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8장 헬라어 강해] 돼지 떼에게 들어간 귀신 사건(마 8:28-34)

르호봇 2021. 3. 1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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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8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돼지 떼에게 들어간 귀신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 귀신 들린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평상시에는 귀신 들린 사람들 때문에 통행에 불편을 느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자신을 괴롭게 하려고 나왔냐고 합니다. 귀신들은 이미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께 간구하면서 돼지 떼에게 들여보내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명령하시기를 돼지 떼에게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 돼지들이 물에 들어가 몰사했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능력의 주님입니다. 귀신도 이미 알고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돼지 떼에게 들어간 귀신 사건(마 8:28-34)

 

28절은 카이 엘돈티 아우토 에이스 토 페란 에이스 텐 코란 톤 게르게세논 휘펜테산 아우토 뒤오 다이모니조메노이 에크 톤 므네메이온 엑셀코메노이 칼레포이 리안 호스테 메 이스퀴에인 티나 파렐데인 디아 테스 호두 에케이네스입니다.

마 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8:28

가다라 지방 - 마가(5:1 - 20)와 누가(눅 8:26 - 39)의 기록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표기되고 있다. '가다라'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가볼리(Decapolis, 팔레스틴에 있는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로서 10개의 도시를 의미함) 중의 한 도시였다. 반면 거라사는 가다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곳이다.

그러나 본문의 가다라 지방이란 표현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 상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다라'는 베레아 지역의 수도(首都)였으므로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거라사'까지 가다라 지방으로 호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Carr).

더욱이 복음서 기자들은 이 지역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명칭을 통일시키지 않아도 무방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 지역은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다(4:25). 이는 돼지 떼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로(30)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생각했으므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돼지를 거의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자 둘이 - 마가와 누가는 예수 앞에 등장한 귀신 들린 자를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다(5:2; 눅 8:27). 이는 아마 이들이 다른 한 삶은 제쳐두고 증세(症勢)가 보다 더 심각한 한 사람에게만 주의를 집중시켜 초점을 맞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Augustine, Calvin).

한편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귀신 들린 자'들은 주로 정신적 결함이나 자폐적 환자로서가 아니라 악한 영의 지배권 아래 놓인 자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대항키 위한 사단의 극렬한 저항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Homer A. Kent. Jr).

무덤 사이에서 나와 - 마가와 누가는 이들이 무덤 안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가다라 지방에는 석회암으로 이뤄진 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 위에는 고대 무덤들이 있었는데 그 무덤들은 조그만 방이나 굴 식()으로 되어 있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유대인의 무덤은 동굴처럼 되어 있으며 성벽 바깥에 흔히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마도 귀신 들린 자에게는 이와 같이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동굴 같은 무덤이 거처하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 사람들이 가까이 갈 경우 그 사람은 의식적으로 더럽힘을 입었다고 간주되었다.

저희는 심히 사나와 - 본절과 평행 구인 막 5:2 - 6과 눅 8:27에서는 귀신 들린 자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실로 이들은 군대 귀신들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광적인 힘을 과시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격이 파괴된 채 오직 마귀의 파괴적 성향만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도 그들이 거하는 곳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친 바다를 잠잠케 하셨던 그 주께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이곳을 친히 찾아오셨다.

예수를 만나니 - 휘판타오 5221 동사이다. 직설법 과거 능동태 복수 3인칭이다.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들어가시는데 군대 귀신 들린 사람 둘이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 직설법을 실제로 그 당시 귀신 들린 사람이 나왔다는 의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현재 시제를 쓰지 않고 과거 시제를 사용했다. 귀신 들린 자는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께 나오는 것도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만나는 것은 과거 시제를 사용한다. 어떤 의미일까? 귀신 들린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말한다. 그 당시 귀신 들린 사람이 이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을 만나러 가셨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29절은 카이 이두 에크락산 레곤테스 티 헤민 카이 소이 이에수 휘이에 투 데우 엘데스 호데 프로 카이루 바사니사이 헤마스입니다.

