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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 주석강해] 목마른 사슴의 소원(시 42:1-5)

르호봇 2021. 2. 2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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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시편 42편 주석 강해 중에서 목마른 사슴의 소원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을 목마른 사슴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목마른 사슴처럼 나의 영혼이 복음을 찾기에 갈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마실 것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기갈의 때가 오면 마실 수 있는 복음이 없기 때문에 영혼에 기갈이 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의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나의 영혼을 위해서 복음의 생수를 찾아 마실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마른 사슴의 소원(시 42:1-5)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는 1절이 이 시편의 제목입니다. 라메나체아흐 마세킬 리베네 코라흐입니다. 2절은 케아알 타아로그 알 아피케 마임 켄 나페쉬 타아로그 엘레이카 엘로힘입니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42:1

사슴 - (아얄). 직역하면 '수사슴'이다(신 12:15 ; 14:5 ; 35:6). 이 단어는 남성이지만 이곳에서는 통성어(通性語)로서 여성 동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으므로 수사슴이 아닌 '암사슴'을 뜻한다.

갈급함같이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아라그'는 칼 능동태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 이 사슴은 계속해서 갈급함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의 영혼도 복음의 생수를 마시지 못하면 계속해서 목말라 할 수밖에 없다.

이곳과, 지독한 가뭄 때 하나님을 향하여 '헐떡거리는' 들짐승들을 묘사하는 욜 1:20에서만 사용되었다. 1:20 문맥을 고려할 때 이 용어는 '찾기에 갈급함 같이로 번역하기보다는 '울부짖으며 찾음과 같이'로 번역해야 원문의 의미가 살아날 듯싶다(Luther).

3절은 차메아 나페쉬 레로힘 레엘 하이 마타이 아보 베에라에 페네 엘로힘입니다.

시 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42:2

생존하시는 하나님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다르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 모든 생명의 근원 및 기초로서 죽은 추상적 존재와는 대조를 이룬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본절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그분의 성소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Calvin), 이러한 견해는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 의하여 더욱 분명한 지지를 받는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 라아라는 동사로서 닢알 수동태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를 사용했다. 수동태를 사용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가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이 같은 구절은 지성소 및 성전에 나아가게 됨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84:7 ; 23:17). 그런데 이러한 의미는 흔히 '하나님의 면전에서'와 같은 식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대목을 지성소에서의 갈망을 그리고 있는 구절로 보는 근거는 이곳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이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4절은 하예타 리 디므아티 레헴 요맘 바라옐라 베에모르 엘라이 콜 하욤 아예 엘로헤이카입니다.

시 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2:3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 이 조소적인 질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대적들의 입술에서 자주 발견된다(79:10 ;115:2 ; 2:17 ; 7:10). 시편 기자의 비탄을 고려할 때 그 대적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그 배후에는, 그의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고, 설령 계시다 하여도 힘이 없거나 그의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라는 우매(愚昧)한 지식이 전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 눈물이... 내 음식이 되었도다 - (하예타 리 딤아티 레헴). 이를 단어 배열 순서에 따라 직역하면 '눈물이 나의 빵이 되었다'이다.

, 시편 기자의 눈물이 그에게 있어서 마치 매일의 식사처럼 날마다 취하는 몫이 되었다는 것이다(80:5 ; 102:9 ; 3:2, Perowne). 그런데 어떤 학자는 이것을 시편 기자가 식사를 하지 않고 울기만 했던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본다(Barnes).

