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27장 헬라어 강해]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마 27:32-38)

르호봇 2021. 3.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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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7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올라가는데 중간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됩니다.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구속사 관점에서 선택받은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메고 함께 골고다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죄가 주님께 전가되고 주님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주님께 옮겨지게 됨으로 나의 모든 죄는 사라졌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성도의 대표로서 자신의 죄를 주님께 전가함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의 죄가 주님께 전가되었음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든 원죄와 자 범죄는 주님께 전가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마 27:32-38)

 

32절은 엑셀코메노이 데 휴론 안드로폰 퀴레나이온 오노마티 시모나 투톤 엥가류산 히나 아레 톤 스타우론 아우투입니다.

마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27:32

나가다가 -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인 시몬과의 만남이 곧 있었던 것으로 보아(막 15:20, 21)'관정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사형 집행이 성 밖에서 집행되었던 규정(24:14; 왕상 21:13)과 사람들이 많은 곳을 통과하여 형장에 이르게 하는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예수는 예루살렘 시민이 모두 목격할 수 있는 대로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께서 나아갔던 그 고난의 길을 가리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라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당시 심한 매질로 인해 거의 기진했기 때문에(19:17) 혼자의 힘으로 형장에까지 완전히 나아갈 수 없었다(13:13).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 - 아마 그는 리비아 서북 편에 위치한 구레네의 '디아스포라'란 큰 유대인 집단에(Jos., Antiq., XIV.7,2; Cont.Apion., 제2권) 소속된 일원이었던 것 같다(11:22; 13:1). 한편 구레네 거주자들은 예루살렘에 자기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며, 시몬은 이때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사도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로 미루어 볼 때에(15:21; 16:13), 시몬 역시 이 사건 이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가 유월절과 안식일을 눈 앞에 두고 피 흘리는 십자가를 지고자 했겠는가마는 이때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원망과 불평 없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비록 항거할 수 없는 로마의 군법에 따라 징발(徵發)되는 비운을 맞았으나 그는 피 흘리며 죽어가신 예수의 최후를 누구보다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으며, 그 후로 전가족이 구원 얻는 크나큰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억지로'(엥가류산) 문법은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복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로마 병사들이 억지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 한 사실이 있다는 말이다. 과거 시제는 시몬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말로서 마치 중앙정부로부터 특명을 받은 전령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강제로 말이나 사람을 차출해갔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5:14), 여기서는 '징발하며'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은 '억지' 십자가를 졌지만 결과적으로 '억지로' 축복을 받은 격이 되었다. 한편 본절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대한 오해를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하다. 즉 제2세기 영지주의의 이단자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는 예수가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도중에 바꿔치기 당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34절의'예수께'는 원문에 의하면 '그에게'이고 따라서 본문상 '시몬에게'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인다(31절 이후에는 원문상 예수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35절의 '예수를 십자가에'도 원문에는 '그를 십자가에'라고 되어 있어 이 경우 역시 '시몬을 십자가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실리데스의 견해는 이 장면을 철저히 오해한 것이며, 이일로 인해 그는 이단자로 정죄되었다. 사실 법적용에 있어서 철저했던 로마 당국자들과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심히 원했던 유대 지도자들이 이러한 실수를 용인할리 만무하다. 그와 더불어 요 19:17에 의하면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가셨다'라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33절은 카이 엘돈테스 에이스 토폰 레고메논 골고다 호스 에스틴 레고메노스 크라니우 토포스입니다.

마 27: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27: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 - '골고다'라는 말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의 '길갈타' 또는 '굴골레트'를 헬라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해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그곳이 많은 시체가 버려짐으로 자연히 해골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Jerome, Hieronymus)도 있고, 그곳이 해골 모양의 언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Bengel, Cyril, De Wetty)도 있는, 후자의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한편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곳을 지칭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는 '갈보리'(Calvary)는 고든(Gordon)이라는 한 장군에 의해 명명되었으나 아람어와는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보리'라는 말은 원뜻과 조화되는데 그 이유는 '갈보리''해골'을 의미하는 라틴어 '칼바'(Calva)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골고다'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아무튼 가장 가능성 있게 생각되는 것은 그곳이 '성에서 가까운'(요 19:20), '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29), '성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도로변'(32)에 위치한 오늘날의 '성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가까운 곳으로 추정된. 이곳 외에도 모든 장군이 주장하는 '고든 갈보리'(Gor-don's Calvary) 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4절은 에도칸 아우토 피에인 옥소스 메타 콜레스 메미그메논 카이 규사메노스 우크 에델렌 피에인입니다.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27:34

