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장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두루마리를 먹는다.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선포하라고 했다. 하나님이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해서 에스겔 선지자가 두루마리를 먹었더니 입에서 꿀처럼 달았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했다.
두루마리를 먹는 선지자(겔 3:1-15)
이 대목은 앞 장과 같은 내용으로서 그리고 같은 환상의 계속으로서, 어떤 번역자(translators)에 의해서 앞 장과 적절히 결합되어 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야만 했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해 알려 준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은 것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선지자에게 가르쳐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에스겔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방법(1절). "인자야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 고 그리스도(에스겔이 보았던 "보좌 위에 앉으신 이" 1:26)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는, 이성(이해) 안에 이 계시를 수용하며, 이 계시의 의미를 이해하며, 이 계시를 올바르게 파악하며, 마음에 이것을 간직하며, 이 계시를 적용하며, 이 계시에 감동되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너의 마음속에 이 계시를 새기며, 이 계시를 새김질하라" 고 하신다. "너는 이 계시가 온전한 것같이 완전히 이 계시를 취하며, 이 계시와 다른 것을 만들지 말라. 아니, 네가 음식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이 계시 안에 있는 즐거움을 맛보라. 그리고 너의 영혼이 이 계시에 의하여 힘과 영양분을 얻게 하고, 네가 음식을 필요로 하는 것같이 이 계시를 먹고 마시게 하라. 또한 네가 음식물로써 너를 채우듯이 이 계시가 너의 영혼에 풍성하게 하라" 고 그리스도는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자들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명상해야 한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었기에 그것을 먹었나이다" (렘 15:16).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것을 잘 알아야 하며, 그것에 감동되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의 풍성하신 빛과 열로써 사람들에게 명확하고 열렬하게 말해야 한다.
1. 이 명령이 가르쳐진 방법. 앞 장에서는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네가 받은 것을 먹으라" (1절)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온 것이며, 우리는 그 말씀을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성서 안에 있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서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3절에서도,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고 한다. "너는 그것을 지겨운 것으로 생각해서 먹지 않고 다시 토해서는 안 되며, 감사하는 마음과 영양이 된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먹고. 배 속에 그것을 보유해야 한다. 너는 엘리후처럼 말이 가득하게 될 때까지 이환상을 주리라(욥 32:18). "말씀이 네 안에 거하게 하며, 너의 가장 깊은 곳을 차지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당연히 받게 하고 그 말씀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과 더불어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우리 마음의 모든 기능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소화시키기 위하여 제 구실을 다하게 되며 그 말씀은 우리 피와 정신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세상적인 것들을 비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창자에 이 두루마리를 채울 수 있다."
2. 이 명령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10절) "내가 네게 일러 사람들에게 들려줄 모든 말을 너는 귀로 듣는 것같이 너의 마음으로 받으며, 그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으라. 이 말을 너의 귀에 담아 두라" (눅 9:44). 그리스도는 이제 자기가 말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장차 어느 때든 자기가 하실 말씀에도 선지자의 주의를 요구하신다. "너의 온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으며, 이 말씀을 명상하고 너의 자신을 전적으로 이 말씀에 의탁하라" (딤전 4:15).
3. 환상 속에서 이 명령이 준수된 방법. 그리스도는 "에스겔의 입을 여시고 그 두루마리를 먹이셨다" (2절).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그 말씀을 우리 마음 가운데에 받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서 그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가져오며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실 것이다. 만약에 "두루마리"를 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영 된 자기 영으로서 그 말씀(두루마리)을 우리 앞에 펼쳐 놓기만 하고, "지혜의 영" 된 그의 영으로서, "우리의 총명을 열지" 않으며, 우리에게 그 말씀의 지식을 주지 않고 우리에게 그 말씀을 먹지 못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말씀에 낯선 자가 될 것이다. 선지자는 그 두루마리가 먹기에 매우 불쾌하고 초라한 음식물이라는 생각에서 그것을 꺼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는 그의 "입에서 달콤한 꿀맛" 같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만약 우리가 극히 어려운 명령일지라도 기꺼이 복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서 위안을 얻을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의무를 행하느라 겪는 모든 어려움에 대해 풍성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그 두루마리가 비록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선지자에게는 "달기가 꿀" 같았다. 은혜로운 영혼들은 큰 기쁨으로 이런 하나님의 진리를 받을 수 있지만, 이런 하나님의 진리는 동시에 사악한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말씀이 된다. 성 요한이 이 같은 징조(sign)에 의해 계시의 일부분에 참여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계 10:9, 10). 요한은 "천사들의 손에서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그의 입에서는 꿀같이 다나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 우리는 에스겔이 먹었던 그 두루마리도 역시 이와 같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14절에서 선지자(에스겔)는 "근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Ⅱ. 