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갈라디아서 4장 주일 성경말씀] 율법주의 신앙의 어리석음(갈 4:1-31)

르호봇 2024. 3. 1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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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주일 성경말씀은 율법주의 신앙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리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파했는데 교인들은 거짓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구원이 믿음이 아닌 행위에서 나온다는 거짓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어리석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의 어리석음(갈 4:1-31)

 

. 복음의 우월성 4:1-7

사도 바울은 유대인 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1] 구약 교회의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1-3). 그 상태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한 상태이다. 구약 교회에서도 진정으로 은혜가 베풀어졌으나 비교적 모호하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상속을 이을 자라도 성숙되지 않았을 때는 아버지가 지명한 때가 되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 교회도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구약 교회에서 은혜가 모호하게 베풀어졌던 것처럼 속박도 이루어졌다. 구약 교회는 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정하신 때가 도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 큰 빛과 자유의 섭리 하에 거하게 된 것이다.

[2] 복음의 섭리 하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상태임을 알려준다(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4). 그 아들은 자신이 착수한 큰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여자에게 나게 하심'으로써 성육신이 되었고 '율법아래 나게 하심'으로써 얽매인 바 되셨다.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된 가장 큰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를 구속하셔서 아들의 명분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보낸 바 되셨다. 즉 더 이상 종으로 취급받지 않고 성숙한 아들로서 취급받도록 하기 위하여 보낸 바 된 것이다. 복음 아래에서는 믿는 자들 개개인이 양자 됨을 얻는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그 양자의 영은 그들로 하여금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라볼 수 있게 하셨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그의 논증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7). 더 이상 우리는 율법의 노예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되었다.

1)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는 우리를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특별하게 나타난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으신 성자 하나님과 매우 은혜로운 목적을 이루고자 자신을 낮추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도 그 사랑과 자비가 나타난다.

2)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아래에서 누리게 될 놀랍고 가치 있는 유익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우리가 아들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본래 진노와 불순종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는 자식들이 되었다. 둘째로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점이다.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를 닮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들의 특성을 받은 자들은 아들의 유업을 잇게 된다.

. 그리스도의 구원 4:8-11

[1]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의 상태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들은 그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가장 심한 노예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섬기는 것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을 수도 없으며 또한 그들을 도울 수도 없었다. 참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은 거짓 신에게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2]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그들이 복된 변화를 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모든 사귐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3] 바울은 그들이 다시 종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불합리한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그들에게 '어찌하여 돌아가려고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곧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한 질문이다. "복음에서 제시하는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배운 너희들이 어찌하여 의식적인 예배 방법을 따르는 일에 설득당하는가?" 그들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유대인 자신들보다 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의식적인 예배를 상당히 맹신하고 있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들이 스스로 예속되고자 하는 것은 영혼을 정결케 하는 능력이 없는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의 약함과 어리석음은 거짓 교사들에게 복종하고 각종 절기 즉 '날과 달리 절기와 해'를 지킴으로써 더움 심화되었다. 고상하게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라도 나중에는 그 순수한 신앙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특별히 강조하여 책망하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된 후에 율법의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에 예속되려는 어리석음이다.

[4] 바울은 그들에 대한 그의 염려를 표명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크게 수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들 가운데 뿌리내린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 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이 일을 생각하니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애정 4:12-16

1. 그들을 향한 애정 어린 호소(12)

바울은 그들의 마음이 그에게서 크게 떠나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리켜 형제라 부르고 있다. 바울은 그 자신이 그들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그 자신의 유익 때문에 그들과 다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그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에 대한 그들의 심정을 진정시키고자 애쓰고 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책망이 개인적인 불쾌감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의 참다운 안녕에 기인한다는 것을 확신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그들의 이전 애정에 대한 칭찬(13,14)

그는 자신이 처음 그들 가운데 와서 겪었던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3). 여기서 '육체의 약함'은 그다음 절의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확실한 뜻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그의 불리한 사정으로 인하여 그들을 감명시키지 못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바울의 그 불리한 사정 때문에 그를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그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

