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다니엘 10장 설교말씀 다니엘의 노인이 본 환상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젊었을 때 끌려와서 늙을 때까지 타지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했으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70년이 되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아직도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성경을 보면서 예레미야에게 예언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대략 지금 시기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영광을 돌릴 날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새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타지와 같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곳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다니엘 노인이 본 환상(다니엘 10:1-21)
본 장은 우리들에게 주는 매우 깊고 귀한 교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기도 생활에 대한 교훈들은 커다란 적용력을 지닌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다니엘서를 구분한 장(章)들은 매 장마다 하나의 독립된 단위였습니다. 그러나 10장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0장의 목적은 하나의 환상의 배경을 소개하는 것이고 그 환상의 내용은 11 장과 12장에 전개됩니다. 따라서 10장은 다니엘서의 마지막 환상이 주어진 상황에 대한 것이고 그 환상의 정확한 내용은 다음 두 장을 더 읽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환상이 보인 시기와 장소
처음 네 절에는 환상이 나타난 때와 장소가 적혀 있습니다. 때는 고레스 왕 3년이었습니다(1절). 이 바사(페르시아)의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과 성전 재건을 위해 귀환 칙령을 내린 지 2년 이상이 지난 때입니다. 스룹바벨과 다른 소규모 집단의 유대인들은 이미 출발하여 팔레스틴에 안착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들과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도 바사에서 할 일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가 86, 7세에 이르렀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이나 힘든 건축 사업에 참여하기는 무리였을 것입니다.
늙은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온 동포들의 귀환을 위해 기도했지만, 자기 자신은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이 다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연로한 다니엘에게 또 하나의 계시를 주실 것이었습니다. 기력이 쇠한 이 하나님의 종은 종전의 환상들에서는 본 일이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뵙고 또한 미래에 대한 더 깊은 통찰도 갖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보일 계시는 그 뜻이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고령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특별한 종교적 의례를 치르지 못할 만큼 늙지는 않았습니다(2-3절). 그는 3주간을 슬퍼하며 주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는 고기도 먹지 않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동에서 방향제나 기분 전환으로 널리 사용했던 기름도 바르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진지하고 참된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는 겸비한 마음으로 슬퍼하며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째서 이 연로한 선지자가 3주간씩 슬픔에 잠겨 금식과 기도에 전념해야 했을까요?
본문에는 다니엘이 금식 기도를 하게 된 이유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려진 구약 역사를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석방되어 귀향 허락을 받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고레스 왕의 조서에 의해 응답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수의 유대인들이 이미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미 고국으로 귀환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극히 소수만이 하나님이 제공하신 귀향의 기회를 붙잡았을 뿐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 점을 가슴 아파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예루살렘은 70년 이상이나 다니엘의 생각에서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예루살렘 도성이 있는 쪽으로 창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잊을 수가 없었건만 다른 유대인 동포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그런 사랑과 애착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 온 땅에 그냥 눌러사는 것을 더 좋게 여겼고 고국으로 귀향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의 귀향 조서가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혹시 귀향의 문이 곧 닫혀버릴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설사가상으로 고국으로 돌아간 소수의 동포들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재건하는 도중에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성전의 기초 공사는 제대로 끝났지만, 그 이상의 건축은 모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바사(페르시아) 궁에다 진정서를 넣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귀향한 유대인들은 큰 실의에 빠졌습니다.
유대인의 귀향을 위해 힘썼던 다니엘의 기도는 결과적으로 유명무실(有名無實)해진 셈이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간 자들은 헛걸음을 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예루살렘의 상황은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니엘은 주 앞에 엎드려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로 다니엘에게 마지막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다니엘은 4절에서 환상을 받은 시기를 명기하였습니다. 때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끝난 후 3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고국으로 귀향한 자들은 이 절기를 약속의 땅에서 삼 대만에 지켰습니다. 한편 노쇠한 다니엘은 이때 힛데겔(티그리스)강변에서 마지막 환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보고, 듣고, 보인 반응
5절에서 9절까지가 다니엘이 보고 들을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다니엘이 보인 반응도 실려 있습니다.
다니엘은 티그리스 강변에서 눈을 들어 모시옷을 입은 분을 보았습니다. 성경의 이 같은 표현은 하늘의 방문객을 가리킵니다. 이 방문자의 허리에는 순금 띠가 둘러져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눈부시게 빛나고 장엄하였습니다.
