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4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오병이어 기적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배고픔을 느낄 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것도 채워주시지만 육적인 것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먹고 영혼의 굶주림이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육적인 것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성도의 영육을 채워주시는 분임을 믿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병이어 기적 사건(마 14:13-21)
13절은 카이 아쿠사스 호 이에수스 아네코레센 에케이덴 엔 플로이오 에이스 에레몬 토폰 카트 이디안 카이 아쿠산테스 호이 올크슬로이 에콜루데산 아우토 페제 아포 톤 폴레온입니다.
마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 본문에서 예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 내용은 '요한의 처형'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의 권능에 대한 소문이 신하들에 의해 헤롯에게 보고되었고 헤롯이 그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소식이다(1절).
따라서 3-12절의 내용은 부록적(附錄的) 설명임에 분명하다. 3절에 보면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헬라어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 '가르'는 어떤 사실에 덧붙여 설명하고자 할 때 쓰이며, 반면에 3절의 초두에 나타나는 '데'(그리고)는 어떤 일을 새롭게 전개시키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L. Cope).
따로 빈 들에 가시니 - 세례 요한의 사후(死後) 헤롯이 이번에는 자신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것과 헤롯의 미신적인 두려움과 그가 자신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눅 9:9)는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해롯의 관할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벳새다 광야로 가셨다. 이때부터 예수의 사역은 주로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 주위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과 이적들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그 절정에 속하는 것이며 그 이후의 사건들은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의를 갖는다.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 예수께서는 전에도 바리새인들의 적의(敵意)를 피해 떠나신 적이 있는데(12:15), 이제는 헤롯 안티바스를 피해 안식과 묵상을 위해 떠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피하신 또 다른 이유는 12제자들이 선교 여행을 마치고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막 6:30; 눅 9:10).
그 제자들은 영. 육의 휴식기가 필요했고 자신들의 선교 방법에 대한 검토 및 예수께 복음의 비빌을 좀더 깨우침 받아야 했다. 한편 누가는 예수가 가신 빈들이 벳새다(눅 9:10). 즉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벳새다 율리우스(Bethsaida Julius) 지방에 속한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 해변을 따라서 도보(徒步)로 예수를 좇아갔을 것이다.
무리들은 선지자로 여기던 세례 요한의 처형 소식을 듣고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다가 예수 계신 곳을 듣고 그분에게서 영혼의 쉼을 얻고자 찾아 나선 것 같다.
14절은 카이 엨셀돈 호 이에수스 에이덴 폴륀 오크슬론 카이 에스플랑크니스데 에프 아우투스 카이 에데라퓨센 투스 아르호스투스 아우톤입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4:14
예수께서 나오사 - 예수께서는 자신이 공개됨으로써 대적자들의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자들과 조용한 무리를 향해 나아오셨다. 이것은 바로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결단에 대해 선택,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가 응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큰 무리 - 직역하면 '많은 무리'라 된다. 한편 이 사람들의 수(數)를 21절과 막 6:44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숫자 계산에 들지 않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다면 이 무리는 적어도 만 오천 내지 이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불쌍히 여기사 - (스플랑크니조마이). 헬라어의 이 동사는 유대인들이 참으로 애끓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디아스포라(Diaspora)상태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생겨났다고 한다.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는 말은 내장 혹은 심장 등 인간의 내부로부터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내장'(스플랑크나)을 인간의 깊은 감정이 거하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에 대한 긍휼'은 예수의 전인격성을 대표하는 속성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간절한 정(情)이상의 애틋한 긍휼의 마음이다.
한편 예수의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긍휼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행위로써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경우 사람의 믿음을 보고서 행하시는 적도 있지만 흔히는 그 자신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병 고침의 이적을 행하셨다.
15절은 옵시아스 데 게노메네스 프로셀돈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레곤테스 에레모스 에스틴 호 토포스 카이 헤 호라 에데 파렐덴 아폴뤼손 투스 오크슬루스 히나 아펠돈테스 에이스 타스 코마스 아고라소신 헤아우토이스 브로마타입니다.
마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4:15
저녁이 되매 -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저녁(옵시아스)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해하였는데, 제1 저녁은 늦은 낮, 주 오후 3시부터 시작되고, 제2 저녁은 일몰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의 구절은 제1 저녁을, 23절에서는 제2 저녁시간을 가리킨다.
이곳은 빈들이오 - 빈들을 가리키는 말인 '에레모스'는 광야 혹은 한적한 곳으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살았던 곳도 이러한 곳이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와 메뚜기로 매일의 양식을 삼았던 곳도 바로 이러한 곳이었다.
