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산상수훈 팔복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팔복을 통해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령이 부자가 되면 안 됩니다. 부자가 되면 예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물질로 채우고 우상으로 채워버리면 주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마음을 하나님의 나라로 채워야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마 5:3)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 책입니다. 마태는 철저하게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왕의 족보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왕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유대인들에게 마태는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는 분이 바로 눈앞에 오셨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로 눈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 오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육적인 통치자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왕의 권한으로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에 대하여 선포하시고 있는데 우리는 육적인 축복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밟고 사는 동안에는 분명 육신의 축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는 이런 축복과는 좀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씀대로 살라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이런 축복이 있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이런 의도를 우리가 깨달아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헬라어 원문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호티 아우톤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입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갈릴리 바닷가에 앉아 놓으시고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제자들을 향하여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배경을 보자면 산에 예수님이 올라가 계신 것은 모세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의 율법의 말씀과 성막의 식양의 제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 산에서 올라 산상수훈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시내 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성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정죄가 들어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받고 실천에 옮길 때에 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그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헬라어 개념과 히브리어 개념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헬라어 개념은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과 이성과 지식에 근본 바탕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 헬레니즘 사상입니다. 반면에 히브리어 개념은 철저한 하나님의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개념이 헤브라이즘 사상입니다. 그래서 헤브라이즘 사상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게 됩니다. 헬레니즘 사상은 인간의 생각에서 성경을 해석하게 됩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단어는 마카리오스 3107입니다. 축복된, 행복한,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일상적인 육신의 염려와 근심 걱정에서 탈피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육적인 축복에 만족하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축복의 개념은 내가 행복하면 되고 내가 현재 축복받고 있으면 만사형통한다는 복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헬라어 사상으로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헬라적 개념으로 팔복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럼 히브리적 복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는 에쎄르 835입니다. 행복한 사람, 복이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아샤르 833이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어는 명사나 형용사가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똑바로 가다, 직행하다, 감사하다, 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적 개념의 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곧장 따라가면서 살아가는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똑바로 직행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축복입니다. 이 땅에서 번영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이 세상에서 번성하는 복을 받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적 개념의 복은 이 세상에서의 축복보다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적 신앙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개념의 축복은 이 땅의 번영과 행복에 관심이 있다면 히브리어 개념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또한 어디에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헬라어 개념의 축복은 이 땅에 복을 누리면서 살다 보면 내세를 준비하지 못하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개념의 축복은 이 땅에서도 복을 누리면서 살지만 내세의 축복도 준비하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헤브라이즘 사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축복을 준비하면서 올바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따라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시144:15절은 아쉐레이 하암 쎄카카 로 아쉐레이 하암 쎄아바 엘로하이브입니다.
시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그럼 히브리적 관점에서 복을 받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들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복도 에쎄르의 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의 복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삼았습니까?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고백이 되어지고 내가 그분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영원한 심판에 이르지 않고 부활의 소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내 안에 주인으로 삼았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부족하게 살아도 내 마음에는 이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축복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축복을 받은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복에 관하여 말씀을 깨달았다면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난해질 수가 있습니까? 또한 가난하지 못하면 천국을 나의 것으로 취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프토코스 4434라는 단어입니다. 거지신세가 된, 빌어먹는, 가난한, 궁색한, 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개념의 가난한 것은 돈이 없어서 빌어먹는 거지신세가 된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잘 나갈 때에는 부자였는데 갑자기 사업이 망하여 지금은 거지신세가 된 이런 궁색한 생활을 하는 것이 헬라어 개념으로는 가난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반영이 되어 헬라어 개념으로 가난한 자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천국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고 물질적으로 부자인 사람은 천국이 자신의 것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업이 망하여 하루아침에 길바닥으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을 때에 마음이 얼마나 아프며 고통이 있겠습니까? 분노도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육적인 가난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자들이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개념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헬라어적 개념으로 신약을 계속해서 보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약을 기록한 사람들을 보면 누가만 빼고 유대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생각이 신약에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을 히브리어로 볼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이제는 히브리적 개념의 가난한다는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어의 가난은 아니 6041이라는 단어입니다. 고난 받는, 고난을 당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아나 6031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괴로워하다, 욕보이다, 학대받다, 벌 받다, 라는 뜻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면 돈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의미한 것보다는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가난한 자들을 말씀하실 때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신10:18절은 오세 미쉐파트 야톰 베알마나 베오헤브 게르 라테트 로 레헴 베시믈라 19절은 바아하베템 에트 하게르 키 게림 헤이템 베에레츠 미츠라임입니다.
