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히.헬라어 주석 강해

[마태복음 15장 헬라어 강해] 가나안 여인의 딸 치유 사건(마 15:21-28)

르호봇 2021. 6. 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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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5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가나안 여인의 딸 치유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나옵니다.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으니 치료해 달라는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때 가나안 여인은 주여 말씀이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시고 가나안 여인의 딸이 그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가나안 여인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서 치료의 기적을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 치유 사건(마 15:21-28)

 

21절 엑셀돈 에케이덴 호 이에수스 아네코레센 에이스 타 메레 튀루 카이 시도노스

마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1

거기서 나가사 - 여기서 '거기'란 지금껏 영적 부정과 물질적 부정에 관해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였던 가버나움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욱 고조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긴장을 직감하시고 유대인의 거주지와 헤롯의 관할권에서 벗어난 안전한 처소로 피하셨다.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예수의 활발했던 갈릴리 전도 사역은(4:12-15:20) 이제 끝나고 은거(retirement) 및 베레아 사역이 이때부터 시작하여 20:34까지 계속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50-6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나가셨다. 한편 막 7:24에 나타나 있는 '두로 지경'이라는 말 때문에 예수께서 실제 그 지역 내에 들어가셨느냐(Chrysostom)이 아니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땅을 더럽게 생각하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경계선 지역에만 가셨느냐(Bengel)하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21절과 막 7:31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 지역으로 돌아가셨음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예수께서는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셨다.

22절 카이 이두 귀네 카나나이아 아포 톤 호리온 에케이논 엑셀두사 에크라우가센 아우토 레쿠사 엘레에손 메 퀴리에 휘에 다비드 헤 뒤가테르 무 카코스 다이모니제타이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15:22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명령형 '이두'(''는 뜻)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이어지는 사건의 독특함과 돌발적인 성격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 7:26에는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해서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 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그녀를 페니키아에 복속(服屬)되기 전의 고대 명인 가나안족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그녀의 옛 조상을(13:29;1:30, 32, 33)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옛 원수의 자손이 축복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메시아에게로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한편 2세기 말 콜레멘트(clement) 설교에 의하면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Justa)요, 그의 딸은'베레니케'(Berenice)였다고 전한다.

그 지경에서 나와서 - '나오다'라고 하는 의미의 헬라어 '엑셀두사'는 가나안 여인이 자기가 살던 이방 땅에서 나와서 주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집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녀가 고향을 잠시 등지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Lohmeyer, Bonnard).

주 다윗의 자손이여 - 여인이 ''란 말을 다윗의 자손이란 말과 결합시킨 것을 보면 이 여인은 ''를 보다 고차적 의미 즉 메시아적 칭호(27; 12:23)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소망(所望)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 말들이 다윗 왕의 약속된 후손으로서의 예수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전파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부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들로 경멸하던 육체적인 불구자들(9:27)과 이방인들이 오히려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고 순종(順從)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이 유대교의 개종자였다고 할 만한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가나안 여인은 고통당하는 딸과 자신을 동일시(identity)하여 애끊는 심정으로 예수의 '자비의 심정'에 호소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민족적 특권이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었다. 단지 예수의 자비한 성품(性品)에만 기대했던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에게 채아온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이처럼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한 것은 더더욱 놀라운 사건이다. 실로 참된 구원을 소망하는 자는 이러한 인위적 장벽을 넘는 용기와 열심이 요구된다.

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 - 여기서 '흉악히'에 해당히는 원어 '카코스'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이라는 뜻으로 딸의 치명적 병세를 나타내 준다. 그녀는 아마 주위로부터 질병과 귀신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들은 바 있었던 것 같다.

23절 호 데 우크 아페크리데 아우테 로곤 카이 프로셀돈테스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에로톤 아우톤 레곤테스 아폴뤼손 아우텐 호티 크라제이 오피스덴 헤몬

마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15:23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본문에서는 예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나 냉담의 감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침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본문의 경우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요구했을 때의 두 가지 경우이다(8:6). 본문의 경우에 예수의 침묵은 다음의 네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뒤 따르는 말씀(24)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불신과 이 이방 여인의 환영을 비교하시면서 생각에 잠기셨을 것이다.

