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로마서 율법과 복음 설교 말씀] 어떤 여인의 경험(롬 7:1-13)

르호봇 2024. 3. 2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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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 율법과 복음 설교 말씀은 어떤 여인과 남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깨달은 여인이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게 됩니다. 우리는 원죄의 죄인이었습니다. 영원히 죽어야 할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남편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어떤 여인의 경험(롬 7:1-13)

 

어떤 C라는 여인이 L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L이라는 남자분은 일종의 완전주의자로서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이 C 여인은 이런 남편이 존경스러웠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남편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가정생활에도 철저한 규칙을 제정하여 시행했습니다. 규칙을 깨뜨린 식구들에게는 엄격한 법칙을 적용했습니다. 아내는 잘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실수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점차 모든 면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마침내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녀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과부로 홀로 됨이 충격이었지만 솔직히 자신의 내면에서는 어떤 해방감마저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몇 년 후에 직장 친구의 소개로 J라는 남자와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J라는 남자분은 사고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분이었습니다. 이런 경험 탓인지 그는 매사에 이해심이 많고 동정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아내가 실수할 때에도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늘 따듯한 위로를 베풀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이 여인은 점차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규칙이 없어도 그녀의 새 가정에는 따듯한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고 한없는 애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새로운 활기로 가득 찼고 그녀는 매우 의욕적인 미래를 계획하고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바로 본문의 말씀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C라는 여인은 바로 크리스천의 상징이고 J라는 새 남편은 Jesus(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분을 인생의 새로운 주인으로 남편으로 섬기기 전에 우리는 모두 율법을 섬기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L이라는 사람은 바로 율법(Law)의 약자를 상징합니다.

교회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안 든 간에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규범은 율법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함께 율법에 매인 바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유대인들의 율법과는 상관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로마서 2장에 보시면 바울사도는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양심이 율법이 되어 하라, 하지 말라’라고 우리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양심의 목소리는 율법의 기능과 본질적으로 유사합니다. 우리는 다 율법이라는 규범에 의해서 살지만 우리의 딜레마는 율법이 하라는 것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은 더해지고 우리는 양심의 명령, 도덕의 명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자신의 범죄 한 삶의 모습을 볼 때마다 삶에 있어서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우리가 어느 날 예수라는 새로운 남편을 만납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율법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율법이라는 남편은 이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율법 그 자체의 기능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계속해서 던져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 그 자체를 통해서 우리가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율법의 기능 그 자체는 현존하는 것이기에 4절에서 이런 설명을 부연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이 말씀처럼 옛 남편과의 관계가 남편이 죽으면 청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상징하기 위해서 동원된 남편이 죽었다고 설명을 했지만 율법 그 자체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4절에서 바울사도는 율법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임을 당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는 예수라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가지고 살게 되었기 때문에 율법과의 관계는 죽음을 통해서 청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을 살아가게 된 자들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산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을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도덕과 신앙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혹은 흔히 말하는 종교와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명제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첫째로 삶의 동기가 다릅니다.

우리가 율법을, 도덕을 혹은 양심을 삶의 주인으로 알고 살아갈 때 그 삶의 동기가 있다면 그 동기는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육신적 동기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라고 육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8장에도 계속 육신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먼저 육신이라는 말은 육체가 아닙니다. 육신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 거듭나기 전의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이기심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변화되지 않는 타락한 본성을 가리키며 성경은 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육신의 특징이 있다면 한마디로 계속해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도덕적 열망이 있습니다. 양심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깊은 동기를 살펴보면 자기 과시용이며 자신이 의롭게 산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 하고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에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6절은 5절과 대조를 이룹니다. 6절은 이제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원문에는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시작되지만 여기서 그러나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6절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에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보통 자연인의 삶의 동기는 양심에 따라서, 혹은 도덕에 따라 산다고 말한다면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동기는 성령에 의해 산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을 때 주의 영이 내 삶 안에 임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그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을 한마디로 말할 수가 있다면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높이고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삶 속에 예수님이 오셔서 주의 영이 그 마음속에 거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시작하면 그 속에 삶에 대한 새로운 동기가 생기는데 그 동기가 바로 예수님을 나타내고 싶어 하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 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 크리스천들도 도덕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과시용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 오신 예수님을 높이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같은 율법을 행하지만 율법을 행하는 마음속의 동기가 다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라는 이 새로운 삶의 동기가 오늘 여러분을 지배하고 계신지요?

두 번째로 삶의 욕구가 다릅니다.

