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원문 설교강해 자료

[이사야 53장 히브리어주석강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언(사53:1-12)

르호봇 2021. 2. 1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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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사야 53장 히브리어 주석 강해 중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언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 못에 박혀 고통받아야 함을 예언합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고통이요 나의 죄악을 위한 고통입니다. 주님이 이런 고통을 나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언(사 53:1-12)

 

이사야 53장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파란색은 히브리어 상형문자입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습니다. 1절은 헤에민 리쉐무아테누 우제로아 아도나이 알 미 니겔라타입니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 '우리'에 대해서는 (1) '선지자 자신'(Calvin, Oehler, Stier), (2) 52:15'열방들'(혹은 이방인들, G.W. Grogan), (3) '이스라엘 백성, 특히 선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경건한 무리들'(Delitzsch, Leupold)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으나 마지막 견해가 가장 나을 것으로 본다. 믿었다고 하는 단어가 아만 동사이다. 히필 사역 능동형 완료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자는 계속해서 믿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 '우리'는 수난받는 메시아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또 저들의 고백은 거의 회개에 가까운데,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새로운 깨달음을 믿은 유대인들의 심리 상태와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2절은 바야알 카요네크 레파나이브 베카쇼레쉬 메에레츠 치야 로 토아르 로 베로 하다르 베니르에후 베로 마르에 베네흐메데후입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2

주 앞에서 - 여기 ''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의 삶의 과정은 인간들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벧전 2:4).

자라나기를(야알) - 문자적인 뜻은 '그가 자라나셨다', 과거 시제(완료)로 되어 있다. 본 동사의 시제를 따른다면 본절이 나타내는 인물은 본서 저자 이사야의 과거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세, , 예레미야 등을 거론할 수 있지만 본장이 묘사하는 종과는 비교될 수 없다.

결국 이 종은 메시아이신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자가 과거로 시제를 적은 이유는 본서 저자가 미래를 내다볼 때 자신이 예언하는 메시지의 성취를 너무나도 명백히 보고 있었으므로 자신에게는 그 일이 이미 발생한 것처럼 확신 있게 적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언적 기술법 중의 하나인 '예언적 과거'라 부른다.

마른땅... 줄기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며, 특히 '마른땅'이란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처해 있던 비천한 상황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흠모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버렸다. 유대인들도 예수를 버렸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

3절은 니브제 바하달 이쉼 이쉬 마케오보트 비두아 홀리 우케마세테르 파님 미메누 니브제 베로 하샤베누후입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3

본절에서 저자는 ''의 비하(卑下)를 좀 더 상세히 묘사한다.

멸시를 받아서 - 여기에는 거절과 배척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고난이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를 거절하고 배척했다. 고난의 ''에 대한 태도 문제에 있어서 중립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그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그를 높이거나 아니면 그를 배척하고 멸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무관심 역시 그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바자라는 동사인데 닢알 수동태 분사 수동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거절당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이런 멸시 천대를 받게 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달리게 함으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질고를 아는 - 문자적인 뜻은 '병을 잘 아는'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하여 이런저런 질병에 계속 걸렸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를 묘사하는 비유적 술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미 육체적 질병을 비유로 해서 유다의 죄악 상태를 드러낸 바 있다(1:5, 6). 따라서 성취될 구원은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이 분명하다.

4절은 아켄 홀라예누 후 나사 우마케오베누 세발람 바아나흐누 하샤베누후 나구아 무케 엘로힘 우메우네입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4

우리의 질고를 지고 - ''이 짊어진 질고와 수난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리 개념이다. 의로운 한 분이 질고와 허물과 죄악이 가득한 자들을 대신하셨다는 것이다(5:17-19). 이것은 그 '수난자'가 자기 백성을 죄의 결과뿐 아니라 죄 자체에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을 함의한다. 왜냐하면 죄와 그 결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난자'께서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안고 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는다고 생각했다. 맞으며는 나카 동사로서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때리는 수준이 아니라 죽이는 수준으로 맞은 것이다. 호팔 사역 수동형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다. 예수는 선택받은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로 정해졌다.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5절은 베후 메홀랄 미페솨에누 메두카 메아보노테누 무사르 쉘로메누 알라이브 우바하부라토 니르파 라누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5

본절은 ''이 고난 받은 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허물 때문이다. 여기 '허물'이란 단순한 실정법들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적인 법에 대해서 범죄 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그의 진노와 그 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었다.

