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요한복음 4장 주일 성경말씀] 사마리아인들의 회개(요 4:27-42)

르호봇 2024. 3. 1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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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 주일 성경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고 기뻐서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회개(요 4:27-42)

 

. 사마리아와 추수 4:27-42

1. 제자들이 돌아옴(27)

제자들이 돌아옴으로써 대화는 중단된다. 그때 대화는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돌아온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기이히 여겼으며 여인과, 낯선 여인과 그것도 사마리아 여인과 이와 같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께서 자신들을 부르셨을 때 자신들이 그렇게 보잘것없는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예수께서 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셔서 불쌍하고, 대화할 상대도 못 되는 여인과 얘기를 나누셨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그 제자들은 거기에 어떤 상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아무도 나서서 "무엇하십니까, 왜 이런 여인과 말씀을 나누십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2. 소식의 전파(28-30)

그 여인은 곧장 그 소식을 곧바로 이웃들에게 알렸다.

(1) 그녀는 자기가 우물에 온 목적조차도 잊었을 정도였다(28). 그녀는 그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예수께서 식사를 드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대한 예의로 물러났던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싫증을 느낄 수 없었지만 무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께서 곧장 떠나시리라 생각하여 급히 가서 자기 이웃들에게 알렸다. 그녀가 얼마나 시간을 잘 이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유익을 획득할 기회가 끝났을 때 우리는 곧 선을 행할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그녀가 물동이 또는 물 항아리도 버려두고 갔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께서 식사하시면서 사용하시라고 친절하게도 그리스도를 위해 그 물동이를 남겨 두었을 수도 있으며 자기가 사는 읍내로 더욱 서둘러서 가기 위하여 거추장스러운 항아리를 남겨 놓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보다 훌륭한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물동이 따위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것을 버려두고 떠났던 것이다.

(2) 그러나 그녀는 마을에 가서 전해야 할 자신의 사명은 심중에 곧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녀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얘기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

1)그녀의 친구와 이웃들이 그리스도와 사귀게 되기를 그녀가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그녀는 보화를 발견하자, 자기와 함께 즐거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나누기 위해 자신의 친구들과 이웃들을 초청하였다.(눅 15: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도 자신을 알게 하는 영광을 주시지 않으셨는가?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냄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 드리자. 아마도 우리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여인은 일종의 사도가 된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내 가까이에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큰 의무를 지니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2)그녀가 이 낯선 사람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공정하고 솔직한지 살펴보라 그녀는 어떤 사실들로 인하여 자신이 그렇게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이 나의 행해 왔던 모든 일을 내게 말했다." 여기에 그녀의 남편에 대하여 그 사람이 그녀에게 말했던 것 이상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일과 그리고 그녀의 속 마음, 속 양심도 그녀에게 얘기했던 것이다. 그녀는 두 가지 사실로 큰 감동을 하고 있는데 첫째, 그의 지식의 범위였다. 우리들 인간으로서는 우리가 여태까지 행해 왔던 모든 것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의 말씀의 권능이었다. 예수께서 그녀의 은밀한 죄까지도 말씀하셨다는 즉 그녀의 외침은 "모두 와서 내가 숨겼었던 내 죄를 내게 지적한 사람을 와서 보라"는 얘기였다.

그녀는 "그 말을 자꾸 반복하면 매우 부끄러울 텐데"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그런 얘기, 곧 예수님과의 대화의 그러한 부분을 더욱 강조하여 전했던 것이다. 우리의 죄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비천한 처지에 대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알게 되는 그리스도께 대한 그러한 지식이야말로 가장 건전한 것이요 구원하는 지식인 것이다. 그녀는 그를 와서 보라고 사람들을 초청한다. 겨우 "와서 구경해 봐라"가 아니라(그녀는 쇼우를 구경시키듯 그에게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 아니다), "와서 그와 대화를 나누라, 와서 그의 지혜를 들으라, 내가 들었던 것처럼, 내가 대화했던 것처럼, 와서 그와 대화하라, 그의 지혜를 들어 보라"는 초청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설득당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법으로 논쟁하려 하지는 않았다.

진리의 증거를 보여줄 수는 없다. 그때 예수께서는 마을 어귀에 와 계셨다. ", 와서 그분을 보라." 그의 날 보기를 선지자들도 임금들도 그렇게 열망했던 그 사람을 보러 마을 어귀로 함께 가보지 않겠는가? 그녀는 독단적으로 "그가 메시야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호소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부과하려 하지 않고 믿음을 제시한다. 때때로 이와 같이 공정한 그러나 힘 있는 호소는 사람들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들의 판단과 양심을 사로잡는 것이다.