물론 심한 심적 아픔이 있을 때 식사를 거른 채 눈물만 흘리며 슬퍼할 수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표현이 지니는 강조점은 눈물을 흘렸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는 조롱에 대해서 심한 고통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눈물을 매일의 식사로 취했다는 본 구절을 시편 저자의 심한 비통과 고통의 상태를 과장적으로 묘사하는 이중적 어법의 구절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80:5). 한편, 이와 유사한 표현 기법은 우가릿 바알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데 심한 고통 중에 있던 아낫이라는 신이 '울며 앉아서 포도주를 마시듯 눈물을 삼켰다'는 표현이 바로 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방 신화와 성경 기사의 유사점을 통해 성경을 하나의 히브리적 신화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성경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그 당시의 특정한 문화를 중시하시고 그 문화권이 반영된 성경 기사를 쓰도록 허용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성경 기자 동시대의 이방 문화와 성경이 그리고 있는 문화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는 특별한 차이가 있다. , 이방 문화는 문화 그 자체일 뿐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주권 하에 된 계시이기 때문이다.

5절은 엘레 에즈케라 베에쉐페카 알라이 나페쉬 키 에에보르 바사크 에다뎀 아드 베이트 엘로힘 베콜 리나 베토다 하몬 호게그입니다.

시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2:4

성일(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 '성일을 지키는'은 '호게그'로 문자적인 뜻은 '원 안에서 돌다', '성스럽게 행진하다', '춤추다' 등이다. 이것은 뛰고 춤추면서 축제를 지키고 성일을 축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5:1 ; 23:41).

또한 '무리'(하몬)의 일반적인 의미는 '많은 수의 군중'을 가리키지만 특히 열방 혹은 군대와 같이 소란하고 시끄러운'소리를 내는 군중'을 지시하는 말이다(4:7 ; 왕상 8:41 ; 13:4 ; 11:11-13).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본 구절은 시편 기자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무리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기쁨과 찬송의 소리 - (콜 리나 베토다). 문자적인 뜻은 '큰 노래의 소리와 감사함'이다. 일련의 순례자의 행렬은 모든 음악과 노래를 돕는 수단 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표현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삼하 6:5).

한편, 아름다운 순례자 노래의 가사들이 순례 행렬을 위하여 마련된 영감 된 시편이 120-134편에 잘 수록되어 있다.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 '이 일'이란 기자가 많은 무리와 함께 과거에 경험하였던,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전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온갖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 예배하고 감사하였던 사실을 가리킨다.

바로 그와 같은 기억은 낙담 가운데 있던 당시의 시편 기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자신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했던 무리들이 이제는 도리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더구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의 말을 서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시편 기자는 그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류의 추억을 어떤 학자는 '쓰고도 단 추억'이라 부르고 있다(Delitzsch).

6절은 마 티쉐토하히 나페쉬 바테헤미 알라이 호힐리 레로힘 키 오드 오데누 예슈오트 파나이브입니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 (마 티슈토하히). 문자적인 뜻은 '어찌하여 네가 숙이느냐'이다. 그런데 여기의 '숙인다'는 것은 대중 예배 때에 기도하기 위하여 그 자세를 숙이는 것을 가리키나 문맥을 고려할 때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슬픔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심히 우울하고 슬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여기서 저자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다. 즉 저자는 영과 육, 고등한 본성과 저등 한 본성, 즉 신앙으로부터 온 믿음의 마음과 불신의 상태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은 인간 본성적 죄악성 때문에 초래된 우울과 어두운 상태의 또 다른 육적인 상태를 꾸짖기 마련이다(Perowne).

불안하여 -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거나 가라앉는 바다의 파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46:3) 시편 기자의 영혼이 성난 파도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요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얼굴의 도우심 - (예슈오트 파나이브). 문자적인 뜻'그의 얼굴의 구원들'이다. 여기서 '예슈오트'는 그 형태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절대적으로 완벽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의 값없는 은혜를 베푸심을 나타낼 때 '얼굴의 빛을 비추인다'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여기의 '얼굴'은 바로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4:6 ; 21:6 ; 44:3 ; 89:15).

결국 그 얼굴의 도우심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낙망과 슬픔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값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슬픔과 역경으로부터 구원하시되 완벽하게 해내실 것을 확실히 기대하는 저자의 믿음이 담겨 있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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