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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하나님 말씀] 탕자의 비유 1(눅 15:1-3; 11-24)

르호봇 2020. 10. 3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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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5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탕자의 비유라는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탕자의 비유(눅 15:1-3; 11-24)

 

설교 내용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비유의 제목을 "탕자의 비유"라고 붙여 왔습니다. 이러한 제목을 붙이게 되면 이 비유의 중심 되는 주제를 탕자와 관련지어 볼 수 있게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점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중심 되는 주제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 방탕하여 모든 재산을 허비한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처음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방탕한 아들을 용서하시는 어떤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행동을 다룰 때에는 그의 행동이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관계 안에 누리는 즐거움을 감사하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우리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타락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우리의 시간, , 능력, 재능, 열정 등을 유익하지 못한 일에 낭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가치관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소유하느냐의 문제에 삶의 우선적인 가치 기준을 두고 사는 사람은 탕자와 같이 세상의 노예가 되어, 여기에 재산과 시간과 재능을 낭비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연구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용서하시고 자녀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중심 되는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이 비유를 주신 배경, 두 번째로는 비유의 내용, 세 번째로는 비유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의 배경

예수님은 왜 이 탕자의 비유를 주셨을까요? 비유를 주신 배경에 관하여 누가복음 15:1-3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도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예수님은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중얼거리면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을 들으시고 세 가지의 비유를 주셨습니다. 이 세 가지의 비유는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 주제를 연속하여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강조하고, 또한 더 풍성한 의미를 전하게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장에 천국에 관한 일곱 가지의 비유와 25장에 있는 종말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비유는 어떤 신학적인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일종의 교육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parabol?)라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문자적으로 "옆에"(para)라는 말과 "놓는다," "던진다"(ball?) 말이 합성된 것인데, 이 용어에서도 비유가 의미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과 구원이나 신자의 삶에 관한 여러 신학적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셨지만 이 비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화(fable)나 풍유(allegory)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화나 풍유는 독자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는 한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여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 가지의 연속되는 비유의 시작을 보면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시작되는 누가복음 15:4에는 "어느 사람이" 15:8에는 "어느 여자가 " 15:11에는 "어떤 사람이 "라고 시작합니다. 이 점은 헬라어 성경에 같은 문구로 시작하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비유의 중심이 누가 되어야 할까요? 당연히 양 100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를 잃었는데 그 양을 찾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 등불을 켜고 온 집을 쓸고 찾는 어떤 부인, 두 아들이 있는 어떤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비유도 사실 모든 교회가 함께 사용해 왔고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탕자의 비유"로 제목을 붙였습니다만 내용적으로는 어떤 아버지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간주하던 사람들과 예수님이 함께 교제하며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비판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고치시며, 예수님이 왜 세리들과 죄인들과 먹고 마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는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점을 설명하실까요?

 

2. 비유의 내용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비판하는 대로 세리들과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이유를 한 비유를 통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가운데 둘째가 자기에게 돌아올 상속재산을 미리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요구를 받고 각자의 재산을 상속해 주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볼 때 둘째 아들이 왜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챙겨 집을 나갔는지는 설명해 주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의 사상과 고려해 볼 때, 이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보다도 자기의 개인과 자기에게 돌아올 몫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보다도 관계의 결과로 주어지는 소유에 더 비중을 두는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2에 보면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관계보다는 "내게 돌아 올 분깃"이라는 소유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가치관의 척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둘째 아들이 요구하고 있는 분깃은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 상속할 재산이 우선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상속재산을 부모의 생존 시에 요구할 수도 없는 것이 당시 성경시대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들은 아버지는 생각지도 않고,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상속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은 성경 역사에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사사시대에는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 더욱 두드러진 시대였습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이 사사기 17:6에 나타나 있는데,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사기 17:6-21:25에 이르는 마지막 부분을 보면 가치관의 기준이 자기와 소유하는 것에 두었기 때문에 무질서, 혼란, 약탈, 음란행위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이나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치관이 예수님보다는 예수님을 인하여 생기게 될 재물에 그의 가치관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에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가치 판단기준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소유에 있지 않습니까?

 

이 본문에 나타나는 말씀대로 아버지와 관계를 무시하고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인 소유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탕자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오직 자기에게 돌아올 소유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척도가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은 가치의 기준을 소유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보다도 관계의 결과로 주어지는 소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더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가치관의 잘못은 그릇된 행동으로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둘째 아들은 그 후에 며칠이 못되어 상속으로 받은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눅15:13). 여기 다 모아 가지고 떠났다는 말은 단단한 결심을 가지고 자기의 모든 정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유에 기초를 둔 가치관 차이는 빨리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곧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는 먼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면서 그가 가지고 간 재산을 허비하기 시작했습니다(녹 15:13). 얼마 동안은 그 재산으로 그는 먹고 마시면서 자기의 자유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끄는 매력과 육신의 쾌락 때문에 앞으로 임할 자신의 비참함과 가난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자신이 소유했던 것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끝나 버릴 시간이 그에게 돌아왔습니다. 그가 가지고 간 재산을 다 써버렸습니다. 그 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하게 되었습니다(눅15:14).