신10:18-19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며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들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 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하브 157이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와우접속사 칼 능동태 완료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나그네를 계속해서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가난한 것은 무엇입니까? 고아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정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것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것입니다. 나그네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가난한 것입니다. 이때에 고아가 양자로 들어가 부모가 생기면 더 이상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과부도 남편이 생기면 가난한 것이 아니며 나그네도 집이 생겨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으면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나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수모를 겪는 것이 가난입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내가 죄가 있어서 받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고난을 당하셨는데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위해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7절은 알르 헤아톤 에케노센 모르펜 둘루 라본 엔 호모이오마티 안드로폰 게노메노스입니다.
8절은 헤타페이노센 헤아우톤 게노메노스 휘페코오스 메크리 다나투 다나투 데 스타우루입니다.
빌2:7-8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기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죄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자신을 비웠다고 했는데 헬라어 케노오 2758이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직설법 과거 능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곧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죽었으니 너희는 가난한 자가 되어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심령이 부자인 사람은 무엇입니까? 이미 우상의 신랑이 들어온 자들입니다.
3절은 포르네이아 데 카이 파사 아카다르시아 에 프레오넼시아 메데 오노마제스도 엔 휘민 카도스 프레페이 하기오이스입니다.
엡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우리의 심령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의 우상들의 남편이 들어와 있다면 이 사람들은 부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부라고 했습니다. 신부가 이미 다른 신랑을 맞이하여 살고 있는데 어떻게 가난해진 것입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려고 해도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천국이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마음은 가난한 상태입니까? 아니면 율법주의에 빠져 부자가 되어 다른 신랑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랑을 소유하지 않으면 절대 구원도 없고 천국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음행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단어가 오노마조 3687입니다. 명령법 현재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말합니다. 반드시 성도는 음행과 탐욕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현재이니 지금부터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수동태는 이런 음행과 탐욕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이런 것들에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20절은 이두 헤스테카 에피 텐 뒤란 카이 크루오 에안 티스 아쿠세 테스 포네스 무 카이 아노이크세 텐 뒤란 에이셀류소마이 프로스 아우톤 카이 데이프네소 메트 아우투 카이 아우토스 메트 에무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고 부자이며 헐벗지도 않으며 벌거벗을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이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이미 심령이 부자인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욕심으로 모두 채워놓고 주님을 맞이할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임하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고 했습니다. 크루오 2925입니다. 직설법 현재 능동태 동사입니다. 직설법은 주님이 실제로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이니 계속해서 지금도 우리의 심령을 두드리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도 내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부자인 사람은 주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재물로 가득 채웠고 권력과 권세의 신랑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에 주님이 문을 두드려도 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해서는 안 됩니다.
5절은 튀플로이 아나블레푸신 카이 콜로이 페리파투신 레프로이 카다리존타이 카이 코포이 아쿠우신 네크로이 에게이론타이 카이 프토코이 유양겔리존타이입니다.
마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맹인을 보게 하며 못 걷는 자를 걷게 하며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며 듣지 못하는 자를 듣게 하며 죽은 자가 살아나게 하시는 이런 육적인 일들을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깨끗함을 받는데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능동으로 스스로 깨끗해질 수가 없습니다. 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없는 주님이 고쳐주셔야만이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자도 아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아직 세상의 우상의 신랑이 없는 신부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자들은 그들의 심령에 천국이 임하게 되며 영원히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되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아무런 죄도 없이 신부인 너를 위해 나의 목숨을 바쳤고 고난당했고 채찍에 맞았으며 가시면류관을 쓰면서 로마 병사들로부터 따귀를 맞고 침 뱉음을 당했던 것을 기억하여 너희들도 세상에서 이렇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에 진정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아니 교회생활을 하면서 전혀 손해는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챙기고 손해는 너희가 보라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아직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들도 주님이 너를 위해 헌신하고 죽은 것처럼 너는 아무런 해를 받을 필요가 없지만 신랑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이것이 진정 천국이 이루어진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시렵니까?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영원한 천국을 누리는 삶을 사시렵니까? 아니면 세상의 인간들을 우상으로 섬기고 탐욕을 신랑으로 섬기면서 고통의 나날을 사시렵니까?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심령의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심령의 문을 열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함께 먹고 마시는 역사기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 내가 세상의 부자가 아닌 영적인 부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천국의 삶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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