(2) 이 여인'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신을 부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다만 예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阿諂)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참으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시고 싶었을 것이다. (3) 구속사의 전개는 분명히 유대인 중심이다. 즉 구약성경이 유대인에게 주어졌고(4:22-26) 예수께서도 유대인으로 나셨다. 그리고 천국 복음도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되었다(10:5-40).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굴레를 벗어나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시게 됨으로써 잠시 침묵이 필요하시게 된 것이다. (4) 이방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더욱 깊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한편 본문의 예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는데 (1)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는 우리의 복음과 열성을 시험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간구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 좌절(挫折)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2) 우리의 소망하는 바에 대한 주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잘못된 간구야 당연히 거부되는 것이지만 올바로 구한 간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보내소서 - 제자들의 이 말이 '그녀의 요구를 늘어 주지 말고 그냥 보내소서'라든가 아니면 '그녀의 요구를 빨리 들어주고 보내소서'(Meyer, Benoit)였든지 간에 이 말은 귀찮은 그 여자를 빨리 쫓아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었다. 따라서 침묵하는 예수 앞에 그들이 중재자로 나선 것은 그 여자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同情心%) 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24절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우크 아페스탈렌 에이 메 에이스 타 프로바타 타 아폴롤로타 오이쿠 이스라엘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15:24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 이 구절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6)고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의 선교 명령의 반복으로서 예수께서 맡으신 사명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 결코 유대인에게서만 영원히 국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는 요 4:22 말씀처럼 (1) 예수께서는 자신의 민족의 구원 문제를 일차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왜냐하면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의 전개는 하나님이 직접 작성하신 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도'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10)고 하였다. (2) 유대인은 예수를 배척했어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보여준다. (3) 예수께서는 당신이 주로 유대인 사역에 힘쓰시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할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는 바, 제자들은 예수의 뒤를 좇아 힘써 선교해야 할 것이다(10:16;1:8).

한편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표현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이라 표현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어서(34:6) 유래한 것으로 이스라엘이 그들의 참 목자 되신 예수를(10:11) 오히려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잃어버린 양'이 된 것이다.

25절 헤 데 엘두사 프로세큐네이 아우토 레구사 퀴리에 보에데이 모이

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5

와서 예수께 절하며 - 가나안 여자는 예수 자신의 무시(無視)와 냉대(冷待)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가까이 접근하여 무릎을 꿇고(2:2; 8:2) 예수께 경배하였다. 22절과 관련하여 언급된 두 가지 즉 그 여자의 경건한 자세와 쓰라린 고통은 본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마태는 '절하다'(프로세퀴네이)의 미완료형을 사용함으로써 그녀가 예수의 발 앞에서 계속 연이어 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를 도우소서 - '도우소서'의 헬라어 '보에데이'는 '부르짖음'의 뜻인 '보에''달리다'의 뜻인 '데오'에서 합성된 '보에데오'의 명령형으로 긴급한 구조를 요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침묵하시면 하실수록 예수의 침묵하시는 의도를 알지 못하는 가나안 여자는 더욱더간절하게 그의 도움을 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6절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우크 에스틴 칼론 라베인 톤 아르톤 톤 테크논 카이 발레인 토이스 퀴나리오이스

마 15: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5:26

자녀가 떡을 취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서'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그 우선권이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러한 배타적(排他的) 특권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하였다(1:9, 10). 그러나 복음 전파의 순서는 먼저 유대인에게였고 그다음은 이방인에게였으며(2:9, 10), 본격적 이방 전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한편 바울도 이스라엘 민족(民族)은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남보다 먼저 받은 종교적 특권이 있음을 인정하였고, 민족적 구원의 문제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임을 인정하였다(롬 3:1, 2;9:1,2).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성경에서 ''(퀴온)라고 하는 말은 모두 악한 것을 상징하고 그것을 야유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서(11:7; 7:5; 7:6; 3:2),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인 이방인이나 이단자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59:6). 그러나 예수께서 사용하신 ''라고 하는 말인 헬라어 '퀴나리온'은 경멸적 의미에서의 '들개'나 거리를 어슬렁 거리며 다니아 사납고 악한 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강아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부를 때 사용하던 경멸적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이방인들이 '자녀' 곧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27절 헤 데 에이펜 나이 퀴리에 카이 가르 타 퀴나리아 에스디에이 아포 톤 프시키온 톤 핍톤톤 아포 테스 트라페제스 톤 퀴리온 아우톤

