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요한계시록 3장 강해설교문] 빌라델비아 교회의 열린문(계 3:7-13)

르호봇 2021. 1. 19.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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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3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열린 문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께 칭찬을 들은 교회입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던 교회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은 없지만 믿음을 지키면서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권력과 권세를 없지만 주님의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종말이 다가올수록 믿음을 버려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지고 시험에 걸려 넘어질 일이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열린 문(계 3:7-13)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계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인간의 모든 삶은 문의 안과 밖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립문에서 거대한 철대문에 이르기까지 그 문을 드나들며 역사는 쌓여갑니다. 서울의 숭례문 즉 광화문은 이성계의 권세를 보여 주고, 북경의 천안문은 청나라 시조인 누루하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문은 닫혀 있으면 답답하고 열린 문은 시원해 보입니다. 서울을 지나다니면서 꽉 잠겨 있는 광화문을 볼 때마다, 파란만장했고 결국에는 열강에 짓밟히다가 일본에 망한 조선의 몰락을 보는 것 같은 답답함이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정문도 잠겨 있다고 합니다. 황금의 문으로 불리는 이 큰 문은 아예 벽돌로 막혀있고, 또 회교도들의 무덤에 둘러싸여 길조차 끊겨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날, 그 문이 열릴 것이라는 전설이 없지 않지만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이라서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책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3:7)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가 {천국 열쇠}(마 16:17)를 손에 가지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한계시록 1:18에서는 그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으로 군림하십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의 오른쪽 문인 [희년의 문]50년에 한 번씩 열리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그 열쇠로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문들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십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열린 문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람들의 구원이며, 희망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성도들 앞에 열린 문의 축복을 내리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닫힌 문이 아닌 열린 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복음은 열린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시아에 있는 이 여섯 번째 교회가 가진 열린 문의 비밀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믿음의 열린 문

 

먼저 빌라델비아 교회의 열린 문은 믿음의 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요한계시록 3:8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가진 믿음에 대한 칭찬의 말씀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이방 종교의 신당과 우상이 많아 {작은 아덴}이라고 불릴 만큼 우상숭배가 무성한 곳입니다. [사단의 회](3:9)로 일컬을 정도로 복음에 적대적인 유대인 사회가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누구의 손으로 세워졌는지도 모릅니다. 그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어린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열린 문이 있어 주님의 말씀을 지켰고 그 이름을 배반 치도 않았습니다. 마침내 악명 높은 사단의 회까지 이겼습니다. 실제로 주후 155년과 156년 사이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11명의 순교자들을 내었습니다. 역사의 격동기에 그 도시는 비잔틴과 십자군에 이어 야만인과 터키군에게 여러 차례 포위되기도 했으나, 믿음을 가진 성읍의 용사들은 14세기 말까지 독립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빌라델비아 교회는 믿음의 열린 문을 후대까지 잘 이어가게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데살로니가 서신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살후 3:2)하였습니다. 감람산의 그리스도도 말씀하시기를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24:40-41)고 하셨습니. 그래서 베드로는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벧전 1:7)을 자랑합니다. 금은 돌처럼 흔하지 않습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과 바나바가 수리아의 안디옥교회에서 보고 대회를 갖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때에 두 사도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했다"(14:27)고 했습니다. 예나 이제나 하나님이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문이 열릴 때 "헬라인이나 유대인도 야인이나 스구디아인도"(골 3:11) 구원을 얻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한동안 예루살렘의 성루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는 말씀을 듣고 그는 기뻐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은 어두운 세상 안에서도 살게 하는 힘입니다. 부조리한 역사 속에서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러시아인의 농부도 살 수 있으나, 그것이 없으면 아메리카의 부호라도 죽습니다. 톨스토이 시대에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은 믿음 때문에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의 여러 책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한번(마 9:22) 마가복음에서 두 번(막 5:34,10:52) 누가복음에서는 네 번(7:50,8:48,17:19,18:42)이나 거듭하심으로 공관복음서에 모두 일곱 번 기록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린 믿음의 문이 우리 모두를 구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을 이깁니다.(16:33)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풍랑을 잔잔케합니다.(마8:26)

