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마태복음 부활절 주일 설교말씀] 부활의 삶(마 28:1-10)

르호봇 2022. 4. 1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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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활절을 맞이해서 주님과 함께 부활에 소망을 가지고 동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주간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으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무덤에 들어가셔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에 소망을 가지고 부활절 예배에 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삶(마 28:1-10)

 

부활이라는 말이 우리에겐 생소한 말이 아닌 줄로 압니다. 요즘의 신세대는  부화장이란 말을 잘 들어 보지 못했을 줄 압니다만, 예전엔 웬만한 동네엔  부화장이 하나씩 있어서 병아리나 오리를 부화시켰던 것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알'이라고 하는 것이 생명이 없어 보이고 모양과 형체도 없는 것 같지만 예쁜 병아리가 되어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부활이라는 것이  잠을 자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여인들도  주님께서 그토록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주님께서 죽은 지 사흘 되던 새벽에 몰약과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새벽에 무덤을 향해 가지고 오고 있는 물품들은 결코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사랑했던 주님의 죽음을 위해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잊었는지 아니면 믿을 수 없었는지 말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은 비록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왔던 여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의 생업을 좇아 예루살렘을 떠나기도 하였고, 절망 가운데 골방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보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돼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6~38)하여 어떻게 부활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지를 자연의 원리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의 영광과 기쁨을 맛보게 되기까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기억되었던 고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죽음의  사건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 가운데서도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고난주간을 충실히 보냈다면, 오늘 부활주일을 맞는 기쁨이 더욱 충만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고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죽지 않은 곳에 어찌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장차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이 땅에서 죽어지는, 또한 더 나아가 죽어진 삶을 살아야 됨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부활의 삶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활의 삶은 한 마디로 능력 있는 삶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니 그 힘을 무엇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부활의 능력과 힘은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그 새벽에 우리의 육신이 실감할 수 있도록 보이고 있습니다.

메마른 땅에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요동했습니다. 돌이 강력한 힘에 의해 굴러갔습니다. 무덤을 굳게 지키고 있던 16명의 서슬 퍼런 군사들이 사색이 되어 떨며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던 그 새벽에 나타났던 현상들이었습니다만, 이러한 사실은 죽음의 고요함과 견주어 너무도 힘이 있고 능력 있는 부활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모습은 장차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주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이 바라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능력의 순간이겠지만, 이 땅에서 부활의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성도들에게 지금 현재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 부활의 권세 있는 삶에 대하여 오늘 다섯 가지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기쁘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을 잃고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탄식을 간직한 채 세 여인은 무덤을 이른 새벽 미명에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어두움의 두려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벽을 깨우게 된 것입니다.

슬픔을 다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긴 밤이어서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무덤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이지만 그들은 그 몸에 향유라도 발라야 그들의 슬픔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기쁨이 넘치도록 만들었을까요!

부활의 능력과 권세를  체험한 그들 마음속에  도대체 무슨 어두움이 남았겠으며, 슬픔이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기쁨과 축제와  같은 분위기에서 드려져야 되는 이유가 있다면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 날 후에 다시 병원에 들려서  진단을 다시 받고 난 후 의사가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병은 완치되었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죽음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봅시다.

그 사람의 기쁨을 무엇이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그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가 물질이건 명예 건간에 말입니다. 생명을 건졌는데 말이지요. 우리는 이와 같은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쁨을  가질 때 부활의 삶을  누리는 생활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감사하는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선물 가운데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선생님을 잃고 슬픔에  젖었던 이 여인들의 감사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은 죽음을 이긴 선물이 될 것입니다.

이 부활절에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큰 선물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믿는 우리들도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므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인성의 한 가정에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홀로 된 여인이 외아들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의 절망과 슬픔을 무엇으로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마침 그 성을 지나던 예수께서 장례행렬을 멈추게 하고 관을 열어놓고 "청년아 일어나라!" 외치게 되었을 때 그 청년은 벌떡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이 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여인에게 이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의 오라비인 나사로를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일찍 부모님을 잃고 그들은 부모님처럼 오빠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 오빠가 뜻밖에도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그들의 슬픔이 어찌나 컸던지  예수께서도 우셨고 그들을 지켜보았던많은 군중의 유대인들이 울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도 더 되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돌문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시면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부르게 되었을 때 그 나사로는 걸어서 나오게 된 것인데, 마르다와 마리아의 감사가 얼마나 넘쳐 났겠냔 말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 부활입니다.