죄들은 영원한 사망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에서 인간이 지불할 사망이란 요구가 ''에게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볼 때 여기 '찔리다', '상하' 등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사실 히브리어에서 이 두 단어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시사하는 용어들이다.

 

평화 - 이것은 단지 외적인 안녕과 조화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 곧 하나님과의 평화를 뜻한다.

나음을 입었도다 - 라파 동사로서 닢알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고통당함으로 영육으로 고침을 받았다. 수동태는 고침 받기 싫어도 고침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받은 백성은 예수만 믿으면 원죄가 완전히 사라져 고침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6절은 쿨라누 카촌 타이누 이쉬 레다르코 파니누 바아도나이 히페기아 보 에트 아온 쿨라누입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6

본절은 신학의 대요이다. 먼저,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은, 우리가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상태에 있지 못하다는 전적 부패 교리의 근거가 된다. 둘째로, 본장에서 지금까지는 나타나지 않던 '여호와'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악을 ''에게 담당시킨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근거가 된다. 셋째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시킴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필요한 것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구원 교리로 볼 수 있다.

담당시키셨도다 - 파가라는 동사로서 만나다, 다다르다는 뜻으로 선택받은 자들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담당하셨다는 의미다. 히필 사역 능동형 완료를 사용하여 이 세상의 죄를 담당할 분은 예수 한 분 외에는 없다는 의미다. 그분만이 모든 죄를 담당하고 골고다에 오를 수가 있다.

7절은 니가스 베후 나아네 베로 이프타흐 피브 카세 라테바흐 유발 우케라헬 리페네 고즈제이하 네엘라마 베로 이프타흐 피브입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7

본절은 고난에 대한 종의 태도를 요약해준다. 먼저 '곤욕을 당하여'는 좀 더 풀어보면 '그가 자신을 곤욕당하도록 내맡기셨다'이다. 이것은 종이 고난을 자원하여 받은 것을 가리킨다. 또한 '그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고 참아냈다는 것을 가리킨다. 종은 고난을 자원하였을 뿐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셨는데,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털 깎는 자 앞의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끌려가는 - 야발이라는 동사로서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도살자는 양을 끌고 도살장으로 갔다. 호팔 사역 수동형 미완료를 쓰고 있다. 유월절 어린양은 이미 선택되어 있다. 이 양을 유월절에 잡아서 문설주에 피를 뿌리게 된다. 사역 수동은 바로 예수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지정되어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드려짐을 의미한다. 

8절은 메오체르 우미미쉐파트 루카흐 베에트 도로 미 예쇼헤하 키 니제자르 메이레츠 하임 미페샤 암미 네가 라모입니다.

사 53: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53:8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 '곤욕'(오체르)'강압', '구금자'이다. 그 문자적인 뜻인데, 따라서 어떤 학자는 이 단어를 '감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 때 '체포'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무튼 ''은 법적인 과정을 밟아 사형 언도를 받기에 이르렀다. 혹자는 이 같은 결과가 단순한 오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종종 무죄한 피고가 부당히 고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 같은 결과는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이다.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죄로 저주 아래 있던 이 땅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잔인하게 죽였다.

그가 끌려갔으나 - 라카흐 동사로서 푸알 강조 수동형 완료를 사용했다. 예수는 억지로 유대인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거부해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선택되어 예수는 빌라도의 법정인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로마 병사에 의해서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 모든 수모는 믿는 자들을 위한 수치이며 수모이다.