쓸개 탄 포도주 - 이는 시편 69:21절을 반영하고 있으며 48절에서 비슷한 구절이 다시 반복된다. 한편 마가복음에는 '몰약을 탄 포도주'로 되어 있는데 이 같은 차이는 아람어의 '몰'(morah)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marrah)과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쓴 맛이나 독성에 있어서도 유사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사건에서 마태복음이 증언하는 '쓸개 탄 포도주'란 말이 구약 시편에 더 가깝다. 여하튼 본문의 '쓸개'(콜레)란 진짜 '쓸개''담즙'을 뜻하기보다 쓴 맛이 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말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carson, Lenski).

그리고 '포도주'는 매우 센 독주(毒酒)로서 취기가 속히 들고 마취 성분이 강한 술을 가리킬 것이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쓰디쓴 포도주를 사형당하는 죄수에게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1) 십자가 형을 당하는 죄수들에게 순간적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거나, 그 고통을 참아낼 힘을 주려했기 때문인 동시에

(2) 로 인해 거의 마취되다시피 한 죄수들은 사형 집행관들이 손쉽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독한 포도주를 최후의 순간에 이른 자에게 제공된 것은 잠 31:6, 7의 교훈에 근거한 관습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더불어 이때 예수께 드려지는 포도주는 예루살렘의 어느 부유한 여인의 자발적인 헌납에 의해 자비의 선물로 전해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Li-ghtfoot).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 예수께서는 자비의 선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일단 맛을 보시는 정도로 그치셨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그 포도주에 마취 성분이 있음을 익히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여기서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우크 에델렌)는 말은 계속적인 거부 의사를 내포한 말로서, 예수는 그 당시 몇 번에 걸쳐 마실 것을 강요당했으나 끝까지 마시지 않을 것을 고사(固辭)하셨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취제의 도움으로 고통을 덜어보려 하기보다는 모든 감각을 지닌 채 맑은 정신으로 끝까지 다가오는 뼈저린 고통에 맞서고자 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 순전히 당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것으로서 그 십자가가 제공하는 아주 세미한 고통조차도 친히 감수하시며 인성(人性)으로서 당하셔야 할 모든 고통을 끝까지 체험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진정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당신의 ''(20:22; 요 18:11)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고자 하셨다. 한편으로는 이 같은 행동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바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26:29)는 당신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성취하고 계신 것이다.

35절은 스타우로산테스 데 아우톤 디에메리산토 타 히마티아 아우투 발론테스 클레론 히나 플레로데 토 헤덴 휘포 투 프로페투 디에메리단토 타 히마티아 무 헤아우토이스 카이 에피 톤 히마티스몬 무 에발론 클레론입니다.

마 27: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27:35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 십자가 형은 로마인들의 독특한 형벌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단지 이방 점령 지역의 극악한 범죄자들에게만 적용되었던 형벌이다(Jos., Judoll,1). 한편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 처형은 (1) 먼저 공식적 선고를 받은 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향한다.

(2) 형장으로 행하는 길에 자기 죄목이 적힌 명패를 가슴에 달아 지나가는 통행인들에게 인격적 모독을 받게 한다. (3) 형장에 도착한 죄수의 옷을 벗긴다. (4) 독한 술로 육체와 정신을 혼미케 한 후 십자가에 못을 박거나 묶어 그것을 반듯이 세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미 세워둔 십자가 위에 죄수를 끌어올려 못 박는 경우도 있음).

(5) 그런 상태로 계속 버려두어 죄수로 하여금 서서히 죽어가게 한다(이때 건강한 남성의 경우 3일 정도 경과해야 숨이 끊긴다). 이때 각종 야수(野獸)나 새들이 죄수의 몸을 뜯어먹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6)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그 죄수의 다리를 꺾고 치명적인 외상(外傷)을 가함으로써 어떠한 소생 가능성도 없애 버린다(물론 이때 외관상죽은 것이 확인되면 다리는 꺾지 않고 창으로 몸을 찔러 확인 사살만 한다).

