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28장 헬라어 강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마 28:1-10)

르호봇 2021. 3. 1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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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8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에서 큰 이슈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믿는 신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부활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로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믿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마 28:1-10)

 

1절은 옾세 데 삽바톤 테 에피포스투세 에이스 미안 삽바톤 엘덴 마리아 헤 마크달레네 카이 헤 알레 마리아 데오레사이 톤 타폰입니다.

마 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8: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 `다하여 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옾세 데'는 일반적인 시간 지시사로서 `이제... 후에'(after)라는 말이다. 이를 근거로 본문을 좀 더 정확히 묘사하면 `이제 안식일이(완전히) 지난 후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16:1, 2; 눅 24:1; 20:1). 그렇다면 저녁 해질 때(오후 6시경)를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본 상황이 깊은 밤을 거의 다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의 문턱에 이미 들어선 때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의 이 날을 기념했고 점점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다. 이제 길고 무거웠던 율법의 시대는 마감되고 부활의 주를 중심으로 한 새 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은 오늘날의 일요일, 즉 주일을 뜻한다. 즉 이날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주일로 대체되어 지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 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으니 바로 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을 성수(聖守)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안식일을 한 주간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개념에 따른 표현이다. 대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답습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안식일 대신 `주일' 곧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포스코'의 원 의미는 `날이 새다', `날이 밝아오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적 어법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의미는, 하루 24시간이 시작되는 해질 때를 뜻한다. 눅 23:54에서도 금요일 저녁을 표시하기 위하여 `에피포스코'가 동일한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유대적 어법과는 거리가 멀다. 즉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 16:2에 보면 `아나테일란토스 투 헬리우' 즉 `돋는 때에'로 되어 있어 저녁이 아닌 아침 시각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눅 24:1서도 `오르드루', 즉 `새벽'으로 되어 있어 그 시각은 마가복음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아피포스코'는 분명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새, 먼동이 트는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공관복음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활 사건이 안식일이 완전히 끝난 그다음 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와 아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이미 예수의 무덤을 확인한 바 있(27:61) 두 여인이 무덤을 찾아왔다. 그 여인들은 안식일 동안에는 멀리 걷고자 아니했을 것이므로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 간에는 무덤을 찾은 사람들을 기록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차이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따라 많은 논의가 분분하다.

2절은 카이 이두 세이스모스 에게네토 메가스 앙겔로스 가르 퀴리우 카타바스 엑스 우라누 프로셀돈 아페퀼리센 톤 리돈 아포 테스 뒤라스 카이 에카데토 에파노 아우투입니다.

마 28: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28:2

큰 지진이 나며 - 2-4절은 마태만의 특수한 기록들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빈 무덤'의 발견만을 언급하지만 본문에서는 여인들이 `큰 지진'과 천사가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주는 것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27:51; 19:18; 68:8; 16:26; 12:26).

따라서 여기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 부활의 이면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역사하셨음을 의미한다(2:5,6). 27:51에서의 지진이 하나님의 구원의 보증이신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이자 더 나아가 그 한계를 드러내고만 율법 구세대(舊世代)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본문에서의 지진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 질서의 구원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진과 돌의 굴림은 예수의 부활의 시점을 알려 주거나 부활한 예수를 무덤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이적들이라기보다 오히려 여인들과 다른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며 더 이상 죽음 아래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예수의 부활의 흔적을 친히 목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McNeil).

실로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떨치시고 생명이 충만한 상태로 부활하시어(벧전 3:18) 변화된 몸을 입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의 유무(有無)에 상관없이 무덤 벽을 조용히 통과해 나가셨던 것이다요 20:19).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 여기 언급된 `천사'(1:20-23; 18:10)대해서는 마가(`하얀 옷을 입은 한 청년')보다 마태와 누가가 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 천사적 존재들은 자주 구약 성경에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음으로, 그 같은 표현 상의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언급한 `청년'`천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Lane, Jos, Antiq.V,277).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서는 그 천사가 `하나'인데 비해 누가와 요한에서는 `'로 묘사되었는데 이 차이 역시 본 사건이 초자연적 기사라는 점에서 각각의 경험과 그 기술하고자 하는 도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봄이 적당 하리라고 생각된다.

