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구약성경 말씀

[예레미야애가 3장 설교말씀] 이스라엘에게 주는 위로의 말(애 3:21-36)

르호봇 2022. 12. 1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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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지금은 유다 백성이 회개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만 때가 되매 하나님이 다시 회복하실 날이 온다는 것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은 버리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한다. 하나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으니 징계를 내린다. 하나님은 성도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잘못된 길로 갈 때 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사인을 주신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면 하나님은 매를 드실 수밖에 없다.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이스라엘에게 주는 위로의 말(애 3:21-36)

 

여기에서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은 개이기 시작한다. 앞부분에서 불평은 대단히 침울하였으나 여기서는 기분이 변화되고 시온을 슬퍼하는 자들은 약간의 기쁨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희망에 있어서는 마음이 약해진다. 철저한 낙심으로부터 마음을 구출하기 위하여 여기에 회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망에 대한 근거를 주는 것으로(21절) 앞에 오는 것에 대하여 언급되고 지나간 것에 언급하고 있지 않다. 난외주에는 "심정에 회상한다" 고 되어 있다. 우리의 심정에 가진 것, 우리의 심정에 놓여 있는 것은 때때로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준비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심정에 그것을 떠오르게 하기까지 아주 잃어버리고, 잊어버려지는 것 같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으며 완전한 절망으로부터 구원된다." 다음에 그가 상기하는 것들을 보자.

Ⅰ. 그들이 당한 일들은 나쁜 것이지만 더욱 나쁘게 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그들은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나" 우리가 "멸절되지 아니한 것은 여호와의 자비이다" (22절). 우리가 재난 중에 있을 때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고무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심과 동시에 또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관찰하여야 할 것이다. 당한 일들은 나쁘지만 그것은 사실은 더욱 나쁘게 되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좋아질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은

1. 자비의 시내가 고백되었다. "우리가 멸절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모세의 가시덤불이 타고 있으나 "멸절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과거에 만난 곤경이나 현재 만날 수 있는 곤경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 세상에서 시간의 종말까지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핍박" 을 받아도 하나님에게서 "버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은과 같이 용광로 속에서 단련을 받으나 찌꺼기와 같이 "멸절되지 않는다."

2. 이 시내는 근원에까지 추적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자비들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와 풍성함을 의미하는 복수로서 자비들이 있다. 하나님은 다할 줄 모르는 무진장의 "자비의 샘" 이요, "자비들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모두 멸절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알뜰한 자비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하자.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멸절되었다. 

Ⅱ. 그들은 그들의 깊은 고통 가운데서도 아직도 온유한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약 속의 진실하심을 경험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다고 몇 번이나 불평을 말한다(2:17, 21).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바로 잡고 다음 같이 고백한다.

1. 하나님의 긍휼은 다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온유하신 자비를 닫아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진노 중에서까지도 하나님의 긍휼 하심은 다하지 않는다. 이 자비의 강은 넘쳐서 끊임없이 흐르고 결코 마르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아침마다 새롭다." 매일 아침 우리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 하심의 새로운 실례들을 경험한다. 그는"아침마다 긍휼을 가지고 우리를 방문하신다" (욥 7:18). "아침마다 자기의 공의를 드러 내시며" (습 3:5), 우리의 위로가 끊어질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은 끊이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위대하다. 계약이 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해도 아직도 계약의 충만한 힘은 계속된다고 그들은 고백한다. 또한 예루살렘은 비록 파괴되어졌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성실" 하심은 "영원하시다." 우리가 아무리 힘든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불평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아니 되고 그래도 그는 동정적이고 성실하시다고 고백할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에 주의하자.

Ⅲ.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충분한 행복이시며 또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택하였고 다음과 같이 그에게 의존하였다. 즉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것은

1. "내가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 자유나 생활이나 거의 생명 그 자체를 잃어버릴 때에도 나는 하나님께 대한 나의 관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땅 위에 있는 기업은 멸절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기업이시다.

2.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내 모든 고통과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채워서 균형을 잡기에 충분한 것을 소유한다." 우리의 기업으로부터 무엇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안심이다.