이 부활절에 이러한 부활의 사실을 주님 안에서 확신하게 된다면 우리의 감사는 과연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의 능력으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잃어버린 감사가 있다면 부활의 감격 속에서 다시금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합시다.

셋째는 소망이 넘치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어찌 소망이 안 생기겠습니까? 미카엘 퍼러데이라는 과학자가 유럽 대륙을 여행하다가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앞에는 예쁘게 단장된 공동묘지가 보였습니다.

미카엘이 묘지 하나하나를 살펴보다가 어느 초라한 묘지에 눈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지는 어느 가난한 사람의 것인 듯 묘비가 청동판도 아니었고, 돌판도 아니었습니다. 나무판에 종이로 써서 묘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종이가 비에 젖지 않게 하려고 처마를 만들어서 말입니다.

그 처마에 종이는 비를 맞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처마 밑에 생긴 피난처에 쐐기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미카엘이 바라보고 있는 순간 쐐기는 나비가  되어서 막 날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과학자  미카엘 퍼러데이는 부활의 감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저 보잘것없는 곤충도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도 변화시켜 주시고 부활할 수 있게 해 주시겠지' 하는 소망으로 그는 전율학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소망 가운데 살아가도록 합시다.

넷째는 위로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슬픔에 잠긴 이 여인들과 절망 가운데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를 배반하여 떠나버린 제자들이었지만 사랑하셔서 그들을 다시금 찾아 가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자체는 인류의 영원한 위로였고 섬김이었습니다. 부활의 감격은 진실로 이웃사랑에 눈을 뜨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번 한 번 살려 주시면  잘하겠습니다."라는 간절한 고백이 있을 때가 있을 것인데,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아났음을 확신한다면 그 남은 삶을 이제 선하게 살고자 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마다 이렇게 이제는 이웃을 위해 살고자 힘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자신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에 예쁜 도자기 두 개가 정성껏 유리상자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손님이 "이 도자기를 대단히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는군요." 하면서 팔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팔  수 없다 하면서 그 도자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어느 거름더미를  쌓아놓는 자리를 지날 때  누가 내다 버렸는지 흙무더기가 거름더미 옆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흙을 주어다가 도자기를 굽게 되었는데 지금 보는 이 도자기라는 것이지요. 어느 날 그는 그  도자기를 보며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자기 자신도 지난날의 삶 중에 거름더미에 버려진 흙과 같이  방탕하고 초라한 삶이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 안에서 예쁜  도자기와 같이 변해져 있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니 많은 사람이 그 도자기를 팔 것을 부탁했지만 결코 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웃에게 귀중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를 원했고, 위로해 주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에 힘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주시고 새롭게 하신  주님께 대한 보답이 이처럼 나타나야 되지 않을까요?

다섯째는 이기는 삶이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사실 죽음을 이기는 것처럼 강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 능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을 이기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죽음을 이겼습니다.  가장 큰 것을 이겼으니 이제 내 생활 속에 있는 사소한 것들을 이기는 삶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진이 나서 땅을 가르고 돌을  굴려 냈듯이 우리는 어떠한 장애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이기며 나아갑시다.

강한 로마 군인들이라 할지라도 무서워  떨며 사색이 되어 죽은 자처럼 되었듯이 우리를 괴롭히는 칼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갖가지 시험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기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합시다. 진정 부활의 삶은 이기는 삶입니다. 죽음이라도 다스리고 정복하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이 이기는 삶이 부활의 삶과 함께 주어져야 되겠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날이 부활절이기에 우리에게 지금도 무엇이든지 이기게 하시고, 또한 이기는 자를 기뻐하시며, 이기는 자가 영원한 나라에서도 죽음을 이기고 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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