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구약성경 말씀

[말라기 1장 주일설교말씀] 우리가 어떻게 하였나이까?(말 1:6-14)

르호봇 2021. 4. 2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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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말라기 1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였나이까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말라기서는 타락한 제사장들을 향하여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려야 할 제사장들이 타락하여 제물을 함부로 드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눈먼 희생제물을 드리면서도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하니 백성들도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타락하면 성도들도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니 예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복음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타락된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잠을 자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시간 목사들이 깨어나서 교회가 올바른 길로 가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였나이까?(말 1:6-14)

 

말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 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말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말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말 1: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말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1:14 짐승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는 12 소선지서 중 제일 마지막 예언자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권력에 노예가 되어 조국을 잃어버리고 이국땅 바벨론에서 70년 동안이나 나라 없는 설움으로 고생하며 지내다가 드디어 바사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그리고 그리던 고향 땅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은 동안 이스라엘은 옛날 다윗과 솔로몬이 누렸던 영화와 존귀는 다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민족적 자존심으로 자랑해왔던 선민사상은 모두가 잊어버리고 말게 되었다.

 

잃어버렸던 고향 땅으로 돌아와 보니 사람들은 황량한 사막에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돌처럼 되어 있었고 기쁨도 희망도 없이 그럭저럭 연명해 가는 비참함만이 온 땅을 뒤덮고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신앙의 나라라고 자부해 왔던 그 명성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나라 안의 일반적인 영적 상태는 저조기에 놓이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고통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도 예배와 제사를 잊지 않았던 그 열성적인 신심도 형식적인 겉치레로 퇴색해 버렸고 하나님에 대한 환희와 열심도 다 증발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유대인 남자들이 비유대계 여인들과 결혼을 함으로 이방 제의를 받아들여 종교적인 혼합주의를 조장시키는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게 되었고 동족끼리의 이혼이 성행하는 등 도덕적인 문제로 사회생활의 순결성과 완전성을 해치고 있었던 분위기였다. 이러한 때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냄 받은 예언자로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항의와 반박을 가하는 고난 받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말라기서에서는 유별나게 질문과 응답, 항의와 반박 등 논쟁적인 문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앓고 있는 가장 큰 이스라엘의 병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성의 , 무관심, 무감각 증세이다. 말라기는 말라기서의 서두를 사랑으로 시작하다가 돌연히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가혹하고 두려운 심판을 불러오게 했던 것인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칼날 같은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자.

 

6절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아!"라는 십계명 중에 제3계명의 준엄한 명령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거나 쓸데없이 인용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 충성과 공이 없이 즉 진정한 마음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는 껍데기만의 신앙 형식을 취하는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망령되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들이라면 아비를 향한 공경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고 일군이라면 주인을 향해서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마땅한 일이며 바로 이러한 것이 온전한 관계를 결속시키고 돈독히 하는 길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불경과 불충성 때문에 왜곡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불행과 파멸로 빠져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욕하거나 그분의 위엄에 손상이 가게 한 행위를 하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어떤 외식적인 형식을 가지고 드리는 냄새나는 경건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 있게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는 항의를 볼멘 목소리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퍼붓는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표준 새번역-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온전히 다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할 만큼은 기꺼이 했습니다"라는 목이 곧은 대답이다. 그러나 이런 형식적인 경건으로 두른 알맹이 없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설득하지는 못한다.

 

오늘 봉독한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서운하게 여기시는 몇 가지의 내용들을 열거해 주시고 있다. "더러운 떡" "눈먼 희생" "저는 것" "든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불결하다거나 하찮다거나 그리고 값싼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게 중심이 실리지 않은 무성의하고 무관심하고 무감각으로 하나님 앞에 던져 버린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가진 자들의 정성과 땀이 깃들이지 않은 빛나는 보화보다도 더 좋은 것으로 드리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부끄러워하는 과부의 동전 한 닢을 더욱 귀히 여기셨다.

 

감사함이 증발한 의무와 당위로 어쩔 수 없이 경건을 가장하여 하나님의 속을 채워보려고 하는 잘못된 심성이 바로 이스라엘의 병이며 오늘날 세속적 그리스도인들이 앓고 있는 중증인 것이다. 성서에서 늘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들이 바리새인들이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꾸중과 핀잔을 듣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정성과 인애와 자비의 무게 중심이 실리지 않은 형식적인 경건만을 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특별히 바리새인들을 위해서 할애된 말씀인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였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하는 모든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하시면서 호되게 질책하셨다.바리새인들이 제사를 화려하게 드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순결한 제물을 제단 앞에 헌물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도와 예배를 허술하게 드려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헌신과 중심과 감격이 없는 즉 자신의 무게 중심이 떠나버린 경건을 위장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소유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언제나 원하시고 계신다. 값나가는 수양의 제물보다도 수북한 돈더미보다도 자신을 진정한 제물로 삼아 하나님 제단에 진정으로 드리는 산제사를 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1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슬픈 탄식의 사연을 듣게 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게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문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인간들의 거짓과 가증된 것들과 경건함이 증발해 버린 역겨운 무관심의 제사를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기구한 사연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하여 있으면서도 일상의 흐트러진 중심을 바로 가누지도 못하고 아무렇게나 의무만을 다해보려는 무성의 즉 성도의 신령과 진정으로 언제나 하나님을 관심하지 못하는 모습은 어떠한 향기 나는 제사와 제물을 드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른땅에 날리는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창세기에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둘 다 똑같이 추수할 때가 다가오면 각기 양육하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 바쳤지만 아벨의 것은 제단 불위에 흠향되었지만 가인의 것은 그렇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것은 열납 하시고 누구의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시냐고 가인은 불평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누가 무엇을 얼마나 드렸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떤 무게 중심으로 드려느냐를 비중 있게 달아보신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나니"(히11:4) 우리가 드릴 가장 중요한 제사는 관심과 감격과 진정으로 뭉쳐진 사랑의 제사이다. 사랑의 열정이 날아가 버린 의무와 당위적인 신앙은 결코 하나님의 마음에 슬픈 탄식의 그림자를 겹겹이 쌓아 놓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바라시는 것인지를 찾아내어서 가장 진정한 것으로 주님께 헌신하며 신앙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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