마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산을 옮깁니다.(마17:20)

마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리고 성령을 받습니다.(요20:22)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영혼 구원의 믿음을 가진 자(10:39)를 큰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믿음의 열린 문이 있는 자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길에 나설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믿음의 열린 문을 기뻐하십시오. 오직 그 문으로만 달려가십시오. 그때에 성도들은 적은 능력으로도 세상을 이기며 마침내 생명의 기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축복의 열린 문

 

다음으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열린 문은 축복의 문입니다. 밧모섬의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의 본문에서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 하리니'(3:10)[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고 말씀하셨습니다. 면류관이야말로 모든 축복의 결정판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주셨습니다. 의인 욥에게는 갑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는 홍해를 갈라서 길을 내셨습니다. 쓴 물을 달게 하시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터지게 하셨습니다. 새벽마다 만나를 내리시고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다가 먹이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서늘케 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아말렉은 이기게 하시고 여리고성은 무너지게 하셨습니다.(136:13-25)

 

하나님은 언제나 풍성한 축복으로 채워 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바다도 열고,

반석도 열며,

새벽도 열고,

하늘도 열며,

흐르는 강물도 나누고

성읍의 꽉 잠겨졌던 문들도 활짝 열어젖히셔서 축복하십니다. 저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을 발라서 먹이십니다.(3:8)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목장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시설은 V자 형의 물통 구유입니. 이것을 영어로는 프랫홈 트러프(Platform trough)라고 하는데, 그것은 목장의 소가 발판에만 올라서면 그 무게로 물줄기의 마개가 열리게 되어 시원한 물이 콸콸 구유에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든지 물을 마시고 싶으면 그 발판을 밟아야 합니다. 통로 밖에서 마른 구유만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됩니다. 열린 프랫홈을 믿고 서기 만하면 물을 얼마든지 흘러서 고이고, 그것을 마음껏 마실수 있습니다.

 

열린 축복의 문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성도들은 저 슬기로운 목장의 소들처럼 이 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문턱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와서 가나안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이끄는 출애굽 제2세대들은 축복의 열린 문으로 나아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11:23) 러므로 성도들은 모두 축복의 열린 문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6.25 전쟁 직후 한국에 와서 여러 차례 전도집회를 가졌던 밥 피얼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한 도시 사람이 농촌에 이사를 와서 젖소 한 마리를 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사람이 산 소는 젖이 말라 우유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낙심하여 이웃에 사는 농부에게 찾아가서 의논을 했습니다. 그때 농부는 도시 사람에게 젖소를 어떻게 관리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자기에게 그 날 필요한 만큼의 젖을 짰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날은 별로 필요가 없어서 아예 짜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농부[당신의 게으른 젖소 관리가 바로 우유가 마르게 된 원인입니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젖은 짤 수 있는 데까지 다 짜내어야 더 많은 젖샘이 열린다는 것을 도시 사람은 몰랐던 것입니다.

 

축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치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의 형편에만 맞추거나 불성실하게 섬기는 자는 실패합니다. 자신의 것 전부를 다 드려서 기쁘게 봉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넉넉한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를 버리고(창 12:1) 독자를 바쳤을 때(창 22:10) 믿음의 조상이 되고,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축복의 열린 문을 바라보십시오. 어디서든지 굳건한 헌신을 보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의 꼴을 먹여주실 것입니다.