에스겔은 그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1절) "이 두루마리를 먹고," 그리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에스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해서는 안 되었다. 사명을 띠지 않고는 가게 하지 말며, 또 그 사명을 절반만 이행하는 일도 없도록 하자. 그러나 에스겔 자신이 그 말씀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 부지런히 또, 열심히 그것을 전해야만 했다. "거룩한 자의 말씀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욥 6:10). 왜냐하면 그것은 장사하라고 준 달란트를 땅에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리는 것이 예언자들의 대권이기 때문이다. "율법(살아있는 신탁)의 주심" 이 그러하듯, 예언도 "그들에게 속해 있다." 에스겔은 갈대아 사람들의 죄를 꾸짖기 위해서 파송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족속에게" 파송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들은 잘못이 있다면 남의 자식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견책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대해 에스겔에게 내린 지시는 앞 장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1) 에스겔은 하나님이 그에게 말했던 것만을 그리고 그것 모두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앞에서도(2:7) 말했다. 즉 "너는 내 말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말하기를(4절), "너는 내 말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고 하신다. 에스겔은 내용 면에 있어서는 물론이요,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법에 있어서도 가급적이면 그가 직접들은 것과 같게 말해야 했다. 축복받은 바울은 매우 훌륭한 창조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성령이 가르쳐 주는 말씀으로" 이야기했다(고전 2:13). 성서의 진리들은 성서의 언어로 나타났을 때, 즉 그들의 본래의 옷을 입었을 때 제일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2)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는 곳이 "이스라엘 족속" 이요, 하나님의 족속이요, 또한 자기 자신의 족속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했으며, 그들을 충실하고 온화하게 다루어야 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에스겔 자신이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며, 같은 나라 사람이고, 시련 가운데 함께 있는 동료였다. 그들과 에스겔은 함께 고난 받는 동료이었으며, 후에는 유다에서 바벨론에 이르는, 매우 슬픈 환경 가운데서 함께 길을 간 동료 여행자들이 되었고, 때때로 그들과 함께 울어 주었으며, 서로가 사로를 아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동정하는 방법을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결점에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에스겔에게는 자기 동족의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파송된 것이 아니라, 에스겔 자신의 민족의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통하지 않는 언어는 길고 무겁게 보인다. "너는, 네가 그들에게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고, 네 자신의 뜻을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도 없는 그런 열국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니라." 사도들은 실제로 "방언(언어)이 다른 열국으로" 보내졌다. 만약에 사도들이 "방언의 은사를" 갖지 않았더라면 열국 백성들에게 아무런 선도 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가 잘 알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희망했던 소수의 사람들이며 같은 민족인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만 보내졌다.
(3)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미 말해 준 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한 성격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으며, 만약에 에스겔이 그들 안에 있는 절망을 보더라도, 마음이 변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기에" (7절), 어떤 죄책도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못하며, 어떤 진노한 경고도 그들을 떨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은 그들의 완악함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1] 만약 예언자가 열방에게 갔더라면, 그들이 이스라엘만큼 완악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다른 민족에게 보냈다면, 비록 "언어가 다르지만,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열방들은 적어도 예언자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으려 했으며, 동족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존경심을 예언자에게 보여 주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예언자가 있었던 이스라엘 족속은 불순하고 변화되지 않았던 때에도,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에 움직였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은혜의 방편들이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을 개선시켰을 사람들에게는 보류되고 자신들을 개선시키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실 말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설명해야 하며, "여호와여, 당신의 판단은 크고도 깊나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2]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 자신께 대해서 완고했다. "이스라엘 족속이 네 말을 듣지 아니하리니,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것은 그들이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려는 때문이니라." 그들은 예언자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막대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막대기를 통해서 "여호와의 목소리가 성읍에 울려 퍼진다." 만약에 그들이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직접 "하늘의 소리"로써 그들에게 말했다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거부한다. 즉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들의 "육적인 마음에 원수가" 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실행하는 직무를 맡고 있는 예언자들에게 귀를 막아버린다.
