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8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십계명을 오해한 부자 청년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부자 청년을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을 가지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다 지켰냐고 묻습니다. 그때 부자 청년은 당당하게 자신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영생도 얻고 하늘에게 네게 보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부자인 고로 고민합니다. 돈 들지 않은 십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말하면서 막상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라고 하니 근심했습니다. 재물과 영생 둘 중에 고민을 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 대신에 재물을 선택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재물 때문에 영생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계명을 오해한 부자 청년(눅 18:18-23)
18절은 카이 에페로테센 티스 아우톤 아르콘 레곤 디다스칼레 아가데 티 포이에사스 조엔 아이오니온 클레로노메소입니다.
눅 18: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18
어떤 관원 -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마 19:20)으로, 그리고 마가는 다만 '한 사람'(막 10:17)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사람을 '관원'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관원'으로 해석된 헬라어 '아르콘'은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정부 관리(authorities)일 수도 있고, 회당을 맡아보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산헤드린(Sanhedrin) 회원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의 배경을 '관원'이라는 말만으로 정확히 추정해 내기란 어려운 문제이다.
선한 선생님 -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선한'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오직 율법이며,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이 예수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지녔음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가 원하는 것을 예수께서 들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대문이다. 사실 이 관원이 '선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요 3:2)이며 '생명의 떡'(요 6:48)이자 '생명수'(요 7:38)이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이 질문은 어떤 율법사의 질문이기도 했다(10:25). 이 말은 영생을 얻는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데 혹시나 자신이 모르고 빠뜨리고 있는 어떤 행위가 있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긴 질문이다.
그런데 이 말속에는 그가 영생에 이르는 것이 다만 선행의 결과인 줄 착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아마 그는 정성을 다해 그 율법의 세부 규례들을 열심히 따랐으나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으며 이처럼 도덕적 행위나 율법을 철저히 행함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없었던 그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확실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으로 판단하고서 그 앞에 나아왔던 것이다. 여기서 '영생'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는 하나님의 생명 혹은 생명의 근원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 관원이 요구한 생명은 순간적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곧 죽음에 의해 차단이 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요 3:3-15에서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영생을 얻으리이까 -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느냐고 말한다. 클레로노메오 2816 동사이다. '상속하다, 상속자가 되다', '획득하다, 얻다, 소유하다'를 의미한다. 문법은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단수 1인칭이다. 미래 시제를 사용한 것은 현재 자신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항상 구원을 미래로 말한다. 구원은 과거로 이미 받았다. 선택받은 백성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고 확신을 얻었다는 것은 이미 과거이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구원을 미래로 죽어봐야 안다고 말한다. 부자 청년도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상태이다.
19절은 에이펜 데 아우토 호 이에수스 티 메 레게이스 아가돈 우데이스 아가도스 에이 메 헤이스 호 데오스입니다.
눅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 이 말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죄 있는 자로 여겼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반문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어찌하여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칭호를 사용하느냐는 약간의 비난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Plummer). 아무튼 이 말씀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선의 기준을 훨씬 높이심. 이 관원이 예수를 '선하다'라고 부르며 접근한 데에는 자신의 선행에 대한 자신감이 은연중에 표출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의 기준은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참된 선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셨다(대상 16:34;대하 5:13;시 106:1;118:1,29).
(2) 당신의 신성을 증거 하고자 하심. 이 관원이 예수를 신적 권능을 소유한 탁월한 랍비로 여긴 것에 대해 예수는 은근히 비난하는 투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는 탁월한 랍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0절은 타스 엔톨라스 오이다스 메 모이큐세스 메 포뉴세스 메 클렢세스 메 프슈도마르튀레세스 티마 톤 파테라 수 카이 텐 메테라 수입니다.
눅 18: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18:20
계명을 아나니 - '알다'의 뜻으로 번역된 동사 '오이다'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지키다', '따르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그것들을 지키라고 하는 권고가 된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조건으로 제일 먼저 율법 준수를 거론하셨는데 이는 율법 준수에 대해 내심으로 자신 만만해하는 이 관원의 허물을 벗기기 위해 정면으로 대응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율법의 완수자가 되지 못하며 다만 '율법으로 죄를 깨달을 수 있을'(롬 3:20: 갈 3:24)뿐이다.