그 위에 앉았는데 - 여기`앉았는데'(에카데토), 미완료 시상으로서 마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계속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실로 그 천사는 예수 부활의 산 증인으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증, 보존하는 일을 수행했던 일종의 영광스러운 도구였던 것이다.

3절은 엔 데 헤 이데아 아우투 호스 아스트라페 카이 토 엔뒤마 아우투 류콘 호세이 키온입니다.

마 28: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28: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 천사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번개 같은 형상'이라는 묘사는 천사의 몸에서 매우 밝고 환한 광채가 나고 있었다는 것과 `눈 같이 흰 옷'에서는 그 존재의 순결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예수의 변형되신 모습(17:2; 9:3)을 연상케 하며 그밖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묘사한 것과 흡사하다(7:9; 10:6; 1:13,14).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초자연적인 천사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거룩 성과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천사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마다 다양하게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16:5)으로,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24:4)으로, 요한복음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24:4)로 되어 있어 천상적(天上的) 존재의 신비를 다양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4절은 아포 데 투 포부 아우투 에세이스데산 호이 테룬테스 카이 에게논토 호세이 네크로이입니다.

마 28: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28:4

수직 하던 자들이... 무서워하여 떨며 - 무덤을 지키도록 배치된 자들(27:64-66)지진과 더불어 일어난 천사의 임재 앞에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들이 예수의 처형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직, 간접적으로 듣고 보고 하여 무덤에 묻힌 자의 실체(實體)가 큰 의미를 둘 만큼 대단치 않은 존재라고 방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고, 또 그들이 어리석은 보호벽(무덤)을 뚫고 예수는 부활하셨던 것이다. 진정 그들의 두려움은 죄인이 성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공포였다(3:10). 한편 본문의 `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세이스데산'은 `흔들다'라는 뜻의 `세이오'의 제1 과거 수동형으로 `흔들리게 되었다'라는 뜻을 가지는데 27:51에서 땅의 진동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 앞에 선 죄인들의 실존적 모습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6:4,5). 이와 더불어 본문에는 수직 하던 자들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라고 보고 하는데, 아마 그들은 상상을 초월한 눈 앞의 이적들에 압도당하여 잠시 혼절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잠 시간의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 곧장 성내로 달려가 그들의 목격담을 전하게 된다(11). 진정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훼방꾼이 아니라 너무도 확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고 만 것이다. 참고로 계 1:17에는 사도 요한이 부활의 주님을 볼 때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5절은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앙겔로스 에이펜 파이스 귀나이크신 메 포베이스데 휘메이스 오이다 가르 호티 이에순 톤 에스타우로메논 제테이테이니다.

마 28: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28:5

너희는 무서워 말라 - 천사는 먼저 여인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여기서는 `너희'(휘메이스)이라는 대명사가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색이 되어있는 무덤지기들은 배제된 채 여인들 에게만 무서워 말라는 말이 주어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두려움에 방치되어 버려질 사람이 있고 두려워 말라고 하는 선택적 위안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 천사는 여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천사의 말에서 강조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이다. 스타우로오라는 동사이다. 분사 완료 수동태 목적격 남성 단수이다. 완료 시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었고 선택받은 자들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대속했다는 의미다. 수동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격은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강조는 분명한 죽음이 분명한 부활의 전제(前提)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함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결코 외롭게 고립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감찰하시며 함께 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에 대한 여인들의 신실함이 인정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6절은 우크 에스틴 호데 에게르데 가르 카도스 에이펜 듀테 이데테 톤 토폰 호푸 에케이토 호 퀴리오스입니다.

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28:6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 하나님의 천사는 계시의 중개자로서의 임무를 띠고 있다. 복음서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뜻을 전달시켜주기 위해 천사가 꿈에 나타났었는데(1:20 ff).

이와 평행을 이루어 복음서의 마지막에 계시의 중개자로서 또다시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리며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그의 말씀하시던 대로'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으로 12:40; 16:21; 17:23; 20:18, 19절에서 예언한 `부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있.