3)이러한 초대의 성공 :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30).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갔다. 사람을 시켜 예수를 마을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그에게로 갔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이름을 기록해 놓으신 곳에서 그분을 만나 뵈어야 하는 것이다.

3. 여인이 가버린 사이에 있었던 제자들과의 대화(31-38)

우리 주님께서는 시간을 대단히 잘 활용하셨으며 순간순간을 아끼셨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시간을 틈틈이 모아 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이 대화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행하신 일을 대단히 흡족히 여기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일에 전심을 기울이셨음을 볼 수 있다.

1)이는 예수께서 이 일을 하시느라 식음조차 잊으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우물가에 앉으셨을 때 예수께서는 피곤하셔서 원기를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으셨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해야 할 기회가 오자 예수께서는 피곤도 기갈도 다 잊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음식을 권했을 때도 음식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랍비여 잡수소서(31). 이 권유는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사랑의 일례라 하겠으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초청을 원하셨으며 그 사실은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보다 위대한 본보기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들이 없는 사이에 누군가 대접해 드린 음식을 예수께서 드셨을 것이라는 제자들의 추측 따위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셨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33). 예수께서 식사하실 의향이 없으시자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미 식사를 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2)예수께서 전심으로 자기의 일을 수행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서 발견하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심으로써 예수께서 행하셨던 사역은,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그가 행하셔야 할 사역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그에게 양식이며 음료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굶주린 사람이나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라도 우리 주 예수께서 영혼들을 위해 선을 행하실 기회를 바라고 찾는 것만큼 그렇게 큰 욕구로 만찬을 기대하지도, 그렇게 흥에 겨워 진미를 먹지도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드시는 음식은 제자들도 알지 못했던 그러한 음식이었다. 이 말은 선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먹으며, 낯선 자는 넘볼 수도 없는 희락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자들은 이렇게 묻게 되었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그리스도의 하시는 사역이 그의 양식이 되는 이유는 그 사역이 성부의 뜻이요, 성부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러기 위하여 죄인들을 교훈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자신의 사업이요 기쁨으로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곤하여 음식을 드셔야 했지만 그 마음은 갈증도 허기도 다 잊고 이 일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진지하셨다.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기 전까지는 자신의 과업을 결코 포기하시거나 중도에서 그만두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많은 이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겠다고 열심을 갖지만 동일한 열심으로 끝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2)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들 각자의 임무에 근면할 것을 주지 시키신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군 된 자들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일군이 되어야 했다. 제자들이 해야 했던 임무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이제 예수께서는 이 일을 가을 추수에 비유하신다(35-38). 추수 시기는 매우 분주한 시기이다. 모든 손이 추수 일에 동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추수 기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기간은 짧고 제한된 시간이다. 그리고 추수하는 일은 즉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열심을 내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신다.

1)그 일은 필요한 일이며 때가 매우 급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발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 실제 곡물 추수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 "너희가 파종기에 씨 뿌리는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추수까지는 넉 달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 않느냐"하나님께서는 매년 추수를 기약하셨을 뿐만 아니라 추수 기간도 정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시기를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복음의 추수에 관한 말씀이시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여기 이곳 사마리아에 그리스도께서 거두셔야 할 곡식들이 있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잡수시라고 하였었다(31).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게는 먹을 양식 즉 더욱 긴요히 해야 할 일이 있다. 복음을 영접하고자 오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무리를 보아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앞을 다투어 모여들 때 복음을 전파하는 주의 일군들은 더욱 활기를 얻어 애쓰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충분히 익어 거두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들녘의 알곡과 같이 복음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 희어져 있었다. 만일 지금이 어떤 일을 할 적기라는 표징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큰 용기를 가지고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주님을 위하여 예비하도록 백성들을 준비시켰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시작한 이래로 모든 사람은 그리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눅 16:16).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낫을 댈 때이다. 지금이 일을 해야 할 적기이다. 익은 알곡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알곡이 떨어져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영혼들을 지금 돌보지 않는다면 그 영혼들의 잘 준비된 출발도 헛되이 돌아가고 말 것이다.

2)그 일은 제자들 자신이 '이미 삯을 받은'(36) 득이 되고 유익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고용되어 일하는 추수군은 절대로 가혹한 주인 밑에서 혹사당한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의 일이 곧 그 일에 대한 품삯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추수군은 열매를 거두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을 구할 뿐 아니라 자기 말을 듣는 사람도 구원하다.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과업이 귀중한 영혼들을 영원히 구원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곧 위로가 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뿌리는 사람이나 거두는 자들이 함께 즐거워하는' 기쁨을 누린다. 뿌리는 자란 선한 일을 시작하기 위해 복된 도구로 쓰인 일군이요, 거두는 자란 시작된 선한 일을 이룩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고용된 일군을 말한다. 그래서 이 둘은 함께 기뻐할 것이다. 추수하는 자들은 서로 그 추수하는 즐거움을 나누어 갖는다.