마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7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 반의 접속사(but even) '마는...도'(카이 가르) 는 '그러나...조차도'의 의미로, 본문에서는 앞사람의 딸을 일단은 긍정하면서도 그 말에 완전히 승복(submission)하지 않고 또 다른 의견을 개진(改進)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유대인들에 비해 이방인인 자신들이 선택되지 못한 족속이요 권리를 갖지 못한 자, 즉 개들임을 인정했다. 이처럼 자신을 개로서 인정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가장 큰 겸손의 행위로 여겨졌다(삼상 24:14; 왕하 8 :13). 특히 사람들은 자신을 극도로 비하(卑下)시켜 표현할 경우 바로 '죽은 개' 또는 '개 같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삼하 9:8; 16:9).

제 주인의 상에서...먹나이다 - 팔레스틴 근방의 지역들에는 식사하는 주인 곁에서 부스러기를 얻어먹기 위해 개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특별히 그 지역들에서의 식사법을 보면 주로 손으로 찢어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 부스러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가나안 여인은 사실상 자신이 개의 취급을 받는 이방인으로서 메시아가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 참예(參預)수는 없다고 하여도 최소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일부를 힘입을 수는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tasker, Schlatter).

실로 그녀는 자신에게 적용된 비유를 놓치지 않고 유효 적절히 선용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내용을 의역해 보면 "주님 당신이 저를 개로 취급한 것은 결국 저의 요구를 당신께서 들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정녕 당신은 당신의 법을 어기지 않고도 충분히 저의 요구를 채울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정당한 일에 따를 뿐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는 아무런 권리 주장도 못할 뿐 아니라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다만 가장 비천한 피조물의 몫으로 할애(割愛)것만을 위하겠습니다. 진정 당신은 그것이 없다 해도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Pulit Commentary)로 풀어볼 수 있다. 그녀는 하나의 은혜가 비록 적으나마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임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독점된 하나님이 아니라 만민의, 열방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었다(3:29).

28절 토테 아포크리데이스 호 이에수스 에이펜 아우테 오 귀나이 메갈레 수 헤 피스티스 게ㅔ네데토 소이 호스 델레이스 카이 이아데 헤 뒤가테르 아우테스 아포 테스 호라스 에케이네스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15:28

여자야 - 헬라어 성경에는 '여자야'라는 말 앞에 감탄사 ''가 붙어있다. 이는 눅 22:57; 2:4; 4:21과 같이 ''없이 단순히 호격으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호격과 함께는 드물게 사용되는 ''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의 놀람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네 믿음이 크도다 - 여기서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trust), 확신(confidence)아울러 겸손(modesty)과 인내(patience)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칭찬을 받은 두 번째 이방인이다(8:10). 이방인 백 부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몇 가지 공통되는 요소가 있는데 (1)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백 부장의 하인, 가나안 여자의 딸) 예수의 병 고침의 능력이 베풀어졌다고 하는 점 (2) 두 경우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 예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점인데 앞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백 부장의 믿음만 한 것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강조가 되어 있다.

(3) 두 경우 모두 예수의 병 치료는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보지 않은 채 멀리서 말씀으로 고치신 '원거리 치료'였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방인 백 부장과가나안 여자의 기사는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배척했으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적 개념이 신약적 개념으로 옮기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에 국한되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광의적이며 영적인 선민론(選民論)을 암시하고 있다(7:6).

네 소원대로 되리라 - 여자의 첫 번째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두 번째 말에는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으며, 마침내 세 번째 말에 이르러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처럼 끈질긴 간청에 못 이기어 그녀의 소원(所願)을 마지못해 이루어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녀의 큰 믿음을 알고 계셨었다. 그러나 (1)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조차도 부정한 메시아를 참 메시아로 올바르게 인식한 그녀 자신의 내면의 지혜와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냄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2) 유대인들이 거부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이방인들도 그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외면하셨던 것이다.

따라'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그녀를 위해서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한편 여기'소원대로'(호스 델레이스)란 직역하면 '원하는 만큼'으로 각종 난관(難關)을 인내로 극복한 그 여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유월절에 사용하는 우슬초 비밀(출 1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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