그는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 그에 대한 그들의 존경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눈이라도 빼서 그에게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을 볼 때, 사람들의 존경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이며 또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변하기 쉬운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전에는 그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했던 그 사람에게 이제는 그의 눈을 빼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3. 그들에 대한 훈계(15,16)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질문한 것이다. "너희들이 전에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행복을 느꼈는데 이제 그렇게 생각지 않으니 무슨 이유가 있느냐?" 처음 사랑을 버린 자들은 그들이 말하였던 그 축복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만 한다. 바울은 다시 묻는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16). 지금까지 너희의 사랑을 받았던 내가 어찌하여 너희의 원수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그들에게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그 친구를 원수로 생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사역자들은 때때로 그들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때문에 스스로 적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말하는 일에 주저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사역자들의 적이 된다면 그것은 단지 그 사역자들이 진리를 말하였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 거짓교사의 특징 4:17-18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갈라디아인들에게 거짓교사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며, 그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너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며 너희를 심히 사랑하는 것 같으나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너희에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고 있다(17). 그들이 의도하는 주된 목적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진리와 성실함이 거의 없을지라도 대단한 열심을 낼 수는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좋은 규정을 제시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히 사모함은 언제든지 좋다'라고 했다.

좋은 일을 어떤 사람들은 흠정역에 기록된 좋은 사람으로 번역하여 바울이 그 자신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라는 구절이 이것을 더욱 확증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일을 하는데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규칙이다. 왜냐하면 열심은 그 행위가 좋은 일일 때 훌륭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에 대해 언제나 열심을 내는 것이 훌륭한 것이다. 단 한 번만 혹은 학질 걸린 사람처럼 가끔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몸의 체온처럼 변함없이 열심을 내어야 한다. 만일 이 규칙이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잘 지켜진다면 그리스도 교회는 얼마나 복을 누리겠는가!

.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애정 4:19-20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그의 큰 애정을 이곳에서 표현했다. 바울은 자기가 옆에 있을 때는 좋게 대하다가도 없으면 험담을 하는 그들과는 달랐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면서 그들에 대해 매우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체하는 거짓교사들과도 달랐다. 그는 정당한 권리를 가진 자로써 그들을 가리켜 그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그는 그들을 그의 어린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현재 행위를 생각해 볼 때 가능한 일이며 또한 그들이 어린 자녀와 같은 행동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 대해 염려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또한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였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 신실한 사역자들은 사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해 다정다감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 애정은 어린 자식에 대한 부모의 헌신적인 애정과 같은 것이다. (2) 신실한 사역자들은 사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에 주로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역자들을 버리거나 싫어하도록 설득을 당하는 사람들의 행위야말로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는 계속하여(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울이 '그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어조를 바꾸어 이야기할 기회를 찾고자 함이었다. 그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옳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상태가 그가 염려했던 것보다 건전함을 보고 기뻐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책망하고 잔소리하는 대신 그들을 칭찬할 수 있기를 원했다.

. 이삭과 이스마엘의 생애 4:21-32

사도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신자들과 율법을 신뢰하는 유대교 신봉자들과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말하라 율법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말한다(21).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역사 그 자체를 제시한다(22,23). 즉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이요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이삭이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즉 자연의 일반 법칙에 의하여 났지만 이삭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에 '약속을 따라 났다.' 그는 이 역사의 의미를 그들에게 알려준다(24-27). 사도 바울은 '이것은 비유니'라고 말한다. 하가와 사라 이 둘은 두 언약을 의미한다.

전자의 하가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 왜냐하면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현재의 유대인들의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즉 현재의 유대인들은 그 언약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손들도 그 언약에 예속되어 있다. 그러나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예시하는데 그녀는 도덕법과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운 자로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인정을 받는 상태이다. 사도는 이와 같이 보다 큰 자유에 대하여 이사야 54:1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다. ,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그렇지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27).

사도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키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의와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약속된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다. 바울은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그들도 지금 그와 같은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성경에서 '계집 종과 그의 아들을 내어 좇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21:10) 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런 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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