3. 이것이 내가 의지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나를 지탱시키는 모든 것들과 고무시켜 주는 것들이 내게서 없어질 때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영혼의 기업이 되게 하고, 우리의 기업으로서 그분을 이용하고 우리의 슬픔 중에서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얻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Ⅳ. 하나님과 관계하는 이들은 그를 신뢰하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1. 그는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선하시기 때문이다(25절). 그는 모든 이에게 선하시다. "그의 온유한 자비는 그의 지으신 모든 것 위에 넘친다." 모든 그의 피조물은 그의 선하심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방식 속에 계신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도다." 재난이 길고 구원이 늦어질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롭게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에 유의하자.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기다리는 동안 기도로서, 그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 은 그가 발견되기까지 그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구함은 우리의 기다림이 계속되도록 도울 것이다. 이렇게 기다리고,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로우실 것이다. 그는 그의 놀라운 인애(仁愛)를 그들에게 보이실 것이다.

2. 그렇게 하는 자들은 그것이(참고 기다림) 그들에게 좋다고 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26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요, 또한 말할 수 없는 위로와 만족이 될 것이다). 바라는 길에 놓여 있는 곤란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장차 올 것을 바라는 것은 좋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 없이 우리 자신을 불안하게 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처분을 묵묵히 따르면서 고요히, 그리고 말없이 기다리는 동안, 오래 지체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좋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만일 우리가 이 기도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잘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Ⅴ. 고통은 진실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옳게 견디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끼칠 것이다.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고통 아래 있는 것도 유익한 것이다(27절).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많은 청년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는 그 청년들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포로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한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상황에 자신들을 적응시키기만 하면 그리고 무거운 멍에가 그들 위에 놓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수고한다면 멍에를 메는 것이 그들에게 좋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명령의 멍에는 멜만 하다. 청년들이 젊었을 때 그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 아무리 일찍 종교적이 된다 하더라도 너무 이를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젊었을 때에 멍에 아래에 종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무로 하여금 하나님께 열납되게 하는 일이고 우리 자신에게는 더 쉬운 일이 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멍에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젊을 때에 이것을 짊어지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청년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진지하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멍에에 길들이지 아니한 황소와 같이" 거만하고 방종한 동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젊을 때에 그것을 짊어지는 것이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어느 때 그 멍에를 짊어질 것인가? 예레미아 선지는 다음 구절에서 대답한다.

1. 우리가 고통 아래서 진지하고 조용할 때 우리가 "혼자 앉아서 잠잠하게 있을 때"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의 처분에 불평하면서 또한 우리의 재앙을 불러오도록 자극하면서 불평하는 친구들 속으로 이리저리 달리지 말자. 자기의 내면으로 돌아가서 혼자 앉아서 역경의 날을 생각하자. 그러면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평화로웠던 아론과 같이 우리의 입을 손으로 막고 불만스러운 모든 의심되는 생각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우리 마음속에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멍에를 떨어내 버리지 말고, 하나님이 그것을 놓으실 때 참음으로 복종하면서 그것을 짊어진 사람들과 같이 멍에 아래서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젊었을 때에 고통 중에서 자신들을 적응시키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목을 멍에에 맞추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하나님의 목적에 응답하고자 연구해야 한다. 그때 그들은 멍에를 메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들에게는 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우리의 고통 아래서 겸손하고 인내할 때 고통 중에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표로서 "입에 그의 손을 놓을 뿐만" 아니라, 슬픔의 표로서 입을 티끌에 대는 사람, 죄을 기억함으로 부끄러워하고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 완전히 자신을 삭제하고 개심한 자, 그리고 시편 72장 9절에서처럼 먼지를 핥기까지 패망한 자가 되어 끌려온 자는 멍에를 멤으로써 유익을 얻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희망에 대한 기대 속에서 대단히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에 우리 자신은 철저하게 무가치한 것을 고백하면서 "혹시" 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죄로 인하여 진실로 겸손 하여진 사람들은 그들이 입을 티끌에 대기는 하지만 어쨌든 은혜를 통하여 좋은 희망을 얻어서 즐겁게 될 것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입을 먼지에 댈 때 그들의 마음이 먼지에 가라앉지 않게 하는 어떤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을 자유로운 은혜의 탓으로 돌려야만 한다는 것에 유의하자.