이 사실은 마 5:17-48에 언급된, 율법 준수에 관한 새롭고도 차원 높은 예수의 교훈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관원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문자적이고 피상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 여기서 거론된 계명은 제5계명부터 제9계명까지 언급되었다(롬 13:9; 약 2:11). 십계명에 있어서 전반부 곧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 규정이라고 한다면 5 계명부터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문제 제기의 형식으로 여기 인용된 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즉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 관한 계명인 바, 예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주력할 뿐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는 무관심한 당시 종교인들의 냉혈성을 지적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것이다(요일 4:20). 사실 당시 대다수 종교 지도자들의 대신(對神) 관계 또한 거짓과 위선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아전 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21절은 호 데 에이펜 타우타 판타 에퓔락사멘 에크 네오테토스 무입니다.
눅 18: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18:21
어려서부터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바미츠바'(bar mitzvah)가 된 때부터 라고 해석하는데 '바미츠바'란 '율법의 아들'이란 뜻으로, 종교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유대 소년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아들들이 5, 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시키고 그것을 준수하게 한다. 따라서 이 말은 구체적으로 '소년 시절부터'를 가리킨다.
다 지키었나이다 - 지킬 수만 있다면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된다. 그러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데 인간의 어려움이 있다. 예수께서는 가장 쉽게 인간을 측정할 수 있는 계명을 몇 가지 인용하셨다.
그 관원은 자신의 행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며 회심 전의 바울처럼(빌 3:6) 율법을 다 지켰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다만 문자적으로만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관원은 자신의 율법 준수의 허점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러한 율법 준수로도 영생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허감을 느끼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22절은 아쿠사스 데 타우타 호 이에수스 에이펜 아우토 에티 헨 소이 레이페이 판타 호사 에케이스 폴레손 카이 디아도스 프토코이스카이 헥세이스 데사우론 엔 우라노 카이 듀로 아콜루데이 모이입니다.
눅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18:22
한 가지 부족한 것 - '헨 소이 레이페이'의 문자적인 뜻은 '네게 한 가지 남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관원의 생각을 그의 재산 문제로 돌리게 함으로써, 이제 열 번째 계명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바울은 골 3:5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관원의 경우 마지막 계명 하나를 어김으로써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들을 어긴 결과가 된 것이다.
네게 있는 것을...나눠 주라 - 자신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는 명령은 그 관원의 자만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에 있어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다. 그는 기껏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마치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인 양 자부했는지 모르나, 예수는 이웃을 위한 전폭적이고도 적극적인 헌신을 명하셨다.
특히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했던 관계로 이 말씀은 너무도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인간이 마음속에 있는 재물에 대한 위로 심을 다 버릴 때에만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또한 본문의 이 명령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14:33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관원의 경우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데 이는 모든 성도들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절대적 원리라기보다는 예수께서 그 관원으로 하여금 그의 탐심을 완전히 없애도록 하려는 특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Liefeld). 결국 이 말씀은 단순한 청빈(淸貧)의 명령이 아니라, 적극적인 이웃 사랑에 대한 요구였다(12:33).
나를 좇으라 - 영생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관원이 자기의 모든 재물을 풀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다고 할지라도 그가 진실하게 예수를 좇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부족한 것이 된다. 예수를 좇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어 그 가르침을 준수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명령법을 사용하여 자신을 따를 것을 종용하고 있다. 우리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재물을 따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23절은 호 데 아쿠사스 타우타 페릴뤼포스 에게네토 엔 가르 플루시오스 스포드라입니다.
눅 18: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18:23
심히 근심하더라 - 이 관원의 심각한 갈등을 통해 우리는 '두 마음을 품은 자'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안락한 삶을 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을 명하신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진정한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누구나 거쳐야 할 단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관원의 교만하고 안일한 내면세계를 꿰뚫어 보신 예수의 영적 통찰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관원이 진정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 됨을 깨닫고 예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간구했다면, 이렇듯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도전을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관원의 마음속에 일어난 걷잡을 수 없는 갈등과 고민은 그의 마음이 영생에 대한 욕망과 세속적인 탐욕으로 나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현재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였는가? 영생인가? 재물인가? 하나님은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기를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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