6절에 계속되는 이 하늘 방문객에 대한 서술은 요한계시록 1:13-17절의 묘사와 비교됩니다.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은 이 말씀을 기록할 때에 밧모 섬에 귀향 중이었습니다. 요한은 이곳에서 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적 환상을 기록하였습니다. 요한이 본 환상과 다니엘이 본 환상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슬퍼하던 다니엘이 티그리스 강변에서 본 하늘의 방문자는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몸에서 인간의 몸을 덧입고 성육하시기 훨씬 이전에 구약에서 여러 번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환상을 ‘현현(顯現)’이라고 부릅니다. 본 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현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다시 한번 성육신 이전의 영광스러운 주님을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7절에서 묘사되었듯이 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환상은 다니엘 혼자서만 보았습니다. 이 환상은 영적으로 각성된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단10: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나이 많고 신실한 성도인 다니엘은 이제 성삼 위의 제2위 되신 분과 홀로 있었습니다. 그의 유한한 몸에서는 힘이 빠져나갔고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습니다. 그는 ‘무리의 소리’(6절)와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죽을 몸을 지닌 유한한 인간은 이런 체험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다니엘은 얼굴을 땅에 조아리고 넘어진 채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연로한 다니엘 선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에서 의식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주 예수님에 대하여 불경스러운 말을 하는 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심판 날이 오면 예수님께 몇 마디 던질 말이 있다고 우쭐댑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리어지지 않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면, 인간은 전신에서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분의 발아래 쓰러지고 맙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 지닌 위엄을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유한한 인간에게는 주 예수님의 광명한 모습이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방문객이 주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니엘에게 하신 말씀은 10-14절에 실려 있습니다.
우선 연로한 다니엘 선지자의 의식이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의식은 단번에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10절에서 보듯이 한 손이 다니엘을 어루만지며 깨웠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겨우 손을 땅에 대고 짚고 무릎을 꿇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똑바로 서기 전에 몇 마디 위로의 말씀을 더 들어야 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은혜로우신 구주께서 다니엘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그가 큰 사랑을 받은 자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죄인이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위로의 말씀 중에서 이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께서 다니엘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방문자가 전해주는 말씀을 주의 깊게 잘 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일어섰지만 무릎은 계속 떨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입술에서 무슨 말씀이 나올지 몰라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는 전에 가브리엘 천사를 대면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충격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가장 영화로운 천사들보다 무한히 크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가브리엘의 발아래 죽은 자처럼 쓰러졌었지만 금방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회복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받은 후에야 비로소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력(自力)으로 서 있어야 하는 인간들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다니엘은 계속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데 구주께서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다니엘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부드럽게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이 하늘의 방문자는 다니엘의 친구였습니다(12절).
(단10:12)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다니엘아 너는 3주 전부터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네가 기도한 첫 순간부터 하나님은 너의 기도를 들으셨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장래를 알기 위해 결심하고 그들의 죄 때문에 너 자신을 낮추었다. 그 첫날의 기도와 겸비부터 하나님이 보시고 나를 보내셨다. 이제 너는 내가 가져온 계시를 받게 될 것이다. 너는 3주 전부터 계속 기도해 왔고, 나도 벌써 출발하였으나 내 길에 방해자 있었다….”
13절은 구약에서 가장 신비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도대체 누가 감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해방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해답은 ‘바사국 군’(君)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용된 용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길을 막은 자는 바사의 ‘왕’이 아니고 ‘왕자’(君)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막는 자는 다리오도 고레스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성경에서 일률적으로 ‘왕들’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의 군주들에게 붙여진 칭호였습니다. 본 절은 이런 왕들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바사 왕국의 왕자’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0:20절에서 언급한 교훈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요점은 이런 것입니다.
(고전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즉, 사람들이 우상 앞에서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빕니다. 그러나 그들이 머리를 숙이는 대상은 우상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령 경배자들이 우상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할지라도, 우상 뒤에 있는 실체는 귀신들이며 이 악귀들이 우상숭배자들의 실질적인 신(神)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사의 수호신들 뒤에는 초자연적이고 악한 인격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악령들이 바사의 관리들을 움직여 포로에서 귀향한 신실한 소수인 유대인을 방해하는 사마리아인들을 지원케 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바사 정부의 힘을 믿고 계속 유대인들을 밀어붙였습니다. 한편 다니엘은 3주 전부터 하늘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미가엘 천사장과 함께 현장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리하여 악령들과의 영적 투쟁이 개시된 것이었습니다.