따라서 마을이 없고 인적이 드문 이러한 곳에서 자연식품인 메뚜기와 석청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에 의해서 마련된 만나를 제외한 다른 떡이나 음식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헤롯은 그의 찬란한 궁전에서 귀족들과 연회를 벌렸지만 그 연회는 살인과 범죄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와 큰 무리들과 함께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빈들'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과 인간의 감사가 넘쳐나는 은혜의 땅이며, 천국잔치의 전례(前例)가 행해진 곳이다.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때가 벌써 지났으니'가 된다. 그렇다면 이 '때'란 어떤 상황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예수께서 가르침을 마칠 때, 식사할 때, 무리들을 돌려보낼 때, 밝은 시간이 지나는 때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 여러 견해들은 모두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거의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무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 어쩌면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금전만능적이고 지극히 타산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처럼 들리는 제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이다.
사실 제자들 중에는 (아마 가룟 유다일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에게 필요한 돈이 얼마쯤 남아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그 돈으로는 약 2만여 명의 무리를 먹이기에 역부족임을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무리를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方途)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16절은 호 데 이에수스 에이펜 아우토이스 우 크레이안 에쿠신 아펠데인 도테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파가게인입니다.
마 14: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4:16
갈 것 없다 - 문자적으로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 부정어 '우'가 사용되어 강압적인 부정문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것과 같은 제자들의 주장을 이 한 마디의 말로 단호히 거부하셨다. 예수께서는 해산(解散)하기를 종용하는 제자들의 말에 따라 힘없이 돌아가는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깊은 연민과 애정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실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일은 결코 필요치 않다. 정녕 예수께서는 지금도 인간이 안고 있는 그 어떤 문제일지라도 외면치 않고 당신의 넓은 품 안으로 받아들이고 계신다(요 14: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들은 '스스로 사 먹게 하소서'라고 말하였고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그것을 주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명령에 쓰인 동사 '도테'는 '주다'란 뜻의 '디도미'의 제2 과거형으로,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이 요구됨을 의미한다.
실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제자들에게는 무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할, 그것도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거의 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굶주린 군중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것과, 또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해진 것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책임은 무리들에게 물질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라고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셨듯이(요 21:15-17)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책임은 현존하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는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심령이 굶주리고 메마른 자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할 할 책임이 있다.
17절은 호이 데 레구신 아우토 우크 에코멘 호데 에이 메 펜테 아르투스 카이 뒤오 익뒤아스입니다.
마 14: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제자들은 예수께 말하기를 자신들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무능력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돋보일 수 없다. 인간의 무능을 인정할 때 예수님이 일하신다. 우리도 내가 할 수 없음을 주님께 고백해야 한다. 나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할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난다.
18절은 호 데 에이펜 페레테 모이 아우투스 호데입니다.
마 14: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4:18
내게 가져 오라 - 마태만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떡의 끝없는 분배 사건이 예수의 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을 이해치 못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에서 기적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에서부터 그것은 발생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기적의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기적의 분배자(分配者)에 불과하였다. 실로 제자들의 이러한 연약한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키 위해 제자들에게로, 교회 자체에게로 가 아니라 오로지 교회의 머리 이신 주님에게로만 자신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19절은 카이 켈류사스 투스 오클루스 아나클리데나이 에피 투스 코르투스 카이 라본 투스 펜테 아르투스 카이 투스 뒤오 익뒤아스 아나블렢사스 에이스 톤 우라논 율로게센 카이 클라사스 에도켄 토이스 마데타이스 투스 아르투스 호이 데 마데타이 토이스 오클로이스입니다.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14:19
잔디 위에 앉히시고 - 눅 9:14에 의하면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셨다고 하였고, 막 6:40에 의하면 혹 백씩 혹 오십씩 알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알았다'의 뜻인 '아나클리노'는 물론 이스라엘인들의 보통의 식사 때의 자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신령한 이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그 이적에 참여하게 될 무리들에게 먼저 '순종'과 '질서'를 요구하셨다. 한편 본문의 '잔디'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이때는 대략 3, 4월 경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우기(雨期)가 막 끝나가는 2월 중순 경부터 빈 들에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요 6:10). 더욱이 요한은 이때가 유월절(니산 월 14일)이 가까운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 6:4). 참고로 유월절 기간이 다한 이후로는 잔디가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기 시작한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이러한 행동은 유대 가정에 있어서 가장(家長)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다(롬 14:6; 딤전 4:5). 유대인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감사 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께 강도짓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할 정도로 감사의 일상화(日常化)를 가르쳤다.