여하튼 로마법에 의해 십자가형에 선언된 사형수는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리도록 그 손목과 발이 묶이거나 못 박히는데, 예수의 경우는 못 박혀 달리신 예이다. 그런데 로마법에 따르자면 죄수들은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예수의 경우 그들이 유대인들의 규정(M. Sanhedrin 6:3)에 따라 허리 아랫부분을 가리는 옷을 예수에게 걸쳐주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십자가의 형태는 X자형(Crux decussata) 또는 T자형(Crux commi-ssa), + 자형(Crux immissa)과 같이 여러 가지였으나 전통적인 형태는 +자형이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그 머리 부분에 명패가 부착된 것으로 보아 십자형임이 분명하다(37).

죄인이 십자가에 달리는 높이는 몇십 센티에서 단 몇 센티까지 다양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지면에서 그리 높지 않게 달리셨던 것 같다(48:19:29).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21:22, 23) '나무 위에 달린 저주받은 자'(갈 3:13)로서 최후의 순간을 맞으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엄청난 참혹의 현장을 단순히 한 분사구문('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로 취급하고 오히려 뒤이어지는 군병들의 제비뽑기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것은 그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적어도 그 당시 사람이면 익숙히 알고 있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기자(記者)가 더 이상 떨리는 붓끝으로 예수의 참혹한 절규를 추적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 뿐이.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가 갖는 것이 통례였다. 이때 4명의 로마 군병들은 아마 예수의 겉옷과 속옷 그리고 허리띠와 신발을 나눠갖기 위해 제비 뽑았을 것이며, 이것은 요 19:23, 24에 기록돼 있는 바처럼 시 22:18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가는 이때를 제3시, 곧 오전 9시로 기록함으로써 (막 15:25) 예수의 처형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36절은 카이 카데메노이 에테룬 아우톤 에케이입니다.

마 27: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27: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 마가복음 평행 구인 막 15:25'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를 생략하고 마태는 그 자리에 이 문구를 기록하고 있다. 저들이 지키는 까닭은 못 박힌 자의 고통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누가 구해내지 못하게 지키기 위함이다.

죄수가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까지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고유 업무였던 것이. 하여튼 예수는 분명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호흡을 멈추신 것이 확실하다.

37절은 카이 에페데칸 에파노 테스 케팔레스 아우투 텐 아이티안 아우투 게르람메넨 후토스 에스틴 이에수스 호 바실류스 톤 이우다이온입니다.

마 27: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은 만왕의 예수이다. 히브리어로 유대인의 왕의 첫 글자를 따면 아도나이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온다. 요한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만왕의 왕이시면서 하나님이다.

38절은 토테 스타우룬타이 쉰 아우토 뒤오 레스타이 헤이스 에크 덱시온 카이 헤이스 엑스 유오뉘몬입니다.

마 27: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7:38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 - 처형되는 죄수의 죄목을 밝히는 내용의 패(주로 나무 위에 석고를 바르고 그 위에 붉은 글씨 내지는 검은 글씨를 새겨 넣음)를 목에 걸거나 가슴에 매달고 형장에까지 가서 십자가를 세우고 그 죄패를 머리 위에 매다는 것이 로마 처형법상 한 관례였다.

한편 예수의 죄패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19:19, 23) 각 복음서 간에 약간의 차이를 이룬다(15:26; 23:38; 19:19 ). 그중 요한복음의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이 가장 완전한 형태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빌라도는 이 죄명(罪名)을 통하여 자신의 반(反) 유대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유대인들의 처지와 그들 서로 간의 반목(反目) 상태를 조롱했던 것이다. 한편 이 죄패는 각 지방에서 오는 순례자를 위해 히브리어(아람어), 헬라어(당시의 보편적 언어), 라틴어(로마의 공용어)로 각각 기록되었다(19:20).

그런데 이 세 가지 언어의 패에 대해 혹자(Westcott)는 그리스도를 위한 종교(히브리어), 문화(헬라어), 사회(라틴어)적 예비 활동의 총체적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는(Robertson) 유대인을 위한 선언(히브리어), 법적 선언(라틴어), 만인을 위한 공표(헬라어)등으로 세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저들은 예수를 단죄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조롱하려고 그런 죄패를 붙여 놓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전리를 고백하는 것이 되었다. 실로 복음서 초두에 동방 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예배했었고(2:2) 그에게 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었.

이제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에 로마의 군인들은 그의 옷을 빼앗고, 옷을 벗기은 채 고독하게 죽어가는 그의 십자가 아래 달아 있으면서 처음에 붙여진 그 칭호를 마지막으로 달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묘하게도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 민족들은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라고 요구한다(19:21).

 

 

[마태복음 27장 헬라어 강해] 가시관을 쓴 예수 그리스도(마 27:27-31)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7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가시관을 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 나가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로마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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