(4) 에스겔은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를 강철같이 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8, 9절). 에스겔은 어느 것으로도 감동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자를 모욕하고, 그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일로 자부심을 갖는, 그런 "패역하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 들 에게도 보내졌다. 이렇게 강퍅한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을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1] 하나님은 이런 일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에스겔의 얼굴을 강하게 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다." 너에게 이런 경우에 요청되는 굳건함과 담대함을 부여했다." 아마 에스겔은 천성적으로 수줍어하고 겁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그 일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하나님이 은혜로써 그를 적절하게 만들어서 난관을 이기게 하셨을 것이다. 사악한 자들이 종교를 반대하는 일에 강퍅하면 할수록, 종교를 변호하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욱더 단호하고 공개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무죄한 자들로 사곡한 자들을 대항해서 분을 내게 하라" (욥 17:8). 악한 자가 대담해질 때는 덕 있는 자가 비겁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 해야 할 일이 생길 때는, 그 일을 위하여 사람들을 부르시어, 그들에게 때에 맞는 힘을 주실 것이다. 또 필요한 경우라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사 충실한 사역자들의 "이마"를 "금강석" 같이 단단하게 하실 수 있으며, 또 하실 것이다. 어떤 위협적인 힘도 그들의 안색을 바꾸어 놓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도다" (사 50:7).
[2] 따라서 에스겔은 그의 사명을 완수할 용기를 가져야 하며, 거룩한 안심을 지니고 일을 진행하며, 그의 적들의 어떤 비난이나 위협도 대수롭지 않게 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 말며, 무서워 말라. 그들의 무력한 적의의 위협이 너의 의기를 저하시키지 못하게 하며, 너의 앞길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 담대한 죄인들에게는 용감한 책망자가 있어야 된다. "악한 짐승들은" 엄하게 "꾸짖어야" 하며(딛 1:12, 13), "두려움으로써 구원받아야" 한다(유 23). 하나님을 친밀하게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 사악한 자들의 교만한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험담하는 혀를 몰아내는 화난 얼굴로 하여금 책망하는 혀를 제지하지 못하게 하자.
(5) 성공의 여부는 어떻든 간에,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도를 계속해야 했다(11절). 에스겔은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가야" 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들이리라고 희망했던 것이다. 에스겔은 그가 친밀한 연분을 맺고 있는 이스라엘 족속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녀들로" 여겨야 했으며, 바울이 그의 동족을 위해서 했던 것같이, 에스겔도 그들을 위해서 깊은 사랑을 가져야 했다(롬 9:3). 에스겔은 여호와가 그에게 말했던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해야"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말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다. 에스겔이 말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후원해 주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 하라." 우리의 사역의 성패가 우리에게 무관심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든 우리는 우리의 일을 계속해야 하며, 하나님에게 그 결과를 위임해야 한다. "여기에는 아주 선한 사람들만 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다" 거나, 혹은 "여기에는 매우 악한 사람들만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말해야 아무 소용도 없다" 고 말해서는 안 된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전하라." 그들이 그 말씀을 거부할 때는 그들에게 위험이 초래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라.
2. 이와 같이 예언자에게 주어진 임무에 따라서 세밀한 지시가 내림을 본다. 여기서는 다음 사실들을 알게 된다.
(1) 에스겔의 이런 선교는 거룩한 천사들도 크게 기뻐하였다. 천사들은 본성으로는 자기들만 못한 자이지만 그가 그렇게 명예스러운 임무에 종사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한다. 에스겔은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12절). 그것은 마치 천사들의 무리들이 예언자의 취임식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 때 나는 그런 소리와도 같았다. 왜냐하면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교회로 말미암아 알려졌기(즉, 교회로부터 반영되어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엡 3:10). 천사들은 이런 위대한 광경에 가능한 한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였다. 에스겔은 "그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문자대로는 "서로 입 맞추는" 소리를 들은 것인데, 이것은 천사들의 상호 간의 애정과 협력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천사들과 어울려 천사들 "바로 맞은편"으로 나아가고 있는 섭리자의 "바퀴들의 소리"를 들었다. 이런 모든 것은 에스겔의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이었으며, 시중을 드는 영광스러운 수행원들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그에게 충분한 조력을 해 줄 것임을 에스겔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소리는 찬송으로 끝난다. 에스겔은, 천사들이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1] 위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환상 중에 하강했다. 아니면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었다. 모든 천사들이여, 이 환상을 보고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 148:1, 2)고 말하는 동료 천사들과 함께 찬양을 드려라. "찬양하라. 그의 모든 천사들이여."