마 8: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8:29

하나님의 아들이여 - 이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지칭할 때, 특히 신성을 지닌 자신을 그리스도로 가리킬 때 사용되는 칭호이다(3:17). 이 말을 통해서 살펴볼 때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았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예수의 권위 있는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영적 감지력(感知力)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19:15).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도 이 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티 헤민 카이 소이) - 이 말을 직역하면 '우리와 당신(사이)은 무엇이냐'란 말로서 그 뜻은 '왜 우리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당신이 우리를 괴롭히며 방해하느냐?' '제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느냐?'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구약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관용어다(삼하 16:10; 왕하 9:18; 4:3). 여하튼 사단의 세력들은 영원한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 상대적이며, 제한적인 자유가 허락되어 있었던 것이다(2:2; 6:12).

때가 이르기 전에 - 본문의 ''(appointed time)란 것은 마귀의 최후 운명의 날이요 세상의 종말, 곧 대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악령들을 미혹하고 괴롭히도록 허용되지만, 심판 날에는 모든 악인들과 함께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벧후 2:4; 1:6; Enoch 16:1; Jub 10:8, 9).

결국 본문의 이 말은 그들이 예수가 그 심판주이심을 알았음을 시사하며 더욱이 지금, 즉 그때가 이르지도 전에 혹시 무저갱에 던져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20:3).

한편 이 ''가 이르기 전에 예수께서 귀신들의 활동을 억제하시고, 추방하셨다는 것은 종말의 순간에 예수께서 귀신들을 모두 심판하실 것에 대한 전조적(前兆的) 행동인 동시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이신 것이다(12:28).

여기 오셨나이까 - 귀신 들린 자의 '여기'란 말은 온 지구 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할 종말 개념과 연관된 '때 가 이르기 전에'란 말과 결부시켜 볼 때 미혹과 파괴를 일삼는 귀신들의 활동이 자유로운 이 땅 전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종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하셨던 것이다.

엘코마이 동사이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2인칭이다. 귀신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마지막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오셨냐고 말한다. 직설법은 예수님이 실제로 왜 우리를 멸하러 왔냐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 시제는 예수님은 이미 귀신들을 멸하실 권능과 능력이 있는 분으로서 오셨다는 것을 귀신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귀신들도 먼저 아는데 인간이 구원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니 이것이 문제이다.

30절은 엔 데 마크란 아프 아우톤 아겔레 코이론 폴론 보스코메네입니다.

마 8: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8:30

많은 돼지 떼가 - 마가는 돼지 떼의 수효가 약 이천 마리라고 밝히고 있다(5:13). 한편 마태는 돼지 떼가 '멀리서'(some distance from them) 먹고 있다는 상세한 보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기록의 사실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돼지 떼의 바다에의 몰(沒死)가 단순히 사람들의 소동에 놀라 도망치다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적 능력에 따른 결과로써 된 일임을 시사해 준다.

31절은 호이 데 다이모네스 파레칼룬 아우톤 레곤테스 에이 에크발레이스 헤마스 에피트렢손 헤민 아펠데인 에이스 텐 아겔렌 톤 코이론입니다.