 

이 본문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해 보면 이제 그도 궁핍하게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품에서 한 번도 궁핍해 보지 않은 그가 궁핍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탕자가 비로소 궁핍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그에게 있어서는 집으로 돌아오라는 소환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의 재산을 회복할 심산으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붙여 산다"는 말은 여전히 그가 이 먼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그는 무엇인가 하려던 그 나라에서, 오히려 그 나라 백성의 통제를 받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 백성중 한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눅15:15). 이렇게 돼지를 치는 일은 유대인에게는 가장 저주스럽고, 천한 직업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어서 굶주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눅15:16).

 

우리는 여기서 탕자의 죄에 대하여 그의 형벌이 맞서 있는 분명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왜 이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는 모든 가치판단의 저울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두지 아니하고 철저히 자기와 자기가 차지할 분깃인 소유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 탕자를 보십시오. 이것이 "소유"의 종착역입니다. 자기 욕심의 종착지입니다. 그는 그가 원했던 소유를 차지하였지만 그 소유가 그의 자유나 행복을 지켜 준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소유가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여러분! 이 둘째 아들에게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인생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우리는 탕자가 한 걸음씩 쇠퇴 일로의 생을 걸어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품을 떠난 그가 한 걸음씩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7에 탕자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서 죽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을 헬라어 성경에는 "그가 그 자신에게 돌아와서"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성이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데, 회개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성으로 그의 범죄의 사실을 인지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보다는 소유를 더 중시한 결과, 소유의 종착지에 이르게 된 것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주는 자가 없어 못 먹는 처참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15:19)라는 독백으로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제 그의 독백 속에 모든 가치의 척도를 바꾸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이라는 소유에서부터 "아버지의 관계 속에 머무는 품군의 하나"라는 관계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관계하며 아버지의 그늘 속에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는가?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로 가리라"라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 지를 인식하는 일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회개는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감으로"(눅15:20)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는 예전에 그가 버리고 나온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이제는 아버지와 관계 속에 누리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그 후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하여 우리의 상상에 맡겨버리지 아니하고, 그 이후의 삶도 생생하게 보도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20 이하에 보면 아들이 먼 나라로 갔지만 여전히 그 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이의 거리가 아직 먼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눅15:20). 이 장면은 아버지의 사랑이 아주 극적으로 잘 그려진 그림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와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를 맞으러 급히 달려 나가 목을 안고 입맞춤으로 그를 영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화해와 평화에 대한 약속의 상징으로 하는 인사법이었습니다(창33:4; 삼하 14:33). 이러한 아버지의 영접에서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도덕적인 잘못과 돌이킬 수 없는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탕자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15:2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재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15:22-23)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는 일은 그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신분을 확인시키는 표로 사용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탕자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버리고 소유를 따라 간 자였습니다.

 

그러나 소유가 그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이 아니고, 그가 그토록 좋아하였고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 기준으로 삼았던 소유가 그를 파멸로 이끌어갔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끊어지고 소유마저도 다 잃어버린 그에게 아버지는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큰 잔치를 배설함으로 아들을 찾은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15:24)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아버지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그림을 머리에 그리면서 무엇을 생각하였습니까? 여러분! 이 아버지는 누구이며, 이 둘째 아들은 누구일까요?

 

3. 비유의 결론 :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기뻐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을까요? 이 비유는 누가복음 15:1-2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고 비난한 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는 설명하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누구이며, 탕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 비유에서 하나님과 아버지를 비교하고 있고, 세리와 죄인들은 탕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버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면서 재산을 탕진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 용서하시고 처음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인자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여러분! 이 비유에 나오는 인자하신 아버지가 우리가 섬기고 교제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누리는 은혜로운 축복들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축복을 감사하지 못하여 세상에 속한 것들을 따라가다가 탕자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얼마나 풍족한지 배우지 말고 지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단절된 하나님과의 우리와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구원은 누가복음의 중심 되는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10에 기록된 대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품을 떠나 세상을 향하고 있다면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인자하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언제든지 용서하시는 인자하신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도 인자하시다는 점을 보여주시는 것도 중요한 강조점입니다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세 가지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를 통하여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앞의 두 비유와 이 비유가 결정적으로 큰 차이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 비유인 잃은 양의 비유에서나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는 목자나 부인이 직접 찾아 나셨지만,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비유를 통하여 죄인이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인간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의 책임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책임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아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은 분도 있고, 아직까지 예수님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지 못하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 경험이 없는 분들은 인간 중심적인 잘못된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서 성경의 원리에 따라 살며,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면 참된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회와의 관계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참된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어거스틴은 그의 신앙 고백론인 참회록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내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한 탕자와 같았습니다.(눅15:12) … 결국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창기들에게 그 재산을 허비한'(눅15:13) 탕자와 같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를 돌보셨고 사랑해 주셨는데 나는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 대항하고 반역하고 당신의 영광을 더럽혔사오니, 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리고 그는 "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이제 당신을 떠나 돌아서지 않도록 내가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옵소서."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좋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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