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구약성경 말씀

[잠언 11장 주일설교말씀]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잠 11:1-21)

르호봇 2021. 2. 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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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잠언 11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통해서 생활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정직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공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잠 11:1-21)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한 가지 분명한 생활의 윈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기준은 의로움과 정직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의로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불의와 거짓과 속임과 무질서와 분별없는 삶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또한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잠언 11장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생활의 악습들을 열거해놓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들이고 우리들이 지금 알게 모르게 범하고 있는 생활의 단면들이.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악습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속이는 저울(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이것은 상업(商) 행위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악습이다. 속이는 저울은 어떤 사람과의 거래에서든지 온갖 모양으로 속이는 부당 행위에 속하는 용서 못 할 범죄에 속한다. 이 같은 행위는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스스로 양심을 속이는 일이고 이웃에게 해악을 끼치는 짓이다. 속이는 추나 무게,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모든 행위의 가증스러움 즉 불공평, 불성실, 불균등한 부정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이다.

부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는 드러내 놓고 행하는 부정이 있고 또 하나는 교묘하게 위장되어서 마치 공평한 것처럼 비밀리에 행해지는 부정이다. 저울의 추를 속이는 행위는 바로 후자에 속하는 부정행위에 해당한다. 거래자에게는 가장 정확하게 주는 것같이 하지만 속으로는 양을 속이고 손해를 끼치는 행위다. 그래서 겉으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부정은 드러나는 부정보다 그 본성에 있어서는 훨씬 더 가증스럽다. 왜냐하면 무력은 무력으로 무찌를 수가 있지만 불신 행위는 숨겨져 있고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속이는 저울을 싫어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공평하고 정직한 거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의 생활이.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이렇게 정직과 공정을 요구하시는 하나님도 공정한 저울을 가지고 계시다(단 5:27). 하나님은 그 저울로 가끔 우리의 정직성을 달아보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벨사살이 그 저울에 달려서 그 양이 미달됨으로써 버림을 당한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래서 섣불리 저울로 속여 더 많이 벌어 보겠다는 인간의 얄팍산 꾀를 하나님은 용서치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불의의 수익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더 큰 손해를 입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남겨 보려는 마음에서 쉽게 받을 수 있는 이 같은 유혹을 과감히 뿌리쳐야 한다. 이 같은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부끄러운 가증한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2. 교만 (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교만이라는 말은 불신앙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주가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주가 되는 것을 말한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주체가 자신이다. 성공하게 된 것도 그 원인이 자신이다. 돈을 벌게 된 것도 그 원인이 자신이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좋아하고 언제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은 물리치신다고 하셨다. 언제나 주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대개 교만의 출처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인간생활의 모든 계층, 모든 상황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지위나 계급에서 오는 교만, 출생 신분에서 오는 교만, 부와 학식에서 오는 교만, 그리고 가장 어리석은 교만인 영적인 교만 등이다. 사실 영적인 교만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영적인 하나님 앞에서 남보다 더 거룩하다고 자만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교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데서 오는 일종의 지적인 허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싫어하시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과대평가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남을 과소평가 할 것이고 남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필시 남을 무시하게 되고 남을 압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만은 인간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할 줄 모르게 만들고 잔인하고 편파 적이며 무례해져서 경멸과 상처를 낳게 하고 모든 유대 관계에도 파괴를 가져오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교만으로 생기는 정신적인 폐해는 시기심과 남을 깍아내리는 악심이 있다. 칭찬과 칭송이 남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과도한 과시욕, 독점욕, 성취욕 등으로 시기, 증오, 미움과 같은 정신적인 살의를 갖게 만든다. 이 세상에서 무섭고 끔찍한 모든 사건들은 대개 이 같은 시기와 살의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교만과 겸손을 대조적으로 비교시켜 놓고 있다. "교만이 오면 욕이 오고" "겸손이 있는 곳에는 지혜가 온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교만했던 사람들은 도주에서 욕을 당하고(느부갓네살을 짐승으로, 헤롯에게 고통을, 사울에게 비참한 최후를,) 겸손했던 사람들은 지혜가 주어졌다. (노아에게 의를, 요셉에게 꿈을, 다윗에게 용서를, 바울에게 명예를) 그래서 하나님은 싫어하시는 것이다.