이 영적 싸움의 결과가 13절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바사국 군’(君)이란 말이 쓰이지 않고 ‘바사국 왕들’이라는 말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바사 제국의 지상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바사국 군이 지도자들을 사주하여 악을 행하게 했던 악령들은 이제 그들 곁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 대신 지금은 그리스도와 미가엘 천사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들이 승리를 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사 왕들이 결정하는 정책에 영향을 주는 세력은 악령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귀향한 유대인들의 형편에 곧 변화가 생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귀향한 유대인들의 상황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니엘에게 오셔서 장차 일어날 일들을 직접 계시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먼 장래의 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일들이 발생될 것인지를 전망하게 되었습니다(14절). 그가 받을 환상은 바로 앞의 일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펼쳐지는 광대한 계시였습니다. 이 환상들은 매우 상세합니다. 다니엘서 11장과 12장은 사건 발생 이전에 기록된 역사로서 성경의 계시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티그리스 강변에 있던 다니엘에게 알려주셨던 이 모든 계시들은 인간 역사 속에서 그대로 전개될 내용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이 환상을 받게 된 경위
우리는 위에서 환상이 나타난 때와 장소를 짚어 보았고, 다니엘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주님이 다니엘에게 주신 서언(序言)들도 공부하였습니다. 본 장의 나머지 부분들은 (15절 이하) 다니엘 선지자가 11장과 12장에 실린 환상을 받을 수 있는 힘을 얻기까지 상황을 설명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주님이 들려주시는 격려의 말씀도 받았고, 심지어 “두려워 말라.”라는 신령한 명령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아직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여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외경심에 가득 차 그리스도의 발아래 얼굴을 파묻고 쓰려졌습니다(15절) 그는 주님의 대면하자 너무도 압도되어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벙어리가 된 셈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과의 대면으로 심신이 기진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입을 열어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가 다니엘의 입술을 어루만졌습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뵈었을 때 한 스랍(천사)이 그의 입을 만진 경우와 같습니다(사 6:5-6).
다니엘 선지자는 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고 나서 말을 할 수 있는 힘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자신이 얼마나 깊은 고뇌에 잠겼으며 어떻게 몸의 기운을 다 잃게 되었는지를 겨우 설명하였습니다(16절). 그는 자기와 같은 비천한 종이 어찌 감히 주님과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17절). 그는 너무도 거룩한 환상을 도저히 감당치 못하며 그 환상 때문에 초 죽음이 되어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니엘의 말이 끝나자 다시 한 천사가 나타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원기를 되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주님이 주시려는 계시를 보고들을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나머지 기력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한번 그에게 은혜롭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을 해 주실 때 비로소 생기게 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다니엘에게 “강건하라.”라고 두 번씩 부드럽게 분부하셨습니다. 마침내 연로한 다니엘은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19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제 유한한 인간이 초자연적인 환상을 받을 준비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다니엘은 비로소 놀라운 계시들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20절과 21절에 담긴 주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풀어 옮길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바사에서 영적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투쟁이 끝나면 그리스의 왕자(악령)와 또 다른 영적 싸움을 벌일 것이다. 이 투쟁들에서 나의 동맹이 될 자는 너의 왕자에게 속한 미가엘 천사밖에 없다….”
“그런데 너는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를 아느냐? 너는 내가 너에게 온 이유를 알고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서에 기록된 것을 너에게 말해주기 위해서란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계획’이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이라는 말로 적혀 있습니다. 이 진리들은 아직 성경 말씀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획서에는 이미 나와 있습니다. 이 본문의 표현은 1-12장에 나오는 계시들이 이미 예언된 대로 상세한 세목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해 줍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들
우리는 문제의 환상을 살피기 전에 다니엘서 10장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첫째, 본 장은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진짜 원수들이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룹바벨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유대인의 한 지도자였습니다. 그와 함께 갔던 동역 자들이 시작했던 사역은 도중에 중단되었습니다. 누구의 책임이었을까요?
귀향한 유대인 무리들의 책임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책임의 화살을 던져야 할까요?
“모두 당신들의 잘못입니다. 일이 중단된 까닭은 당신들이 힘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좌절된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는 원수들입니다”
아니면, 사마리아인들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팔레스틴에서 줄곧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이 귀향하는 것과 성전 재건 계획을 대단히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일을 방해하기로 작정하고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막는 원수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아닐까요?
만약 이 경우도 아니라면, 바사 백성들을 나무라야 하지 않을까요? 애초에 유대인들의 귀향을 허락한 자들은 바사의 관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마리아인들로부터 진정서가 들어오자 유대인들의 사역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책임이 이 바사 사람들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진짜 원수들은 이런 대상들이 아닙니다 13절과 20절을 보십시오.