마 8: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하니

=====8:31

귀신들이 간구하여 -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나자마자 귀신들에게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했음을 밝히고 있다(5:8; 눅 8:29). 이에 대해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하는데, 이는 마귀의 활동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간구한다는 단어가 파라칼레오 동사인데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복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귀신들이 실제로 예수님께 부르짖어 간구했다는 의미다. 미완료 시제는 자신들을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나가 돼지 떼에 들어갈 때까지 간구했음을 말한다.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 귀신들이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에 대한 몇 견해가 있. (1) 귀신들은 육체적인 '거처'(home)를 소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돼지 떼 속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2) 하나님의 피조물을 증오하는 마음에서 돼지 떼에 들어가 그 돼지 떼의 죽음을 초래하려 했다. (3) 그 지방 사람들의 소유인 돼지 떼들을 몰살시킴으로써 그 지방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척하고 미워하는 생각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세 가지 의견들 중에서 첫 번째 의견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돼지 떼를 자기들의 새로운 '거처'(home)로 삼기를 간구하였다면 어떻게 그 새로운 거처에 들어가자마자 그 거처를 파괴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제시된 이유는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 중에 다른 곳에서도 예수에 의해 쫓겨난 귀신들이 난폭한 행위나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기들의 분노를 표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17:14 - 20; 9:14 - 32). 한편 율법은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11:7). 그렇다면 이 돼지 떼를 먹이는 주인은 이방인이거나 아니면 이방인에게 팔기 위해 이 돼지 떼를 기르는 불경건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32절은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휘파게테 호이 데 엑셀돈테스 아펠돈 에이스 텐 아겔렌 톤 코이론 카이 이두 호르메센 파사 헤 아겔레 톤 코이론 카타 투 크레므누 에이스 텐 달랏산 카이 아페다논 엔 토이스 휘다신입니다.

마 8: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8:32

가라 하시니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 예수께서 마귀의 요구를 들어주신 사실에 대해 (1) 어떤 이들은 (Plummer, Weiss) 예수가 귀신들에게 '가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귀신 들린 자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라고 허락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소 무리가 따른.

이와는 대조적으로 (2) 마귀가 무저갱에 떨어질 종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선택할 일말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Hendriksen). 이와 더불어 (3) 예수께서 그곳 주인들에게 귀신 들린 이 두 사람의 가치가 돼지 떼보다 더 귀중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이해하는 학자들(Rosenmu ler)이 있다.

여하튼 귀신들은 모든 생명체, 특히 무 인격체에 쉽게 들어가 그 대상을 자유로이 장악할 수 있었기에 돼지에게로 손쉽게 돌입할 수 있었다.

온 떼가 비탈로 몰사하거늘 - 이는 귀신 들린 자가 귀신들에게 완전히 놓임 받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다. 실로 대자연의 주인이신(23 - 27) 예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원키 위해 그 천하 중 일부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귀신들의 난폭성이 두 사람에게서 떠나 돼지에게로 옮겨짐으로써 판단력이 결여된 무 인격체인 돼지들은 죽음에의 질주(疾朱)를 하게 된다.

몰사하다는 단어가 아포드네스코이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복수 3인칭이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 돼지 떼들이 물속으로 들어가 모두 죽었다. 귀신도 함께 몰사되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이런 사건을 설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직설법을 사용하여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고 말한다. 과거 시제는 귀신들과 돼지 떼들은 몰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음을 말한다.

33절은 호이 데 보스콘테스 에퓌곤 카이 아펠돈테스 에이스 텐 폴린 아펭게일란 판타 카이 타 톤 다이모니조메논입니다.

마 8: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도망을 쳤다. 시내에 들어가 예수님이 하신 일과 귀신 들린 자들의 일을 보고했다. 예수님이 하신 사건은 막아도 막아지지 않는다. 복음이라는 것은 막으려고 하면 더 멀리 전파된다.

34절은 카이 이두 파사 헤 폴리스 엑셀덴 에이스 쉬난테신 토 이에수 카이 이돈테스 아우톤 파레칼레산 호포스 메타베 아포 톤 호리온 아우톤입니다.

마 8: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8: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 이 지방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재산에 입힌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예수를 체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를 만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보자 그 위엄에 제압당하여 단순히 그곳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 (1)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릇된 생각을 불러일으켜 그리스도를 반대하게 한다. 특히 사단은 '온 시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두려움을 크게 주입시킴으로써(눅 8:37) 자연히 온 시내 사람들과 예수 사이를 완전히 결별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2) 이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곧 가엾은 사람들에게 행하신 선한 일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들은 구세주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였으며 세상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실로 물질적 한계 상황에만 머무르는 사람들은 진리와 구주를 수용할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 오늘날도 이 가다라 지방 사람들처럼 선한 기적을 보고도 자신들의 재산에 손해가 온다는 이유로 기독교의 참된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떠나 달라고 요청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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