 

겸손은 단순히 남에게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자신이 맡은 바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정신이고 자세를 말한다. 이 같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인 것을 알고 피조 된 위치를 바로 알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섬기는 사림이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린다. 이렇게 보면 겸손한 사람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3. 무소신 (11)

"성음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한 사회의 흥망성쇠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도덕 수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역할은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정직한 자라는 말은 그 사회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합당한 능력을 말하고 맡겨진 의무를 이행하기에 충분한 경건심과 결단력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의로운 정신과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한 사회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면 그 의로움과 결단력으로 훌륭한 법이 제정되어야 하고 공평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악이 규제받고 처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정직한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이웃의 번영을 위하여 존재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재판석에서 부당한 판결이 내려지는 일이 없도록 깊이 관여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그 사회가 지탱되기 때문이다.

 

이 소신이 결여되거나 죽어버릴 때 그 사회는 상대적으로 무소신이 판을 칠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신앙인은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가장 우수한 접착제의 역할을 하며 그것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들과의 사이에 단결과 평화와 사랑이 강화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회를 살아가면서 소신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신앙을 포기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회에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것은 소신 있는 삶을 영위하라는 말씀이다. 그 같은 정신이 그 성을 축원하고 진흥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더욱 세속화되어갈 때, 그리고 정직이 쇠하여 가는 세상에서는 무엇보다도 뜻이 서 있고 분명한 소신이 서 있는 삶이 요구되는 것이다.

 

4. 무사고(無思考) (14)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도략과 모사는 성급함과 속단, 그리고 신중함의 결여를 말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생각이 결여된 일에는 언제나 졸속이 나오게 되고 경박함이 흐를 수밖에 없다. 그 같은 일에 무슨 좋은 결과가 나오겠는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특별히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여야 할 부분들이 많다. , 충분히 생각하고 지혜 있게 처신해야 할 것들이다.

 

1) (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세상에서 한심한 사람은 두루 다니면서 남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경박하고 천한 사람이다. 그래서 두루 다니며 재잘거리고 수군거리고 중상하여 남의 비밀을 누설하고 이웃을 멸시한다.

 

이러한 멸시는 고의적인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말이 많기 때문에 생기게 된다. 이런 사람은 어디를 가나 존대를 받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남의 가슴속에 깊이 숨겨 있는 비밀을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사람을 우리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이 같은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우선 말을 적게 하다. 침묵할 줄 안다. 그리고 상대방의 약점을 감추어 줄 만한 아량이 있다. 이것이 지혜 있는 사람의 사회생활의 처신 제1조다. 신중한 언어생활, 그래서 침묵은 금이라고 한 것이다.

 

2) 행동 (14)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 말에 생각이 없는 사람이 이상으로 경박한 사람은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다. 도략이 없고 모사가 없으면 일을 그르칠 뿐 아니라 언제나 사후에 후회가 따라올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략이라는 말은 배를 조정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커다란 배가 그 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면 아무렇게나 가는 것 같지만 배도 가는 길이 있다. 배가 정해진 뱃길을 따라 안전하게 가게 하는 것 그것이 도략이다. 그 조종술이 없다면 그 배는 암초에 부딪쳐서 좌초하고 말 것이다. 사람이 생각 없이 행동하게 되면 이렇게 좌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략이 없으면 개인도 망할 뿐만 아니라 한 나라도 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3) 분수 (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이것은 경제의 질서에 대한 말씀이다. 무분별한 경제적인 책임과 담보는 가끔 사람들로 하여금 곤경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변상할 능력도 없고 책임질 만한 능력도 없으면서 생각 없이 서명한 보증이 때로 한 가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경우가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세상을 살면서 생각 없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위험한 일이다. 책임을 질 수 없는 과한 약속, 감당할 수 없는 보증, 신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능력 이상의 행위를 금해야 하고 분수에 넘치는 분별없는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때로 예기치 않은 환란과 곤경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4) 공모 (21)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다양한 사회가 되다 보면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살게 되고 모여 살게 되면 자연히 편리를 추구하게 되고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편법이 생기고 부정이 생기게 된다. 이 같은 부정은 자연히 담합이 이루어지고 숨어서 흥정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하나의 공모에 속한다. 이 같은 공모는 누군가에 손해를 끼치고 해를 주게 되는 요소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모는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숨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 죄로써 연합하는 것들은 정녕 그 결과가 부러질 것이고 도와줄 사람이 많아서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벌을 면치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불경건한 사람은 결국은 그 심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예외로 살아갈 수가 없다. 함께 살아가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같은 생활에서 무엇인가 구별된 삶의 모습이 요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이기도 하다. 또한 그 같은 구별된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고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원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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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잠언 1장 주일예배 설교문 중에서 신앙 성장의 단계라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단계별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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