3. 우리의 고통을 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고 따뜻하며 용서하는 영혼이 될 때(30절) "그를 때리는 자에게 뺨을 대는 자," 되돌려 때림으로 갚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뺨을 돌려 대는" (마 5:39) 사람은 멍에로 말미암아 선한 것을 얻는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러한 실례를 우리들에게 남겨 주셨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사 50:6) 경멸과 꾸지람을 견딜 수 있는 그 사람,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고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갚지 아니하는 그 사람, 그가 "수욕으로 배 불려질 때" 그것을 그 자신에게만 있게 하면서, 그것을 그에게 채운 사람들에게 되돌려 갚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쏟아내는 그 사람(시 123:4 의 2와 같이 그의 영혼은 교만한 자의 멸시로 넘치게 채워져 있었다)은 멍에를 견디는 것이 선하고 좋다고 하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멍에를 메는 것은 그에게 영적인 이익을 되돌려 줄 것이다. 결국 "시련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부끄럽지 아니하는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Ⅵ.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괴롭힌 때를 따라서 시기에 적합한 위로를 가지고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롭게 돌아가실 것이다(31, 32절).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심을 믿기 때문에 그같이 회개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복음적인 회개와 기독교적인 인내 둘 다에 크게 자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견딜 수가 있다.

1. 우리가 버려질 때에도 우리는 아주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로 잡는 것이 아들과 의절하는 것은 아니다.

2. 분별 있는 위로가 끊기고 요구되는 구원이 주어지는 한동안 우리는 아주 버림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원토록 버리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우리와의 논쟁은 영구하지 않을 것이다.

3.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길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슬픔을 초래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혜롭고, 은혜롭게 명령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은 잠깐이다. 그것이 필요할 때 우리는 슬픔 속에 있는 것이다(벧전 1:6). 하나님은 슬픔을 주셨을지라도 세상은 우리를 구원하고 도울 것이라는 생각을 멀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다. 슬픔을 주신 바로 그분이 은총을 갖고 오실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파멸한다. 상처를 내신 그 같은 분이 그것을 치료하셨다. 그가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다(호 6:1).

4. 하나님께서 우리와 은혜롭게 관계하시기 위하여 돌아오시는 것은 우리의 공포를 따라서가 아니고 그의 자비를 따라서 오시는 것이다.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무가치하기 때문에 풍부한 하나님의 자비밖에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기대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자아내게 하시는 것은 결코 이런 기대에 대한 실망이 될 수는 없다.

Ⅶ. 하나님이 우리를 슬프게 하신 것은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하신 것이고, 그는 우리 재난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다(33절). 그는 진실로 "인생으로 하여금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신다." 그들의 모든 근심과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해서가 아니고, 본심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 뜻하는 것은,

1. 그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시도록 자극할 때에만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 그는 은총을 내리시는 것같이 그의 불쾌하심을 분배하시지는 않으신다. 다만 그의 선하신 즐거움으로부터 만일 그가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신다면 그것은 그것이 그에게 좋게 보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우리에게 괴로운 일들을 나타내신다면 그것은 그 일들을 받기에 합당하고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2. 그는 괴로움을 주시기를 즐기지 않으신다. 그는 죄인의 죽음이나 성도의 환난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마지못하여서 벌을 주신다. 그는 형벌하기 위하여서 그의 자리로부터 나오신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자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피조물들의 고통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의 백성을 존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받을 때 그가 고통을 당하시고,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할 때 그의 영이 슬퍼하실 만큼 고난을 기뻐하는 것에서부터는 거리가 멀다.

3. 그는 그의 백성을 괴롭게 하시는 때라도 그의 백성에 대한 호의를 여전히 가지고 계시다. 만일 그가 "인생들이 근심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진대 더구나 그의 백성의 고난은 원치 않으신다. 그러하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하시다(시 73:1).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에서 분노와 그 손에 채찍을 보는 때에라도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본다.

Ⅷ. 그는 그의 백성을 바로잡기 위하여 그의 손으로 사용하시지마는 또는 사람을 그의 손에 들려진 기구로 사용하시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그는 그들의 행함에 있어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는 악과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34-36절). 행악자나 행악자들을 옳게 여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게 하라.

[히브리어 주석성경] 구산 리사다임과 에글론 왕에게 팔린 이스라엘(삿 3:7-14)

 

[히브리어 주석성경] 구산 리사다임과 에글론 왕에게 팔린 이스라엘(삿 3:7-14)

사사기 3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자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8년 동안 고통을 당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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