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난주간 헬라어 설교말씀 중에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던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흩어지고 없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에 장례를 치르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부자의 묘실에 들어간다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무덤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고 있는가? 이 시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죽음으로 끝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새 생명의 소망을 가진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고 있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아리마대 요셉”(마 27:57-61)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마 27: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마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마 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마 27: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하셨습니다. 이미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죄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생애의 기간에 요셉의 아들로서 인생을 완전하게 사셨고 공생애의 기간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단 한 번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여 자신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한 사람도 요셉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은 육적인 준비를 한 사람이라면 아리마대 요셉은 영적인 것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속죄를 이루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면서 육적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모두가 육적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제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만 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워 사라졌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신앙과 믿음을 소유해야 할 것을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 혼자 살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은 크리스토 쉬네스타우로마이 조 데 우케티 에고 제 데 엔 에모이 크리스토스 호 데 뉜 조 엔 사르키 엔 피스테이 조 테 투 휘우 투 데우 투 아가페산토스 메 카이 파라돈토스 헤아우톤 휘페르 에무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리마대 요셉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여 새 생명을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여 새로운 생명의 소망을 얻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는데 동사 쉬스타우로오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다'를 의미합니다. 문법은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단수 1인칭입니다.
직설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내가 실제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료 시제는 내가 실제로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으면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수동태는 내가 못 박힌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싶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기 때문에 내가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57절은 옾시아스 데 게노메네스 엘덴 안드로포스 플루시오스 아포 아리마다이아스 투노마 이오세프 호스 카이 아우투스 에마데튜센 토 이에수입니다.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예수님이 운명하신 시간이 오후 3시가 됩니다. 이때는 금요일이며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들어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해가 저물었다는 것은 안식일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에 마치게 됩니다. 이때에 아리마대 출신인 부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제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동사 마데튜오(Plut., Mor.)는 마데테스(3101: 제자)에서 유래했으며, '제자가 되다' to be a disciple, '제자를 만들다' to make a disciple를 의미합니다. 문법은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입니다. 제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 단어는 능동태와 수동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능동태는 이렇게 선택받았으니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지금 당장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전부터 계속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랐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산헤드린 회원으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따랐다는 것은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버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을 도왔고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것과 예수님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고난 주간에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43절은 엘덴 이오세프 호 아포 아리마다이아스 유스케몬 불류테스 호스 카이 아우토스 엔 프로스데코메노스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톨메사스 에이셀덴 프로스 필라톤 카이 에테사토 토 소마 투 이에수입니다.
막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공회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다리는 자라’라는 단어는 (프로스데코마이 4327 동사 분사 현재 중수디포 주격 남성 단수) 영접하다, 기다리다, 풀려나기를 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사람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은 간절히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중수디포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죄에서 풀려나 해방을 얻은 자가 된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매일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다 보니 하나님께서 아리마대 요셉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미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천국이 아리마대 요셉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매일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주님은 반드시 이 땅에 구름 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 주님을 소망하면 나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처럼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매일같이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58절은 후토스 프로셀돈 토 필라토 에테사토 토 소마 투 이에수 토테 호 필라토스 에켈류센 아포도데나이 토 소마입니다.
마 27: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아리마대 요셉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로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의 시체를 내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눈치 보면서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은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주라고 했는데 동사 아포디도미(Homer 이래)는 아포(575: ∼로부터, ∼로부터 멀리)와 디도미(1325: 주다)의 합성어이며, 본래 '넘겨주다, 양보하다, 돌려주다'를 의미하며, 중간태로 '팔다 sell'를 의미합니다. 문법은 동사 부정사 과거 수동태입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리마대 요셉의 요구에 빌라도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동태를 쓴 것은 아리마대 요셉의 강청에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민란이 일어날까 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함부로 예수님의 시체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었다고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었다는 것은 수동태를 통해서 볼 때 아리마대 요셉의 끈질긴 요청이 빌라도에게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내어주라고 한다면 능동태를 사용해야 합니다. 빌라도가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체가 빌라도가 아닌 아리마대 요셉이 된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렇게 자신의 지위와 재력을 가지고 끝까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장사 지냈습니다. 우리도 이런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시체를’이라는 단어는 (소마 4983 명사 목적격 남성 단수) 몸, 시체, 육체,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σωζω(소조 4982) 구원하다, 구원을 얻다, 보전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운명하신 예수님의 몸을 달라고 했는데 이 몸은 바로 생명을 살릴 몸이며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영화의 구원을 이룰 몸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입니다.
이 몸을 달라고 하는 직접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장사 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정한 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나의 믿음과 행동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유월절의 어린양의 남은 고기를 불태우라고 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고기를 부정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몸을 통하여 새 생명의 소망을 가지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도망을 쳤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과감하게 빌라도에게 나가 예수님의 몸을 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몸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28절은 호푸 가르 에안 헤 토 프토마 에케이 쉬나크데손타이 호이 아에토이입니다.
마 24: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예수님께서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부정한 독수리들이 모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검은 시체입니다.
‘주검이’이라는 단어는 (프토마 4430) 주검, 시체,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πιπτω(핍토 4098) 박살나다, 무너지다, 망하다, 잃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하여 죽은 시체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주님을 원망하면서 부정했던 자들이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의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저주를 받은 자들의 시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17절은 피신 데 프로소크디센 텟사라콘타 에테 우키 토이스 하마르테사신 혼 타 콜라 에페센 엔 테 에레모입니다.
히 3: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에게가 아니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광야 1세대들에게 40년 동안 노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 한 자들에게가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시체가’이라는 단어는 (콜론 2966) 시체, 지체,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κολαζω(콜라조 2849) 벌주다, 벌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원망 불평하여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 죽은 시체들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 이 땅에서 멸망을 받아 시체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 멋대로 인생을 살다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결국 시체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요구했던 예수님의 몸은 σωμα(소마)입니다. 이것은 다시 부활하여 생명을 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빌라도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πτωμα(프토마)도 아니요, κωλον(콜론)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σωμα(소마)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지내신 몸을 무엇으로 달라고 하십니까? σωμα(소마)입니까? 영원한 영화의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달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도 부활의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πτωμα(프토마)의 몸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영원히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자이며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주님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κωλον(콜론)의 몸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신이 잘못하여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이 몸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몸을 요구할 때에 σωμα(소마)의 몸을 요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주로 이 땅에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영광의 주로 오시는 주님을 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30절은 카이 토테 파네세타이 토 세메이온 투 휘우 투 안드로푸 엔 토 우리노 카이 토테 콮손타이 파사이 하이 퓔라이 테스 게스 카이 옾손타이 톤 휘온 투 안드로푸 엘코메논 에피 톤 네펠론 투 우라누 메타 뒤나메오스 카이 독세스 폴레스입니다.
마 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σωμα(소마)의 믿음입니다. 내가 죽어도 사는 신앙이 바로 σωμα(소마)의 신앙입니다.
25절은 에이펜 아우테 호 이에수스 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카이 헤 조에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 칸 아포다네 제세타이입니다.
26절은 카이 파스 호 존 카이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 우 메 아포다네 에이스 톤 아이오나 피스튜에이스 투토입니다.
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σωμα(소마)의 말씀입니다. 너도 죽으면 소마의 몸으로 될 것을 믿느냐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느냐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님의 몸을 요구할 때에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땅에 나를 데리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의 프토마의 몸을 요구하거나 콜론의 몸을 요구하고 있다면 구원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의 소마의 몸을 소망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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