바로 예수께서 이 날의 잔치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며, 제자들은 그의 시중꾼이며, 무리들은 잔치에 초대되어 온 손님들이다. 여기서 '축사하다'의 뜻인 '유로게오'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먹기 전에 하는 유대인들의 공통된 기도의 내용은 '땅으로부터 양식을 얻게 하시는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였다. 본분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 역시 그들 앞에 적은 양이나마 음식이 놓인 것에 대한 감사이지, 그 음식의 무한정한 증가를 간구한 기원에 집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드리던 기도 그대로였을 것이다(26:26; 눅 24:30).
떡을 떼어 - 떡을 떼시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예수의 손으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천 명과 여자, 어린아이가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의 근원지요, 기적이 일어난 현장이며, 떡을 떼시는 그 순간이 바로 그러한 기적이 발생한 시점(時點)이다.
예수가 행하시는 기적은 이상한 주문(呪文)이나 신기한 동작이 필요치 않는 일상적인 자연스러운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각이 계속해서 불어나며 떡 덩어리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기적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떡을 떼며'라는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이다. 그런데 이 뗀 떡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영적 생명을 위해 찢기울 생명의 떡이신 예수와 그분의 육체의 모형이라고 하는 점에 그 큰 의의가 있다(요 6:26, 27).
예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손으로 떡을 떼셨다.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의 양식을 위해서 여전히 떡을 떼어주신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의 사건을 다른 사람보다 더 가가이, 더 먼저 경험한 목격자들이며 그 목격한 사실들을 전달해 주는 증인들이다. 떡과 물고기가 전해지는 이러한 과정은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세상에 전달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20절은 카이 에파곤 판테스 카이 에코르타스데산 카이 에란 토 페리스세유온 톤 클라스마톤 도데카 코피누스 플레레이스입니다.
마 14: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14:20
다 배불리 먹고 - 겨우 목을 축이고 한 끼니를 때우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자신의 집을 찾아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떡과 물고기가 배급(配給)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배불리 먹었다'라고 하는 말은 아마도 미래에 있을 메시아 왕국의 잔치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코르타조 동사는 직설법 과거 수동태를 사용했다. 주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어 주셔서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더욱이 이는 그리스도의 몸은 온 인류의 영적 양식이 되며 모든 죄인의 죄악을 모두 사(赦)할 수 있는 큰 사랑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남은 조각 - 기름으로 모든 빈 그릇을 채운 이적(왕하 4:1-7)과 스무 개의 보리떡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100명을 먹인(왕하 4:42-44) 엘리사의 기적과 신약에서 나오는 예수의 모든 기적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용하고도 남았다'라고 하는 사실에 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에서도 병자는 그 자신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몸이 완전히 건강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러한 차고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남은 조각들은 바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의 조각들이며 주님의 사랑의 파편(破片)들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조각'은 단지 먹다가만 부스러기만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께서 나눠주시기 위해 손으로 떼 놓은 조각들까지를 포함한 말일 것이다.
열 두 바구니 - 열 두 제자가 각각 한 바구니씩 거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 남은 조각들은 12제자들의 계속되는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바구니를 뜻하는 헬라어 '코피노스'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버들가지로 만든 음식 담는그릇으로서 여행자들의 휴대용 주머니로 활용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예수께서 4천 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일급 광주리는(15:37) 헬라어 '스퓌리스'로,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 데 사용하는 갈대로 만든 광주리였다. 그리고 오천 명, 떡 다섯 개, 열 두 바구니 등의 5와 '12'라는 숫자는 '모세 오경'과 '열 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숫자로 이해된다.
결국 이러한 점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유대인에게, 4천 명을 먹인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생명이 됨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1절은 호이 데 에스디온테스 에산 안드레스 호세이 펜타키스킬리오이 코리스 귀나이콘 카이 파이디온입니다.
마 14: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14:21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 - 오병 이어의 기적 사건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만 1년 전인 유월절이 임박한 기간에 베풀어진 것으로 보인다(요 6:4). 따라서 그 당시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운집(雲集)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때 모인 무리는 성인 남자만을 계수(計數)하는 유대인의 계산법에 따라 '오천 명'이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 (파이디온, 조그마한 아이란 뜻)까지를 합산하면 1만 5천 명에서 2만 명 정도로 추산(推算)된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 최대의 군중이 운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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