우리가 율법을 주인으로 하고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욕구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죄악의 정욕이라고 말합니다.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미 말씀드렸듯이 율법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율법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해가 없도록 바울사도는 로마서 712절의 말씀에서 율법의 본질을 규명해 놓았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여기서 율법의 본질을 세 가지로 규명하면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의로운 것이며 선한 것입니다. 율법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우리인 것입니다. 거룩하며 의롭고 선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의 연약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바울사도는 8장에서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8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여기서 보시면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연약성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본성 때문에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의 고민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추한 곳으로 달려갑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의롭게 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는 의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불의로 달려갑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선한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선한 메시지를 들으면서 우리의 발은 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고민과 좌절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두 가지의 명령으로 요약될 수가 있는데 특히 하지 말라는 명령, 예를 들어서 더럽게 살지 말라는 메시지를 들으면 우리는 더럽게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일어납니다. “불의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 불의를 실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그 악을 알고 싶고 그 악에 참여하고 싶은 호기심을 느낍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육신이요, 본성이며 여기에 인간의 도덕적인 교육의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도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도덕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제시하지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은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서 정죄받고 절망했던 우리들이 어느 날 삶의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만납니다. 그때 우리 안에는 새로운 삶의 욕구가 생기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5절에 보시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역사했지만, 이상하게 율법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우리는 죄악의 정욕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새로운 열망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욕구는 사랑의 욕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욕구가 생깁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이미 로마서 5장의 첫머리 부분부터 강조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5)고 말씀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었던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랑을 알았습니다. 가장 비이기적이고 가장 비타산적인 조건 없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십자가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사랑을 부어주신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삶의 욕구인 것입니다. 그 주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욕구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고 노력하다 보니까 옛날 율법이 요구했던 그 삶을 우리가 성취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율법만 보면서 율법대로 살아가려 할 때에는 오히려 우리가 율법을 깨뜨리는 삶을 살았지만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우리의 삶이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선해지는 결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진리를 바울사도는 84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육신을 좇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육신은 아직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동기를 가지고 이제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좇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보여 주시는 주님을 나도 보고 그 주님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그 영을 좋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붙들고만 있을 때는 되지 않았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까 내 삶이 저절로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선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율법주의는 아니지만 동시에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을 통해서 율법을 성취하는 놀라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 얽매인 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무율법주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주의가 아니라 그 도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를 사랑하기 시작하게 되자 내 삶이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량 청소년인 한 학생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모가 별별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다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가정에서는 부모가 노력을 다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불량 학생이 한 좋은 여학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불량 학생이 좋은 여학생을 만나서 사귀고 사랑에 빠지게 되자마자 그는 누가 잔소리를 하지 않았는데도 머리를 깎고 옷을 단정히 입기 시작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변한 것입니다. 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비슷한 예를 어떤 잡지를 읽다가 발견했는데 화란에서 엘리나라는 78세 된 할머니가 있었는데 이 할머니의 평생소원이 담배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50년간 담배 끊는 크리닉에도 가보고 별별 노력을 다했는데도 담배를 못 끊고 어느새 78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엘리나 할머니가 79세 된 제이슨이라는 노인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제이슨이라는 노인이 말하기를 내가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데 한 가지 때문에 할 수가 없을 것 같다”라고 그 이유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데 같이 살 생각을 하니 한심하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그래요? 그러면 내가 끊지요라고 하고 그 순간으로 담배를 끊었답니다. 50년간의 딜레마가 한순간에 극복되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기사의 마지막 줄에 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사랑의 힘은 의지의 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멋지게 기술해 놓았습니다. 자기의 의지의 힘으로 끊어야지 하고 노력할수록 더 유혹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시작하자 그 사랑은 순식간에 그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의 비밀은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라 사랑의 변화입니다. 바울사도는 8장에서 이 사랑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밀고 나갑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8:35)라고 말하고 있으며 고린도후서 513절 이하에서는 자신의 삶을 솔직히 드러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분, 저는 미쳐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미쳐 있습니다. 내가 미쳤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삶은 어차피 다 미쳐 사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무언가에 다 미쳐 있습니다. 골프에 미치든 주색잡기에 미치든 무엇인가에 다 미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변화시켜 주신 놀라운 구세주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행복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시작한 후부터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 삶은 변화됩니다. 그리고 내 삶은 도덕을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여기 우리의 삶에 새로운 욕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욕구입니다.

세 번째로 삶의 열매가 다릅니다.

육신에 있을 때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죄의 정욕이었습니다. 그 정욕은 5절에서 보시면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4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전에는 단순히 도덕적인 삶이 내 삶의 규범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남편에게로 시집을 가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전에 사탄을 위하여 열매를 맺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전에 육신의 열매를 맺던 우리가 이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극적인 삶의 대조를 보십시오. 당신은 아직도 타락한 육신의 본성을 좇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고 있습니까? ,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을 좇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 맺어지는 그 놀라운 열매, 그 풍성함의 열매를 아시는지요?

바로 이 부분을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다 같이 5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룰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무엇을 안 하겠다고 결심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그가 나를 감화하실 때 주님 기뻐하시는 일만 해 보세요. 그러나 아직도 육체를 따라 살면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이 19-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이런 것들이 사망의 열매입니다. 처음에는 비슷하게 출발하고 인간은 모두 다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깊은 곳에서는 그의 삶이 맺어가고 있는 열매는 사실은 이런 냄새나는 사망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좇아갈 때는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요? 22-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열매라는 단어가 단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열매는 한 열매의 9가지 측면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9가지의 인격적 특성들은 결국 한 인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스럽고, 정말 희락으로 충만한 분, 정말 화평으로 충만한 분, 정말 오래 참으셨던 분, 이 대표적인 인격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에 사로잡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보여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살면 주님을 닮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 삶의 마지막에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는 그 주님을 닮아 내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세워지는 황홀한 감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는 달라지지 않고 변화되지 않습니까? 바르고 의롭게 선하게 살기를 원하는 열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의하고 악하고 더 더럽혀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우리의 도덕적 결심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어떤 여인의 경험처럼 주님을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동기와 욕구가 새로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주일 성경말씀] 율법주의 신앙의 어리석음(갈 4:1-31)

 

[갈라디아서 4장 주일 성경말씀] 율법주의 신앙의 어리석음(갈 4:1-31)

갈라디아서 4장 주일 성경말씀은 율법주의 신앙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리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파했는데 교인들은 거짓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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