9절은 바이텐 에트 레솨임 키브로 베에트 아쉬르 베모타이브 알 로 하마스 아사 베로 미르마 베피브입니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53:9

그리스도께서 범죄자로 낙인찍혀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후 부자의 묘실에 장례 된 것을 연상케 한다(27:32-61). 신약에서 이 말씀이 성취된다. 아리마대 요셉의 묘에 장사됨으로 부자의 묘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10절은 바아도나이 하페츠 다케오 헤헬리 임 타심 아솸 나페쑈 이르에 제라 야아리크 야밈 베헤페츠 아도나이 베야도 이첼라흐입니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53:10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 하나님께서 그를 즐겨 고난당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 구절에 담겨 있다. '속건 제물'과 속죄 제물의 차이를 정확히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속건 제물은 부채를 갚거나 또는 부과된 죗값을 만족시켜서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목적으로 드려졌다(5:15). 이제 우리는 ''의 비참한 죽음과 처참한 고난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죽음, 즉 그의 생명의 피를 쏟아 부음은 속죄를 위해 계획되고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이었다. 한편 ''의 죽음이 희생 제물이었다는 말은, ''이 제사장의 일을 수행하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종은 다른 제사장과는 달리 기꺼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따라서 그것은 모세 율법의 제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유일무이(唯一 無二)한 제사로서 다른 제사의 원형이며 실체이다 :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9:26).

그 씨를 보게 되며 - 여기 ''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영적 후손을 가리킨다(22:30). 유대 사회에서 많은 자손은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였다. 물론 살아생전 누리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종은 죽음으로써, 또 죽어서 그 축복을 누리신다.

그 날은 길 것이요 - 장수 역시 큰 축복 중의 하나였다. 이제 종 메시아는 죽음에서 일어나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신 후 영원히 그의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6:2; 6:9). 아라크 동사로서 히필 사역 능동형 미완료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 부활시켜 주실 것을 말한다. 미완료는 부활하여 영원히 장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도 예수를 믿으면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영원히 장수하게 된다.

11절은 메아말 나페쑈 이르에 이세바 베다에토 야체디크 차디크 아베디 라라빔 바아오노탐입니다.

사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53:11

자기 자식으로 - 이는 '()의 지식으로'(by his knowledge, KJV, RSV, Hengstenberg, Stier) 혹은 '()에 관한 지식으로'(by knowledge of him, Delitzsch) 등 두 가지로 해석된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본문 이해에는 별 무리가 없으나,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라는 50:4 내용 등을 고려하건대, 첫 번째 견해를 더 지지하고자 한다.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 이것은,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근거가 된다. 한마디로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셨다는 말이다. 죄악을 짊어짐으로 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완전한 의를 베푸신다. 이렇게 주어진 '''법정적 칭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발 동사인데 칼 능동형 미완료이다. 예수가 죄악의 짊을 계속해서 짊어짐을 말한다. 우리의 죄악을 주님이 계속해서 짊어지셨다.

12절은 라켄 아할레크 로 바라빔 베에트 아추밈 예할레크 솰랄 타하트 아쎄르 헤에라 라마베트 나페쑈 베에트 포쉐임 니므나 베후 헤테 라빔 나사 베라포쉐임 야페기아입니다.

사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53:12

본장은 종의 사역에 관한 하나님의 결론적인 선포로 끝맺고 있는데, 종이 위대한 승리자로서 전리품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 승리는 바로 종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얻은 결과였으며, 이로 인해 범죄자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다 :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4:8).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 할라크 동사인데 피엘 강조 능동형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이다.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예수를 믿게 하여 몫을 나누어 주겠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몫을 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구원도 하나님께서 주실 때 가능하다. 피엘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몫을 나누어 주신다는 의미다. 우리는 천국을 몫으로 받았다. 이 몫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있다. 미완료는 계속해서 몫이 주어짐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백성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천국을 계속해서 소유하게 된다.

 

 

[창세기 22장 히브리어 설교] “아브라함에게 보낸 나홀의 종의 시험”(창 22:20-24)

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22장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아브라함에게 보낸 나홀의 종의 시험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30년 전에 아브라함은 하란 땅에서 롯과 함께 가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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