“바사국군(君, 왕자)이… 나를 막았으므로”
“바사(국)군과 싸우려니와”
하나님의 일을 막고 대적하는 원수들의 실체는 지상적인 인간의 권세나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그들 뒤에서 영향을 끼치는 영계의 왕권들입니다.
성경에는 천사의 교리가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천사론은 요즘 인기가 없지만 성경에 따르면 선한 천사도 있고 악한 천사도 있습니다. 악한 천사들은 ‘귀신들’로 불립니다.
지상에 사는 악인들이 악한 권세들에게 조종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고 인간의 정신에 침투하는 이런 영적 인격체들이 하나님의 일을 막는 진짜 원수들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투쟁은 일차적인 우리 자신들의 좌절이나 가시적인 원수들과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또한 우리가 하려는 일들을 항상 방해하는 악의의 비판자들이나 정부의 정책들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무엇보다도 영적 원수들과의 영적 투쟁입니다. 이 사실은 방금 우리가 공부한 다니엘서 10장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영적 세계는 실존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계의 투쟁이 우리의 체험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흔히 “이해가 안 갑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금방 실망을 하고 상대편의 이해력이나 지적 수준을 의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의 효과가 없다고 좌절해서도 안 되며 전달 방법이 나쁘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복음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그릇된 동기와 정신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근본적인 까닭은 (고후 4:4)“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그러기 때문에 마귀와 그를 따르는 악령들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실제의 원수들입니다. 이 사실을 파악하면 본 장의 두 번째 교훈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본 장은 우리가 싸우는 투쟁을 위해 필요한 유일한 장비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진정한 원수들을 밝힌 다음 곧이어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엡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가 입는 갑옷과 휘두르는 무기들은 우리가 치르는 전쟁의 성격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투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보호를 받아야 하고 영적 무기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쓰러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영적 투쟁을 위해 사용할 무기들을 열거한 후에 지상의 물건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의 무기를 언급하고 끝맺습니다.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영적 투쟁은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기도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하늘의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다니엘 10:12절은 우리의 기도를 북돋아 주는 데 있어 큰 격려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늘의 도움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처럼 우리도 기도가 상달되었다는 말씀과 개인적인 확답을 받기 위해서는 어쩌면 3주씩 오랫동안 고민하며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탄원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고레스로 하여금 그의 역사적인 칙령을 반포하도록 영향을 준 것은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재건 활동이 방해를 받아 중단되었을 때에도 다니엘은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된 건축 사역이 재개되었습니다. 원수들은 좌절되었고, 하나님은 새로운 지도자들을 보내셨으며 자기 백성들을 고취시켰습니다. 마침내 성전은 개축되었고 아무것도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방해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87세의 고령자가 먼 이국 땅에서 기도하자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지역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너무도 커서 추산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투쟁의 주제 이외에도 기도의 능력을 또 하나의 주제로 삼고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서신들은 기도에 대한 요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에 전념할 때 변화가 확실히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에 힘써야 한다고 늘 호소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능력이 어떻게 효력을 드러내는지를 교인들이 정확하게 알 때까지 기다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의 영적 투쟁의 현장에서 하늘의 도움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와 미가엘의 군대들이 연합하여 악의 세력들과 싸우기 때문에 상황은 바뀌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본 장은 기도하는 사람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다니엘은 평생 동안 본 장에서처럼 큰 힘을 발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처럼 그가 연약하고 겸비해진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산산이 깨어진 심령으로 주 앞에 한없이 엎드려 있었습니다.
기도는 신령한 능력과 하늘의 도움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높이 세우는 법이 없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를 오히려 낮춥니다.
기도의 길은 힘들고 고독한 외길입니다. 응답을 바로 받지 못하면 당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에는 큰 위로가 뒤따릅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던 곳에서 베일이 벗겨진 장엄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목도하였고, 주님의 입술을 통해 자기가 하늘의 큰 사랑을 받는 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장소에서 천사들의 어루만짐을 받았으며 현재의 역경이 바뀔 것이라는 보장도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 미래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아무 염려가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기도의 장소가 아니었더라면 다니엘이 이 모든 계시와 위로의 말씀들로 어디에서 보고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기도의 장소가 아니라면 허약하고 떨 수밖에 없는 죽을 죄인이 어디에서 지상의 천국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순종하는 장소에서 기도하는 장소에서 말씀 보는 장소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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