. 아인 부정사는 지금 현재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바알 신에게 아무리 호소를 해도 절대 응답은 없다. 거짓 신이며 죽은 신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 히브리어주석강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언(사5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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