3)그 일은 손쉬운 일이요, 그들보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절반이나 성취된 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37). 모세와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이 복음의 길을 기경해 놓았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려 보내었노니(38). 이 말에서 우리는 구약적 사역에 관한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구약의 사역은 신약적 사역에 비해 많은 점을 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뿌리기는 뿌렸으나 거두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의 기록은 그 기록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면서 그들이 직접 선포했던 것 이상의 훨씬 많은 선을 이룩하였다. 또 하나의 사실은 구약의 사역이 신약의 사역을 보조하며 신약의 사역이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다.

만일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뿌려진 씨가 없었다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아가 오실리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사역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을 나타내준다 하겠다. 그 사역은 결실이 풍성한 사역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큰 추수기에 거두어 모아 들이는 추수군들이었다. 그 일은 선지자들의 기록에 의해 대단히 쉬워졌다. 선지자들은 '우리가 헛되이 수고하는구나'라고 외치면서 눈물로 씨를 뿌렸다.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에게 이김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였다. 수고하면서 죽어간 사역자들의 노고로 해서 그들 뒤에 살아남은, 그들을 승계한 사람들은 선한 열매를 많이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서간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수고 속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방문의 결과(39-42)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마을을 방문하시므로 해서 사마리아인들은 큰 선한 영향을 받았다. 그 영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에 관한 여인의 증거에 대한 그들의 반응. 이 증거는 '그가 내게 내가 여태까지 행했던 모든 것을 말했다'는 바로 그 증거였다. 이들은 이에 대하여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었다.

1)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신뢰(39) :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를 믿은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집의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신앙은 이방인들의 신앙의 전조라 볼 수 있다. 이 사마리아인들은 무슨 근거로 믿었는가? 바로 '그 여인이 증거하므로'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도구로서 매우 연약하며, 잘 될 것 같지도 않은 도구조차 기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며 둘째로 작은 불꽃이 얼마나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우리 구주께서는 한 비천한 여인을 가르치심으로써 온 동네를 가르치셨다. 사역자들은 그들의 말을 청종하는 이들이 소수요 미천하다 하더라도 전파하는 일에 소홀히 해서도, 용기를 잃어서도 안된다. 그 적고 미흡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함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선이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ㅇ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실증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영혼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는가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2)오셔서 자기들 사이에 머무실 것을 간청함(40)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 찾아와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했다. 전령과 같은 그 여인의 보고에 의지하여 저들은 그리스도가 선지자이심을 믿고 그에게 나아왔으며, 와서 만났을 때에는 선지자로서 대접하였다. 예수께 나아온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 대한 자기들의 존경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간청하였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운수를 얘기해 주는 사람에게 떼거리로 모여들지만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자기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에게 모여들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내쫓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를 자신들에게 초청하였다. 복음이 성공한 증거를 보면 그것은 항상 어떤 개연성에 따르는 것도 아니며 기대한 대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의 청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 저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으나(41,42)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이 그가 곧 그리스도임을 확신할 수 있는 언행을 보이셨다. 이와 같이 한 사역자의 수고는 그 수고의 선한 열매들에 의해서 가장 확실히 입증된다. 그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직접 본 결과는 이것이다. (1)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났다. 예수의 말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41). (2) 저들의 신앙이 자라났다. 그 여인의 말에 의해 믿게 되었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42). 우리는 여기에서 저들의 믿음이 세 가지 측면에서 더욱 공고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믿음의 내용에 있어서 공고해졌다. 여인의 증거에 의지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서 선지자이심을 믿었지만 이제 그와 대화해 본 지금은 그가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받은 자임을 믿게 되었으며 세상의 구주가 되심을 믿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구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비록 사마리아인이었지만 온 세상의 구주께서 자신들 속에 오셔서 유하시기를 소망했다. 둘째, 믿음의 확실성에 있어서 공고해졌다. 이제 그들은 이 사람이 실로 그 그리스도임을 우리가 안다고 말할 정도로 큰 확신, 충만한 확신에 도달하였다. 셋째, 믿음의 근거에 있어서 더욱 공고해졌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그의 말을 듣고…앎이니라(42절). 그들은 전에 여인의 말을 듣고 믿었으나, 이제는 그들 스스로 직접 들어봄으로써 믿는다. 우리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며 확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에서 우리는 어떻게 믿음이 들음으로써 시작된다. 부모님들과 설교자들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친숙해지도록 권면해 주는 것이요, 신앙은 그리스도 자신의 직접적인 증거를 들음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들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성경을 조사해 보고 싶어 진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성경을 찾아봄으로써 믿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복음의 씨앗들이 사마리아 땅에 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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