또한 `여기 계시지 않고'라는 말은 그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므로 예수가 죽어서 무덤 안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제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바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 `그가 살아나셨느니라'라는 말은 예수의 자력(自力)적인 행위를 강조한 말로서 예수의 신적 전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는 몇몇 성구들(16:21; 17:23; 6:4; 8:11)에는 부활이 성부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의 결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공동 협력에 의한 신적인 승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살아났다는 단어가 에게이로인데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이다. 과거는 이미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부활시키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다. 수동태는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대목으로 `빈 무'은 예수께서 `'으로 부활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빈 무덤'을 인정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28:11-15). 사실 예수가 죽어서 누었던 자리에 있지 않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즉 예수가 부활했거나 아니면 적대자들의 말처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는 적대자들의 주장은 모순을 드러내는 바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게 된다. 렇다면 유일한 하나의 가능성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게 되는 것뿐이다. 그분은 확실히 자신의 예언대로 부활하셨고 죽었던 그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이다(3:21).

7절은 카이 타퀴 포류데이사이 에이파테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호티 에게르데 아포 톤 네크론 카이 이두 프로아게이 휘마스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에케이 아우톤 옾세스데 이두 에이폰 휘민입니다.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28:7

빨리 가서 -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그 무덤 앞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천사들은 그 여인들에게 예수 부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황급히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었다. 이는 분명 권유가 아니라 촉급한 명령이었다.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 본문과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7에서는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을 분리시켜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가 마가보다는 베드로를 우호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금의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던 부활의 예언을 망각하고 있거나 불신하고 있었던 제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일 수 있기 때문인데 마가는 베드로를 따로 분리시켜 그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베드로의 대표적 불선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26:69-74).

실로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서 예수를 부인하기까지 했었던 것이다(14:66-72). 그에 반해 마태는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지 않고 제자들 속에 포함시켜 말함으로써 제자들 모두의 공동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혹 이 말씀이 책망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실망 가운데서 고독해하고 있을 제자들에게 보내는 기쁨의 소식이라고 해도 베드로에 대한 특별성이 언급되지 않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의 부활'이라고 하는 기쁨의 소식은 각각의 제자들 모두에게 동일(同一)한 기쁨이 됨을 말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 천사가 여인들에게 거듭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제자들이 이 말씀을 전해 들었다면 그들은 아마 26:32의 말씀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 따른 성취에 앞서 유대 지경에서 여인들과 엠마오의 두 제자 및 소그룹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당신의 공식적인 현현은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갈릴리에서 두 번 나타나시게 된다(16-20; 21). 이제 갈릴리는 더 이상 어둠과 소외의 현장이 될 수 없었고 복음과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10:37).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당신의 제자들을 대부분 부르셨던 갈릴리를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러운(행 1:11) 처소로 만드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가시나니'(프로아게이)는 현재 진행적인 의미가 아니라 생생한 미래를 나타내는 말로써 예수께서는 약속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는 뜻이다(1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특별히 본문의 `일렀느니라'(에이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적 선언 시에 흔히 사용하던 문구이다. 따라서 천사의 이 말은 계시의 중개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종결 문구인 동시에 예수의 부활이 확증적임을 선포하고 있다.

8절은 카이 엑셀두사이 타퀴 아포 투 므네메이우 메타 포부 카이 카라스 메갈레스 에드라몬 아팡겔일라이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입니다.

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28:8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 들은 여인들의 혼합된 심리 상태를 묘사해 주고 있다.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8에서 여인들의 상태를 `놀람', `두려움'의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본문에서는 `무서움'`큰 기쁨'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대비(對比)시킴으로써 한편은 천사의 임재를 위시한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예수의 부활 소식에 접하여 `큰 기쁨'을 느끼고 있음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건을 체험할 때 생겨나는 심리 상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바 초자연적 사건 앞에 인간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으나, 그 사건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자각할 때 한없는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통일되면서 인간은 진정한 신앙적 희열을 느끼게 된다.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 이 부분도 막 16:8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천사가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7)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본문에서는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들은 후 `큰 기쁨'에 차서 천사의 고지(告知) 사항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와 마태의 교훈적 강조점이 다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마가는 예수의 측근들에게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로마의 혹독한 탄압 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날 위기에 처해있는 마가의 공동체에게 제자들처럼 나약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동시에 신앙을 지키지 못한 성도들에게는 제자들도 실패했었기 때문에 평범한 신앙인들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일이므로 한 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반면 마태 공동체의 경우는 마가에 비해 덜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어두운 면보다는 예수의 부활의 기쁨을 기념하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뜻에서 기쁨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다.