 

3. 전도의 열린 문

 

끝으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열린 문은 전도의 문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들 위에 기록하리라](3:12) 이 본문은 그 교회가 지닌 이상적인 전도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소아시아의 땅은 6백 년 전 14세기 말부터 터키의 영토가 되어 회교군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빌라델비아에는 적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습니.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가 쓰러진 후 오늘날 모슬렘의 세계가 자리를 잡기까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전도의 그루터기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전도의 문이 열리면 그 열매는 아름답고 그 추수는 향기롭습니다. 창세기의 낙원인 에덴동산의 정문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은 하늘의 파수꾼인 '그룹 천사들'과 자동화된 천국 무기인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그 낙원의 문을 굳게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그 인봉한 것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 나라의 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빗장을 채우시면 그는 저 미련한 다섯 처녀들과 같이 내어 쫓기고 맙니다.(25:12) 예수님도 그의 산상설교의 끝부분에서 두 개의 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전도의 문은 물론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이 문이 열려 있는 동안에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2차 전도 여행에 나선 바울은 아시아 전도를 위해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아시아 전도의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가는 문이 열려 복음이 서쪽 세계(유럽)로 건너가게 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셔야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은 대사도라도 문이 닫혔을 때는 꼼짝 할 수 없었습니다.

 

믿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 문이 모두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25에 보면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보석 문들은 항상 열려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거기는 24시간 닫히는 때가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8에서 자기가 에베소에 머무는 이유를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문은 그때 사도에게 열린 전도의 큰 문이었습니다. 에베소의 바울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전도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요나와 같이 편협하고 불성실한 전도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큰 성읍 니느웨 사람들이 재에 앉아 회개케 하는 큰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욘 3:8). 이 도망꾼 선지자에게도 전도의 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계상 필리핀은 국민의 87%가 가톨릭교인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 교회를 찾는 인구는 7% 밖에 안됩니다. 이 미지근한 신앙 때문에 토착 종파인 이글레시아 교회 간판을 치고 남쪽 민다나오섬에는 회교도들이 왕 노릇을 합니다. 아무리 기름진 농원이라도 부지런히 곡식을 심지 않으면 농장은 잡초밭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 여러분은 전도의 열린 문으로 들어오십시오.

 

이 백성의 마음 밭에 미신과 우상숭배의 엉겅퀴가 솟아나기 전에 세속적인 탐욕이 가시나무의 덩굴을 만들기 전에 부지런히 전도해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성전 기둥과 같은 일꾼들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 기록된 전도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어서 전도의 열린 문으로 나아가십시오. 마침내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얼굴들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풀르다크 영웅전에 보면 애굽의 신 이시스는 나일강변에서 [서쪽 나라의 비밀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이런 기도하고 애원하는 신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굳게 닫아 버리시면, 세상의 어떤 존재도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쇠빗장이 걸린 문에는 새 아침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가까운 이웃인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그리스도"(계 3:20) 즉, 닫힌 문을 보여 줄 뿐입니다. 그런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서는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3:8)고 하셨습니다. 거기에서는 활기에 찬 열린 문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어느 문명에서든지 문은 건축미의 극치를 나타냅니다. 유럽의 숫한 고딕식 예배당이나 중동의 모든 이슬람 사원의 문들은 참으로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문이 없는 건물은 쓸모가 없고, 볼품이 없습니다. 우리도 모두 열린 문을 가진 인생이라야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관아, 또는 향교 및 서원에는 뜰을 향해 세 문들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서 있어서 그 건축양식에 따라 평삼문, 솟을 대문, 삼문, 누 삼문 등으로 불립니다. 그러므로 큰 집의 정문은 하나가 아니고, 꼭 셋인 셉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열린 문도 삼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이요,

축복의 문이요,

전도의 문입니다.

믿음의 문은 영혼의 구원을 보여 줍니다.

축복의 문은 생활의 구원을 안겨 줍니다.

그리고 전도의 문은 교회의 부흥과 민족의 구원을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열린 문은 이 땅에서 가장 보배로운 은총의 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 솔로몬 성전에서 1년 1차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성소의 문은 '금 돌쩌귀의 문'(왕상 7:50)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금 돌쩌귀의 열린 문을 보게 하신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믿음의 열린 문으로 나아가십시오.

축복의 문으로 달려가십시오.

부디 전도의 열린 문으로 힘써 나아가십시오.

모두 열린 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문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마다 저 빌라델비아 교회의 면류관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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