[2]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떠나고 있다. 천사들은 영광의 떠남을 슬퍼하지만, 그 일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는 찬양한다. 어쨌든 하나님은 항상 찬송을 받고 영광을 받으며, 앞으로도 세세토록 그러할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사명을 받을 때도, 하나님이 이와 같은 찬송을 받으시는 것을 그가 들었다(사 6:3).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는 많은 수치를 당하는 때에도, 저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많은 존경을 받고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는 일은 하나님께 신실한 모든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여호와의 영광" 이 우리가 사는 지상에서는 많은 멸시를 당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천상에서는" 많은 "찬송을 받으신다."
(2) 이 예언자 자신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있는 무장으로 그의 직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주어진 은혜는 헛되지 아니했다."
[1] 하나님의 영이 강한 손으로 에스겔을 인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갈 것을 명령했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를 들어 올릴 때" 까지는 그가 움직이지 않았다. "바퀴 가운데" 있던 "생물들의 영" 이 이제 이 예언자에게도 임하여, "그를 들어 올리었으니," 처음에는 천사들의 환호성을 아주 분명하게 듣게 하기 위해서였으나(12절), 여기서는 (14절) "에스겔을 들어 올려," 그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데리고 갔다." 재난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가고 또 그것을 예고하는 것은 그 자신이 매우 꺼려했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기꺼이 변명을 하려 했지만, 예레미야가 당했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렘 20:7). "주는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습니다." 에스겔은 그가 보고 들었든 모든 것을 자기만이 알고 있으려 했지만,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그를 강권하여" 압도해 버렸다. 예언자적 충동이 에스겔 자신의 성향을 극복했다. 그래서 사도들같이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행 4:20). 하나님이 사역자로 부르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직무를 행할 머리와 마음을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 에스겔은 슬픈 마음으로 따라갔다. "주의 신이 나를 데리고 가사,"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했다" 고 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로 활동할 때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과 방해와 학대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예레미야와 같은 흔적을 가져야만 할까?"라고 에스겔은 생각했다. 포로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포로 생활 속의 예언자의 생활은 어떠했겠는가? 이러한 것 때문에 에스겔은 고뇌와 불안 가운데서 갔다. 은혜의 역사가 명백하게 나타난 곳일지라도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생각에서 나오는 큰 망설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요나처럼, 나는 나의 임무를 피해서, 하늘의 환상에 불순종하여서가 아니라, 기뻐하지 않으면서, 괴로운 마음으로 갔노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는, 그 계시가 그에게 "꿀처럼 달았다" (3절). 에스겔은 그 말씀(계시)을 명상하는 가운데 충만한 기쁨으로 그의 온 생애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스겔이 그의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려고 했을 때는, 그들이 그 말씀에 무관심하고 그 말씀에 화를 내고, 죄악을 더욱 가중시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에스겔은 "괴로운 마음으로" 갔다. 그것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매우 큰 슬픔이다. 백성들이 개혁되기를 매우 꺼린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종들이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신실한 사역자들에게는 여간 큰 고통이 아니다. 에스겔은 실망을 경험했기 때문에 "분한 마음(뜨거운 마음)으로 갔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에스겔을 힘 있게 감동했다." 즉 에스겔에게 그의 임무 이행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임무를 하기에 적절하게 하고, 그에게 그 임무를 관찰시키도록 했으며, 에스겔이 경험했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임무를 더 잘 수행했으며, 그 임무에 자신을 몰두시켰다. "그때에 그가 사로잡힌 백성에게로 왔다" 고 했다(15절). 그곳은 저들이 모여 와서 "앉아 있는" 곳이었다. 그는 "칠일 동안 그들 가운데서 거하면서" 그들과 같이 일하고, 이야기하고, 독서를 하면서, 그들의 행실을 주시했다. 그러면서 에스겔은 자기에게 임할 "여호와의 말씀"을 기다렸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 적절하게 말하려고 하는 사역자들은 에스겔이 여기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 백성들과 친해야 하고, 그 백성들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 즉 "백성들과 함께 거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친절하게 전해 주어야 하며, 그 백성들이 "바벨론 강가에 앉아 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곳에서 크게 놀랐으며" 그의 백성들의 죄와 불행 때문에 매우 슬퍼했고, 그가 보았던 환상의 화려함에 의해서 압도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에스겔은 "그곳에서 매우 고독했다" (혹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환상도 보여 주지 않았으며, 사람들 중 아무도 그를 방문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여호와의 말씀" 이 그에게 임하기 전에는) 에스겔은 슬픔을 머금은 채로 지냈으며 좋은 인내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높이 세워서 크게 쓰시려 하는 사람들은 먼저 낮아져야 하며, 얼마 동안은 고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열왕기하 히브리어 주석 강해] 빈 그릇에 기름이 채워진 기적 사건(왕하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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