9절은 호스 데 에포류온토 아팡게일라이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카이 이두 호 이에수스 아펜테센 아우타이스 레곤 카이레테 하이 데 프로셀두사이 에크라테산 아우투 투스 포다스 카이 프로세퀴네산 아우토입니다.

마 28: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 예수의 부활 증거로 '빈 무덤'에 이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현현(顯現)하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현현을 최초로 목격하는 행운을 부여받은 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여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며 단지 재산 목록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던(20:17)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께서 부활 후 처음으로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이자 부활의 증인으로 인정하셨음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서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여인을 택하심으로 최초의 범죄자 하와의 후손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변하여 큰 소망과 위로가 되게 하셨다(Chrysostom). 한편 예수의 인사말 `평안하뇨'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인 헬라어 `카이레테'의 번역으로 `기뻐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인사말은 일찍이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때 제자들이 근심하게 될 것이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16:20)고 하셨던 예언을 생각나게 해 주며예수 부활 소식을 들었던 여인들이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인 상태에 있었듯이(8) 예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 에게 있어서도 근심과 기쁨의 감정을 교차케 해주는 역설적 사건임을 깨닫게 해 준다. 결국 이 말씀은 이제는 두려워 말고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자들이...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이와 같은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인 존경과 경외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다. 즉 이 여인들의 이 같은 행위는 결단코 공포나 어떤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취한 피동적인 경배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방금 전해 들은 그 여인들이 변화된 예수의 영광스러운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신적인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심히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경배였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 잡고자 했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20:17,17)이 여인들의 행위(온전한 경배로서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짐)를 기쁘게 용납해 주셨던 것 같다. 이로써 그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체를 눈으로 보고 또 손으로 만지는 가장 확실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될 수 있었다.

10절은 토테 레게이 아우타이스 호 이에수스 메 포베이스데 휘파게테 아펭게일라테 토이스 아델포이스 무 히나 아펠도신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카케이 메 옾손타이이니다.

마 28: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28:10

예수께서 가라사대 - 본문은 표면상으로 5-7절의 천사의 말을 다시 예수께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수께서 천사의 말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다음의 사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천사가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지진이 일어나며 무덤 문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 앞에서 무서워하는 여인들을 안심(安心)시키는 것임이 자명하다(5). 그것에 비해 지금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은 여인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안심을 했고 이제는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여인들이 예수를 보았을 때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마냥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반가움과 기쁨이 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인들에게 전해진 `무서워 말라'라는 말은 무덤에서의 사건과 갑작스러운 예수와의 대면에 의한 여인들의 공포를 일소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그녀들의 주를 잃은 절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주를 잃은 절망과 두려움은 아직도 예수의 부활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무리들 그리고 더 넓게는 마태의 공동체에게 더 심했을 것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무서워 말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직접적 대상인 여인들을 넘어 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위로(慰勞)의 말씀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하였다(7).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말하라고 한다. 어떤 학자(Lange, Wycliffe)`내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11 제자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형제들'에 대한 본서의 용례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태는 5:22-24; 18:15; 23:8 등에서 `형제들'이라는 말을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친교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했었다. 그리고 12:49, 50에서는 `내 형제'라는 표현을 11 사도를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러므로 `네 형제들'11 제자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으며, 예수의 부활 소식은 11 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으로 확대되어 전해져야 했던 것이다(Stonhouse, Witness of Matthew, pp. 176-177).

한편 마태는 무엇 때문에 갈릴리의 부활 현현에 관한 기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마태복음 전체를 꿰뚫는 두 가지 주제와 관련이 있다. 첫째, 메시아는 천대(賤待) 받는 지역에서 나와(2:23) 그 천대받는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4:15, 16).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5:3).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유대인 중에서도 무시당했던 여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증인으로 삼으신 것이다(1,5-7; 27:55, 56). 둘째, 이방의 갈릴리(4:15)는 마태복음에서 이방 선교라는 차원 높은 주제와 잘 조화된다는 것이다(1:1; 2:1-12; 4:15,16; 8:5-13; 10:18; 12:21; 13:17;15:21-28; 24:14).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 즉 이방 선교를 준비하는 것이다(18-20).

 

 

[산상수훈 팔복 헬라어 주일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 복이 있나니”(마 5:7)

안녕하세요. 오늘은 산상수훈 팔복 헬라어 주일설교 중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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